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2)
던전 견문록-22화(22/319)
# 22
던전 견문록
제 23 화
암상인의 까만 눈동자가 비열하게 번들거렸다. 왠지 모르게 허를 찔린 기분이라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표정을 숨겼다.
“필요한 거라… 뭘 말하는지 모르겠군.”
애써 시치미를 떼어보았지만 암상인은 마치 모든 걸 안다는 듯한 얼굴이다.
“여기에서 나흘 거리쯤에 교룡왕 아낙스투스의 미궁이 있지요. 아낙스투스님을 몇 번 만나본 적이 있는데 꽤나 성질이 급하고 난폭한 분 같았습니다.”
협박처럼 들린다고 하면 자신이 과민한 것일까. 김진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바라는 게 뭐지?”
“바라는 게 있는 건 제가 아니지요.”
당장에라도 저 얄밉게 지껄여대는 주둥이를 후려치고 싶었지만 그는 꾹 눌러 참았다. 암상인을 함부로 대하기에는 께름칙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뭘 제공해 줄 수 있지?”
“이제야 조금 흥미가 동하신 모양이군요.”
별말도 아닌데 암상인은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저희 블랙 머천트에서는 구하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미궁의 업그레이드에 필요한 자금부터 용병까지 없는 게 없지요. 지금은 아니겠지만 원하신다면 인간 노예도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
암상인의 태도는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싸구려 상품을 파는 외판원 같은가 하면 돌변해서 음흉한 사기꾼 같기도 하고 또 어떨 때 보면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위험스러운 분위기가 풍기기도 했다.
“게다가 저희 블랙 머천트는 새롭게 시작한 미궁 주인들의 고충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금도 부족하고 손도 부족하고, 부족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하여 저희는 고객이 대금을 지불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김진우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도 암상인은 계속해서 입을 놀려댔다.
“요컨대 외상도 가능하다는 말입죠.”
친절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암상인의 제안은 꿀을 바른 듯 달콤했다. 하물며 다른 미궁의 세력이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 김진우의 상황이라면 먼저 나서서 부탁해도 모자랄 제안이었다.
“조건이 너무 좋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을 정도로 좋은 제안이야.”
“저희 블랙 머천트는 언제나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니까요.”
김진우의 말에 암상인은 비굴하게 웃으며 손을 비벼댔다.
“원하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계약서를 쓸 수도 있습니다. 원하는 건 뭐든지 말만 하십시오.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용병부터 반짝거리는 다운 잼까지 원하는 만큼 구해드리…….”
“거절한다.”
“네?”
한참 떠들어대던 암상인은 자신의 말을 자른 김진우의 날 선 음성에 순간적으로 얼빠진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런 암상인의 얼굴을 보며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란 없지. 하물며 이 땅 밑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이건 어디까지나 신생 미궁의 주인들 고충을 나누고자 하는 저희 블랙 머천트의 신념에 해당되는…….”
“조건이 있겠지?”
이번에도 그는 암상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암상인은 머뭇거리다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조건이라고 해봐야… 아주 사소한, 정말 사소한 담보를 잡는 정도입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암상인의 말에 김진우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 제안은 거절하도록 하지.”
“다시 생각해 보시죠. 언제 아낙스투스님의 수하들이 쳐들어올지 모릅니다. 지금 있는 병력으로는 그들을 막을 수 없을 텐데요.”
이제는 설득이 통하지 않으니 숫제 협박이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듯 김진우는 암상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암상인은 한참을 떠들어대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가의 미궁을 떠났다.
“도미니크.”
‘네?’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암상인이 떠난 미궁, 김진우는 게이트 너머의 어둠을 바라보며 그만큼이나 어두운 얼굴을 해 보였다.
‘주인님, 암상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에요. 적이 쳐들어오면 지금의 전력으로는 막을 수 없어요.’
어지간해서는 그의 말을 거역하지 않는 도미니크가 이번만큼은 이례적으로 그의 결정에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신용할 수 없는 자와 거래를 할 수는 없어. 도미니크 네 말대로라면 저들은 이번 일에서 남는 게 없지. 그런데 왜 나를 도우려 할까. 뭔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겠지.”
‘하지만…….’
“그만! 늑대를 물리치자고 호랑이를 끌어들일 수는 없어.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 하도록 하지.”
‘네, 주인님.’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도미니크는 그의 말을 따랐다. 하지만 걱정 가득한 얼굴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는지 내내 얼굴을 펴지 않았다.
“이기면 돼. 이기면.”
그런 그녀를 향해 되뇌는 그의 말이 정말 그녀를 향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향한 것인지 모호했다.
***
암상인이 다녀간 뒤 김진우는 곧장 미궁을 나섰다. 오랜 시간 나가의 미궁 특유의 한기에 노출되어 있어선지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미궁을 나서니 대번에 막힌 숨통이 탁 트였다.
하지만 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적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서둘러 볼일을 봐야 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인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연락도 없이 찾아온 김진우를 백 선생이 언제나처럼 퉁명스러운 얼굴로 반겨주었다.
“여기가 다산 콜센터라도 되는 줄 알아, 궁금한 것만 있으면 찾아오게?”
말로는 투덜거리면서 눈을 빛내는 꼬락서니가 김진우가 대체 뭘 물어볼지 기대하는 얼굴이다.
“아낙스투스의 미궁이란 곳을 아십니까?”
“아낙스투스?”
“네. 교룡이라 불리는 놈들의 왕이랍니다.”
암상인에게 주워들은 이름을 말하니 백 선생이 미간에 깊게 주름을 잡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미궁관리사무소를 찾아가는 게 낫지 않나? 거기라면 자료가 꽤나 많을 것 같은데.”
“미궁관리사무소는 다 좋은데 말이 너무 많아서 말이죠.”
당장 민머리가 애처로운 관리소의 소장만 해도 미주알고주알 온갖 얘기를 떠들어대는 수다쟁이다.
그런 그에게 무언가를 물었다가는 금세 동네방네 소문날 게 분명했다. 그래서 김진우는 차라리 백 선생에게 대가를 치르고 정보를 사는 것을 선택했다.
“아낙스투스라…….”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인지 백 선생은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모르십니까?”
“가만히 좀 있게. 정신 사나워서, 원.”
초조한 마음에 독촉했다가 괜스레 타박만 받은 김진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가뜩이나 주름진 얼굴을 이리저리 찌그러뜨리며 생각에 잠긴 백 선생이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가물가물하네. 급한 일인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끄응. 그럼 내일 다시 찾아오게. 내 머릿속을 뒤지든 남의 머릿속을 뒤지든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소득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실망하기에는 일렀다. 백 선생이라면 어떻게든 실마리를 찾아줄 게 분명했다.
감정소를 나선 김진우는 이번에는 이준영에게 연락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진우 씨가 먼저 나를 찾는대요?”
“몇 가지 부탁할 게 있어서요.”
전화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준영은 바람처럼 그의 집을 찾아왔다.
“뭔데요?”
지난번의 일로 단단히 신세를 진 그녀는 거절 따위는 생각도 않는다는 듯 곧장 용건을 물어왔다.
“혹시 제가 말하는 것들을 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떤 거요?”
어쩐지 신이 나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김진우는 빠르게 자신이 필요한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그녀는 묘한 얼굴을 해 보였지만 이내 알았다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이준영이 김진우를 찾아왔다.
“말한 대로 구하긴 구했는데, 이걸 대체 어디에 쓰려고…….”
“고맙습니다. 신세는 꼭 갚도록 하죠.”
대답 대신 감사 인사를 해오는 그를 보며 이준영이 입맛을 다셨다.
“일단 우리도 쓰는 것들이기는 한데, 혹시라도 엉뚱한 데 쓰면 안 돼요? 우리끼리 저 아래 들어가서 쓰는 것까지 터치하진 않지만, 괜히 공개적으로 드러냈다간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몇 가지 당부를 한 이준영은 바쁜 일이 있는지 금방 사라졌다.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준 그녀에게 내심 고마움을 느낀 그는 문자로 신세는 꼭 갚겠다고 하니 그녀가 금세 답문을 해왔다.
[목숨 빚을 아직 다 못 갚았어요.]언제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탁하라는 것일까. 그 호의 가득한 문자에 피식 웃고 만 그는 그녀가 건네고 간 보따리를 쳐다보곤 집을 나섰다.
“어떻게 됐습니까?”
감정소에 들어선 김진우가 인사도 생략하고 용건부터 꺼내 드니 백 선생이 대뜸 혀를 찼다.
“뭐가 그리 급해서. 일단 앉게.”
마지못해 자리에 앉은 그를 향해 백 선생이 말했다.
“먼저 한 가지만 묻지.”
“물으십시오.”
“대체 이게 왜 알고 싶은 거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그래서 그는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그런 그의 태도를 예상이라도 했는지 백 선생은 혀를 한 번 차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낙스투스의 미궁이라면 꽤나 깊은 곳에 있는 미궁일세. 언더 워 당시에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없는 교룡의 미궁이지. 그래서 기억을 꺼내는 데 한참 걸렸어.”
“깊은 곳이라면 몇 층이나…….”
김진우의 질문에 백 선생이 말간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미궁에 침입자가 있습니다. 속히 미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기다리던 대답 대신 엉뚱하게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막 입을 열려던 백 선생은 갑작스레 소스라치게 놀라는 김진우를 보고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자네, 갑자기 왜 그러나?”
백 선생이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빨갛게 번쩍이는 메시지 창 탓에 정신이 없는 탓이다.
“이런 망할!”
“자, 자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진우는 백 선생이 미처 잡을 새도 없이 감정소를 뛰쳐나갔다.
[현재 멀지 않은 외곽을 순찰 중이던 나가 병사들이 적과의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남은 병력은 전부 게이트에 집결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 중입니다.]긴급함을 알리듯 정신없이 번쩍거리는 메시지 창을 본 그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당장에라도 포탈을 열고 싶었지만 시내 한복판에서 미궁으로 향하는 통로를 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챙겨가야 할 것도 있었다.
결국 방법을 찾지 못한 그는 초조한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집으로 향했다. 단숨에 집까지 날아간 김진우는 이준영이 주고 간 꾸러미를 손에 쥐었다.
[적의 병력이 게이트에 도달하여 대기하고 있던 병력과 전투를 시작했습니다.]“포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