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20)
던전 견문록-220화(220/319)
# 220
던전 견문록
제 221 화
“꺄아아아아악!”
솜털이 곤두서는 끔찍한 호곡성과 함께 마지막 반인반마가 나가떨어지고,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김진우는 말없이 궁니르를 회수하고는 전장을 둘러보았다.
온 사방에 사지가 절단 나거나 심장어림에 구멍이 뚫린 반인반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귀한 고대 영웅급 소환수들이 쓰러져 있었다.
염소와 인간, 독수리를 합쳐놓은 듯한 생김새의 괴물들은 그 흉악한 외양만큼이나 억세고 사나웠다.
덕분에 압도적일 거라 생각했던 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발리셔스가 공들여 복원한 고대의 소환수 중 몇이 갈기갈기 찢겨진 것이다.
저층 미궁의 주인 정도는 될 거라 예상했던 소환수 몇을 허무하게 잃고 나서야 그는 상대의 전력이 그 이상임을 인정해야 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었다. 만약 자신이 처음부터 나서서 궁니르를 사용했다면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겠지만, 그만큼 피아의 전력을 비교하기가 어려웠으리라.
이로써 확실해졌다. 나가들만으로는 이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비록 완벽하게 과거의 힘을 되찾은 것은 아니나, 하나하나가 강력하기 그지없는 고대의 소환수들이 수적 우위를 점하고도 셋이나 당하고 말았다.
아마 나가들을 전투에 투입했다면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을 것이다.
“아쉽지만 생존자는 없습니다.”
모리건이 나서 피해를 보고했다. 정보를 탐문할 적 두엇 정도는 남겨두라 했던 그의 지시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검은 흉조가 관장하는 것은 죽음, 그런 그녀에게 탐문할 적이나마 살려두라 말했던 것은 애당초 무리한 명령이었다.
“아쉽게 됐군.”
김진우 역시 말과는 다르게 전혀 아쉬운 기색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막 적의 정찰 부대 중 하나를 처리했을 뿐이다. 죽은 적을 대신할 이들은 아직 넘치도록 많았다.
“생명석을 회수하고 바로 이동한다.”
***
전투가 이어졌다. 매 전투마다 고대의 영웅급 소환수가 하나에서 둘이 희생되었다.
그 결과, 총 열 번의 전투를 치렀을 때, 나가를 제외한 소환수의 숫자는 고작 열다섯이 채 되지 않았다. 하루 동안 연이어진 전투에서 무려 복원된 모아이 중 절반가량이 희생된 것이다.
피해가 예상보다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진우의 표정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제 몸을 복원해 주기를 기다리는 모아이의 수는 아직 수백이나 남아 있었다. 이 정도 손실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저 무의미한 피해였다면 모를까. 흉험한 전투 속에서 그가 얻은 것은 결코 적지 않았다.
가장 먼저 그는 마창의 기억 속에서나 사용해 보았던 궁니르에 익숙해졌다.
백발백중, 빗나가는 법이 없다던 마창은 과연 전설 그대로였고, 약점 간파 능력이 더해지니 창을 내지를 때마다 반드시 하나의 생명이 사라졌다.
이제껏 되는대로 손에 잡히는 무구를 사용해온 김진우가 마침내 자신만의 무기를 찾은 것이다.
마창을 실전에서 사용해 보았다는 것이 작은 소득이었다면, 부대의 허실을 알게 된 점은 보다 큰 소득이었다.
주력으로 내세울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모아이들의 복원은 완벽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력했지만 그만큼 느렸고, 이지가 없는 만큼 적의 협공이나 전술적 공격에 취약했다. 그러다 보니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피해가 누적되었다.
만약 그들을 주력으로 내세울 생각이라면 반드시 개선이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었다.
여기까지는 전부 부가적인 소득이라 할 수 있었다.
가장 큰 소득은 그가 미궁을 떨치고 나온 목표와 관련이 있었으니, 마침내 복원된 지저의 층이 어떤 식으로 변했는지를 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목적을 이루었다고 해서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가 생각한 가장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되었던 탓이다.
“정확한 건 미궁의 주인을 만나봐야 알겠지만, 지금까지 상대해 온 적의 전력을 보았을 때 적들은 남작급의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최소한으로 본다 해도 백작급 이상, 어쩌면 공작급의 미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어.”
궁니르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김진우가 애써 침착한 어투로 말했다.
“만약 적들이 진짜 공작급 미궁의 군대라면…….”
“우리는 층간 페널티 없이 공작의 군대와 싸워야겠지.”
자신이 심층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본 경험이 있다고 한들, 나가들은 고작해야 타락한 남작들을 상대해 보았을 뿐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선공을 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모리건은 차라리 잘되었다며 그들을 모조리 먹어 치우라 조언했다. 그리고 그 역시 그럴 생각이었다.
상처 입은 맹수는 피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것도 맹수의 상처가 어지간했을 때의 이야기다.
대미궁이 반파에 달하는 피해를 입은 지금, 다른 미궁의 피해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이참에 상처 입은 맹수를 사냥해 그 가죽을 벗기고 송곳니를 뽑아내는 것도 한 번 고려해 볼 만했다.
물론 지금 당장은 무리였다.
애초에 전면전을 염두에 두고 병력을 꾸려 나온 것도 아니거니와, 전승의 사령관, 정복자의 카리스마로 메꾸기에는 상대가 너무 강했다.
“이만 미궁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김진우는 열다섯 개의 적 정찰대를 괴멸시키는 것을 끝으로 귀환을 결정했다. 하지만 세상만사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꼬리가 붙었습니다.”
본대에서 벗어나 근방을 정찰 중이던 언더 엘프 순찰자들이 전해온 소식에 김진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건가.”
이 정도로 근방을 휘저었으면 잠깐이나마 정찰 활동이 위축될 거란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다.
“적의 규모는 약 이백, 아무래도 정찰을 목적으로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의 생각과는 달리 미궁을 박차고 나온 것은 추가 정찰 부대가 아닌 진짜 전투 부대였다.
돌아서서 적을 맞아 싸워야 할까. 그도 아니면 이대로 귀환하여 다음을 기약해야 할까. 결정을 내린다면 지금 당장 내려야 했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더는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전승의 사령관 타이틀은 단 한 번의 패배와 후퇴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양날의 검이었으니까.
김진우는 자신의 결정만을 기다리는 나가들을 바라보았다. 명이 떨어지면 전력의 열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을 충성스러운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충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분명 용맹한 전사들이었지만 공작의 군대를 상대할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다.
“적을 따돌리고 미궁으로 돌아간다.”
이미 목적한 바는 이루었다. 적의 정체도 알아냈고, 언더 엘프 순찰대를 괴멸시킨 적의 정찰 부대는 진즉에 처리한 상태였다. 굳이 무리한 전투를 치를 필요는 없었다.
“순찰자들은 부대의 흔적을 지우며 뒤를 따르라.”
[훌륭합니다. 자고로 현명한 지휘관은 불리한 전장에서는 싸우지 않는다 했습니다.] [당신의 선택으로 인해 불필요한 전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술적 식견의 탁월함과는 별개로 당신의 결정은 전승의 사령관이라는 명성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비록 적 앞에서 등을 돌려 달아난 것은 아니었지만, 미지의 적에게 전승의 사령관의 위엄을 보여줄 기회를 버린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나가들에게 주어졌던 증폭 효과가 일시적으로 사라지고 페널티가 가해집니다.] [사령관의 결단으로 싸울 기회를 잃어버린 용맹한 전사들의 몸이 무거워집니다. 그들은 평소보다 느리게 이동하고 쉽게 지칠 것입니다.] [페널티의 지속 시간은 부대가 미궁으로 돌아갈 때까지입니다.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상황이 꽤나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성공적으로 귀환할 경우 모든 페널티가 사라집니다.]“제길.”
절로 욕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시스템은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결단을 비난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부대를 반전하여 적을 맞아 싸울 경우 부대에 가해진 페널티가 사라지고, 다시 전승의 가호가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반전하여 적을 맞을 준비를 하시겠습니까?]이래서야 싸우라고 등을 떠미는 꼴이었다.
“전술적 기동도 모르는 건가. 생각보다 빡빡하게 구는군.”
전력으로 전장을 이탈해도 모자랄 판에 발목을 잡는 메시지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어 끝내 닿지도 않을 푸념을 내뱉었다.
[핑계는 통하지 않습니다. ‘전승’이라는 이름은 입맛대로 쉬운 전투만을 승리하여 얻어낼 수 있을 정도로 싸구려가 아닙니다.] [결정을 번복하시겠습니까?]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니. 적을 맞아 싸우는 건 내가 선택한 ‘전장’에서다.”
그는 편협한 메시지에 불만을 제기하듯 후퇴라는 말 대신 전술적 판단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부대 전체에 페널티가 가해졌습니다.] [이동속도가 하락하고, 체력과 근력이 대폭 떨어졌습니다.] [부대의 사기가 저하되었습니다. 두려움을 모르던 그들의 마음속에 한 가닥 불안이 싹틉니다.] [전승의 사령관의 명성이 다소 하락했습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지는 가차 없었다.
전승의 가호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페널티가 들어서자 나가들의 표정에서 자신감이 급격하게 사라졌다.
당장 겁을 집어먹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나가들은 그가 이제껏 본 적 없는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본 적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잊고 있었을 뿐이다.
처음 나가의 미궁을 계승했을 때, 나가들은 늘 두려움을 억누르고 처절하게 적과 싸워 이겨왔다.
교룡왕과의 전쟁이 그러했고, 하찮은 뿔난 쥐들이 미궁을 습격했을 때도 그러했다. 그들은 단지 9층에서 태어난 수많은 소환수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가들의 힘을 과신했던 것은 언제나 정복자의 카리스마가 함께해 왔고, 전승의 가호가 그들을 축복하고 있었던 탓이리라.
입맛이 썼다. 늘상 화장을 하고 있던 연인의 민낯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의 감정이 이러할까. 마치 콩깍지가 벗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김진우가 갑작스레 나가들을 하찮게 여기게 되거나, 종의 한계를 절감하고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현실을 깨닫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한 층 더 명확하게 떠올렸을 뿐이다.
“후, 서둘러 미궁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짧은 한숨과 함께 복잡한 머릿속의 잠념을 털어낸 김진우는 이내 부대의 이동을 서둘렀다.
[명예로운 전투 대신 회피를 택한 당신의 결정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일전에도 몇 번인가 과제 아닌 과제를 강요한 적 있는 메시지였지만, 이번만큼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지금의 메시지는 어딘가의 얄미운 누군가가 싸움 구경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난 듯 자신의 등을 떠미는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그는 이내 호법룡의 등을 박차며 부대의 속도를 끌어올렸다. 같지도 않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시간은 없었다.
***
페널티는 생각 이상으로 가혹했다. 단지 하나의 타이틀이 사라지고 페널티를 받았다고 생각하기에는 부대의 모습이 정도 이상으로 무력했다.
층이 좁다 하며 9층을 단숨에 관통해 냈던 호법룡들은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지쳐 혀를 빼 물었고,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양다리를 어기적거려 댔다.
“저희들이 최대한 적의 추격을 방해하고는 있지만, 이대로라면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언더 엘프 순찰자들이 지친 얼굴로 상황을 알려왔다.
“제길, 페널티만 아니었어도.”
해룡의 심장을 사용하기 전에 나가들이 떼 몰살당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전력을 보존하고 필요에 따라 진퇴를 결정하는 건 그가 늘 해왔던 일이니까.
게다가 전략적 후퇴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거늘, 전에 없이 빡빡하게 기준을 세우는 메시지가 이해되지 않을 판국이었다.
마치 든든하게 뒤를 받쳐 주던 시스템이 자신에게 등을 돌린 듯한 기분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진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