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21)
던전 견문록-221화(221/319)
# 221
던전 견문록
제 222 화
81. 하이로드의 유산
왜 이제야 눈치챘을까.
이상의 징후는 수도 없이 많았다.
이제까지 그가 보아온 메시지 창은 단지 주어진 상황에 맞게 설명을 해주었을 뿐, 직접적으로 선택에 간섭하려 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메시지는 차라리 노골적일 정도로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기이하게도 메시지에서 은근히 드러나는 적대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모든 것이 비정상이었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아채다니, 스스로의 멍청함에 차라리 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자책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먼저 지금의 상황이 단발적으로 일어난 지저의 변덕인지, 그도 아니면 정말로 지저가 자신에게 등을 돌린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했다.
“제길.”
당장 해야 할 일을 깨달았지만 막막한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지저는 장사치와 흥정하듯 거래할 수 있는 상대도, 소통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지저는 단지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이었다.
지저라는 거대한 괴수를 상대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이 진실이란 아무런 징조도 없이 인과도 없이 드러나고는 한다.
지금이 딱 그 경우였다. 그는 갑작스레 캐서린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왜 하필 지금 이때, 생각났는지는 모른다. 그저 그녀의 생생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을 뿐이다.
“너 이전에 내가 각성했고, 그리고 나 이전에 각성한 이들이 있어. 그리고 그들은 나와 만난 너를 끊임없이 시험하려고 할 거야.”
그녀는 먼저 각성한 첫 번째, 두 번째 하이로드가 자신을 시험하려 들 거라 경고했다.
“아직은 그들의 시험이 버거울 거야. 하지만 이겨내야 해.”
당시, 자신은 그 말을 듣고 코웃음 쳤다. 다른 곳은 몰라도 최소한 이곳 9층에서라면 먼저 각성한 하이로드가 무슨 짓을 벌여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하이로드씩이나 되는 존재들이 굳이 질 낮은 도발로 자신을 시험하려 할까. 최소한 블랙 머천트가 흑호의 미궁을 두고 은밀한 문제를 냈던 것처럼 무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시험에 든 것은 아닐까.
확신할 수 없었다. 애초에 잠깐의 고민으로 알 수 있었다면 이처럼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지도 않았으리라.
하지만 당장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 없다고 해서 영영 답을 구하지 못하란 법은 없었다. 그는 최소한 해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캐서린, 또 다른 하이로드이자 통곡의 권능을 지닌 군주라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이대로라면 따라잡히고 맙니다.”
캐서린을 만나 일의 전모를 파악하는 건 나중의 일이다. 지금 당장은 반인반마들의 추격을 뿌리치는 게 우선이었다.
“속도를 더 끌어올린다!”
전승의 가호는 사라졌지만 정복자의 카리스마는 여전히 효과가 있었다. 그의 명령에 지친 나가들이 다부진 얼굴로 이동속도를 올렸다.
“왕이시여…….”
하지만 언더 엘프 순찰자의 눈에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의 순찰자가 조용히 다가와 거듭 경고했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나가 용사들과 마법사, 그리고 투사들을 버린다면 지금보다는 이동속도가 빨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퇴각을 서두르는 이유가 무색해지고 만다. 그는 이번 전투에서 단 하나의 나가도 잃을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포탈을 연다면…….”
순찰자가 초조한 얼굴로 제안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면 힘들여 두 다리로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얼마가 될지 모를 적에게 굳이 미궁의 심장부를 보여줄 필요는 없겠지.”
적의 군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내더라도 대미궁의 심장부가 적에게 노출된다면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게 되고 만다.
이럴 때마다 한 번 열리면 24시간 내내 노출이 되는 포탈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하다 못해 포탈이 연결된 곳이 오너 룸만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아도 되련만.
“가만…….”
내내 굳어 있던 김진우가 갑작스레 손을 들어 대열을 정지시켰다.
“포탈이 연결된 곳이 꼭 대미궁일 필요는 없겠군.”
그렇게 말한 그가 품을 더듬어 빛 바랜 양피지 뭉치를 꺼내 들었다.
***
“군주님, 그러지 않아도 제가 찾아뵙고 드릴 말씀이 있었…….”
언제나처럼 포탈이 열리기가 무섭게 마침 할 말이 있었다며 달려오던 미미르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벙벙한 기색을 한 미미르의 눈동자가 김진우의 어깨 너머 포탈을 향해 있었다.
“나가들이 왜 갑자기…….”
미미르는 포탈 너머에서 꾸역꾸역 몰려드는 나가들의 행렬을 보며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꼬리가 붙었는데,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싸우기가 영 마땅치 않아.”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 한마디만으로 미미르는 모든 상황을 이해했는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이 무슨 터무니없는 짓을!”
“지금 이렇게 화내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얼굴에 철판을 깔았는지 김진우의 태도는 뻔뻔스럽기만 했다.
“이 빚은 다음에 반드시 받아내도록 하겠습니다!”
소리를 버럭 지른 미미르가 블랙 머천트의 호위 용병들을 소집하는 것을 보며 김진우는 유유히 자리를 벗어났다.
“포탈.”
한적한 복도 끝, 방문을 벌컥 연 김진우는 망설임 없이 포탈을 소환했다.
***
블랙 머천트의 본거지를 경유하여 대미궁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한 김진우는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적의 추격을 뿌리치는 데 성공하여 페널티가 전부 무효화됩니다.] [전승의 가호가 다시 활성화되었습니다.] [무력해졌던 나가들이 다시 전처럼 활기를 찾았습니다.]온갖 협박 아닌 협박으로 압박해 오던 메시지가, 정작 일이 모두 끝나자 짤막한 결과만을 말해주었다.
그게 또 어딘지 모르게 불만스럽게 느껴져 그는 차라리 화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주인님?”
갑작스레 포탈이 열리고 나가들이 쏟아져 나오자, 도미니크가 다소 놀란 얼굴로 그를 반겨주었다.
그녀는 제 주인의 갑작스러운 귀환에 일이 잘못된 건 아닌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상황이 심각하다. 적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고, 우리의 힘은 예상했던 것 보다 약했다.”
김진우는 그런 그녀에게 바깥의 상황을 모조리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이야기가 계속되는 내내 불안한 얼굴로 포탈을 힐끔힐끔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녀는 이내 심각한 얼굴로 생각할 시간을 달라 요구했다. 어차피 하루아침에 전력의 열세가 복구될 것도 아닌지라 그는 그러마 하고 대답해 주고는 다이달로스를 찾아 나섰다.
“작업을 서둘러라. 나가들을 급히 써야 할 일이 생겼다.”
다이달로스는 갑작스러운 요구에 당황한 듯했지만, 그는 반론은 받지 않았다.
“만약 불가능하다면 해룡의 심장은 도로 가져가겠다.”
단 한마디였지만 그 효과는 굉장했다. 입을 한 댓발은 내밀고 불평하려던 다이달로스가 입을 다문 것이다. 자신의 과오조차 잊을 정도로 뻔뻔한 미궁 설계자였지만 귀한 재료를 빼앗기는 것만큼은 무서웠던 모양이다.
그렇게 다이달로스를 압박한 김진우는 이번에는 발리셔스를 찾았다.
그는 이번 전투에서 드러난 복원된 모아이들의 단점을 전부 설명해 주고는, 그 전부가 개선되기를 원하노라 말했다.
발리셔스는 다이달로스와는 달리 그 어떤 핑계도 대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복원을 기다리느라 대기 중이던 모아이 하나를 작업 책상에 올렸을 뿐이었다.
***
도미니크는 여전히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하기야 무리도 아니었다.
백작들과의 전쟁 이후에나 맞닥뜨릴 거라 생각했던 공작급 미궁과 당장 전쟁을 하게 생겼으니 뾰족한 수가 나올 리가 없었다.
발리셔스와 다이달로스의 연구가 끝나지 않는 한 그녀의 고민 역시 끝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미치광이들이 일을 끝낼 때까지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와 나가들이 연구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손을 놓고 있는 동안에도 미궁의 주인들은 인근 지역을 정찰하고 더 나아가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 것이다.
그는 일이 그렇게 흘러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기세 싸움은 한 번 밀리면 그대로 끝나게 마련이다. 기세에 밀려 웅크린 몸을 다시 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번 웅크리고 적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위축되다 끝내는 미궁을 나서는 것조차 어려워질 게 분명했다.
“군주님!”
생각에 잠겨 있던 김진우는 자신을 부르는 날카로운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무사했군!”
그런 그의 눈에 24시간이 채 되지 않아 사라지지 않은 포탈을 통해 이제 막 넘어온 미미르의 얼굴이 보였다.
“이익!”
그 덕분에 200의 강인한 소환수들과 전투를 치러야 했던 미미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인지 그 커다란 머리통이 완전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뻔뻔스러운 태도에 더욱 화가 난 모양이다.
“대가는 치르겠다.”
아무리 영원의 창고지기를 자처하며 고개 숙인 미미르였다고 해도, 이번 일만큼은 그도 화가 난 임프를 달래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200의 반인반마들을 처리하기 위해 꽤나 큰 손해를 입었을 게 분명했다.
“지금 대가가 중요한 게 아니…….”
“그럼 받지 않겠다는 건가?”
“받습니다! 받습니다요! 누가 안 받는답니까!”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귀물을 밝히는 그 성정이 어디 간 것은 아닌지, 미미르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와중에도 곧장 그의 말을 맞받아쳤다.
“지금은 대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포탈을 그렇게 함부로 연결하시면 저희 입장이 곤란해집니다! 제가 괜히 그동안 숨어지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생각보다 잘 막아낸 모양이군, 이렇게 딴소리하는 걸 보니.”
여전히 뻔뻔하기만 한 김진우의 태도에 미미르가 화가 나서 짤막한 사지를 버둥거려댔다.
“막아내는 거야 어떻게든 막아냈지만, 군주님 덕분에 괜한 적을 만들고 말았으니 그게 문제 아닙니까!”
어느 정도는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던 김진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미미르의 시건방을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나를 위해 내 적을 몰아낸 것이 그토록이나 억울한가.”
“그게 무슨…….”
김진우가 왕좌에 앉은 채로 오만하게 시선을 아래로 했다.
“지금은 찬탈자의 눈을 피한다는 핑계가 있다지만 결국 그대가 따라야 할 주인이 누구인지를 잊지 말라”
미미르가 뒤늦게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토라진 어린아이처럼 불만스럽게 내밀어진 주둥이만큼은 여전했으니, 마음으로 그의 말에 수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빤했다.
“그런데 말이다.”
하지만 김진우는 미미르의 불만을 들어주는 대신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말씀하십시오.”
차마 반항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보인 미미르의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바라보며 김진우가 몸을 일으켰다. 성큼성큼 단을 내려온 그가 몸을 숙여 시선을 마주했다.
“지저에 난리가 있었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지. 그 난리가 얼마나 끔찍했던지 내 미궁조차 7할이 파괴되는 손실을 입었어. 그런데 말이야.”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블랙 머천트의 근거지는 멀쩡하더군.”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탓인지 임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피해가 왜 없었겠습니까. 용을 쓴 끝에 겨우 복구한 것입죠.”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전과 똑같아. 파괴되었다 복구된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달라진 게 있어야 할 텐데.”
“상황이 바쁘니 아마 제대로 못 보신 것 같습니다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만이 가득하던 미미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호들갑을 떨며 차라리 변명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그게 또 그렇게 수상할 수가 없었다.
“미미르여.”
눈을 가늘게 뜬 김진우가 미미르의 뺨을 잡아 억지로 시선을 마주했다. 자꾸만 굴러가는 눈동자를 억지로 자신에게 고정시킨 그가 서서히 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먼저 경고하겠다. 나를 기만하고 거짓을 주워섬기지 말라. 나는 오직 진실만을 원한다.”
군주의 한마디는 언령이 되었고, 미미르는 감히 대답조차 못한 채 고개만 끄덕여댔다. 그런 미미르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영원의 창고는 어디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