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22)
던전 견문록-222화(222/319)
# 222
던전 견문록
제 223 화
“말씀드렸다시피 때가 되면 군주님의 눈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질문에 답하라.”
미미르는 핏줄이 투둑 불거져 나온 얼굴로 간신히 대답했다. 하지만 김진우는 겨우 그런 대답을 듣고자 언령까지 동원한 것이 아니었다.
“영원의 창고를 내가 본 적이 있었던가?”
보다 구체적인 질문, 이번에는 미미르가 아예 대답을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언령에 저항한 탓에 핏줄이 도드라진 얼굴은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지만, 미미르는 버티고 또 버텼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이다. 결국 실낱같은 핏줄기가 콧구멍 아래로 흘러내리자 미미르가 입을 열었다.
“으… 그렇습니다.”
“그렇군.”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것일까.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미미르는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그럼 블랙 머천트의 본거지가 영원의 창고인가?”
그런 미미르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김진우가 질문을 던졌다. 언저리를 맴돌던 대화가 단숨에 중심부를 관통한 느낌이었다.
임프는 눈을 부릅뜬 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기색만큼은 숨길 수 없었는지, 눈알을 마구 이리저리 굴려댔다.
“맞군.”
대답은 없었지만, 이미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언령의 압박으로 거짓이 배제된 상황에서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긍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미미르, 영원의 창고지기여.”
김진우가 차갑게 웃으며 고개 숙인 임프를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그 말간 시선을 견디지 못한 미미르가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나의 창고를 보기를 원한다.”
***
결국 김진우는 창고를 볼 수 없었다. 자격이 되지 않았던 탓이다.
“외눈박이 군주가 남긴 유산을 전부 계승하십시오. 그것만이 영원의 창고 문을 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유산?”
“마창과 이름을 물려받았으나 군주의 성을 물려받지 못했으니, 군주님께서는 아직 창고의 문을 열 수 있는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말을 아끼던 미미르였지만, 결국 시류를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외눈박이 군주의 성이라…….”
옛 군주들의 권능과 영광은 흩어져 온 지저에 나뉘어졌으나, 그들의 성만큼은 가장 깊은 곳에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 영원의 창고를 열려면 심층으로 향해야 했다.
“다음을 기약해야겠군.”
창고 속에 대체 어떤 보물들이 있을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마지막 유산을 받기 위해서 통과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던 탓이다. 옛 권능을 노리는 백작들, 그리고 그 너머의 공작들까지. 그들을 모두 넘어야 비로소 지저 가장 깊은 곳에 닿을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9층과 맞닿은 이름 모를 심층의 공작들을 처리하는 것만 해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블랙 머천트의 본거지 전체가 영원의 창고, 그 자체였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상념에 잠겨 있던 김진우는 바로 곁에서 들려온 도미니크의 음성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대체 외눈박이 군주는 얼마나 많은 보물들을 지니고 있었던 걸까요.”
블랙 머천트가 경매장으로 사용하는 공간 역시 과거에는 보물로 꽉 차 있었다고 했으니, 그 영광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지금의 그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아니, 그보다 대단한 건 그 공간 자체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야.”
하지만 김진우는 창고에 가득 차 있었을 보물보다는 창고 자체에 더욱 관심을 두었다.
어쩐지 찬탈자와 탐욕스러운 귀족들이 블랙 머천트라는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그대로 둔다 했더니, 애초에 본거지는 두 발로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공간의 문을 통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와도 같은 세상. 그것이 영원의 창고이자 블랙 머천트의 본거지였다.
“저는 미미르의 속을 알 수 없어 불안하기만 해요.”
도미니크는 아직 속내조차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미미르에게 너무 큰 힘이 집중되는 것을 우려했다. 도대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영웅급 호위 용병과 불침을 자랑하는 본거지까지, 그녀는 거듭 미미르를 경계하라 조언했다.
“지금은 그대로 두어라. 어차피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테니.”
아직은 외눈박이 군주의 유산을 전부 취하지 못했다. 당분간은 미미르가 블랙 머천트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지저를 활보하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찬탈자가 그러했듯이 그 역시 미미르가 조금 더 수고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탓이다.
그리고 설령 미미르가 다른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고 해도, 그에게는 해결책이 있었다.
볼품없이 뻗은 나뭇가지 끝에 달린 잎사귀. 보기에는 초라하지만, 그 위력도 내력도 결코 평범치 않은 병기가 그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울부짖는 마창, 궁니르는 외눈박이 군주의 성을 여는 열쇠이자 영원의 창고를 여는 유일한 열쇠였다.
“잠시 자리를 비울 테니, 뒤처리를 부탁한다.”
“부디 몸조심하시기를.”
도미니크가 양손을 꼭 모아 쥐고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며 김진우는 궁니르로 땅을 내려찍었다.
“포탈.”
***
포탈은 블랙 머천트의 본거지로 통해 있었다.
방금 전, 격전이 있었을 게 분명했음에도 터럭 하나 상하지 않은 주변의 시설들을 보며 김진우는 미미르를 찾았다.
“뭔가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언령의 압박은 벗어났지만, 여전히 기가 잔뜩 눌린 기색의 미미르가 그를 보며 떨떠름한 얼굴을 해보였다.
“생각해 보니, 지금 당장 문을 못 열더라도 구경이나 해보고 싶더군.”
미미르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안내하겠습니다.”
김진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미미르의 뒤를 따랐다.
경매에 참가할 때 몇 번인가 통과했던 복도를 지나 다시 또 한참을 가다 보니 거대한 문이 나왔다. 용제 아그립투스와 대면했을 때 보았던 석문보다 몇 배는 거대하고 웅장한 문에 그가 감탄을 내뱉었다.
“이곳인가?”
미미르는 대답 대신 벽에 붙어 무언가를 한참 만져댔다. 시간이 지나자 듣기 거북한 굉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그 거대한 문만큼이나 커다란 공터가 나왔다.
“잡동사니를 모아두는 곳입니다. 진짜 영원의 창고는 이보다 더 안쪽에 있습니다.”
미미르는 그저 잡동사니를 모아두는 곳이라 말했지만, 벽면 전체를 빼곡하게 채운 선반과 그 위에 가득 놓인 귀물은 절대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
경매에서도 보지 못했던 상서로운 빛을 흘려대는 보검과 갑주, 방패가 한가득 이었다.
경매에 올려놓는다면 참가자들이 눈이 돌아갈 만한 귀물. 하지만 미미르는 정말로 관심이 없다는 투로 일언반구 설명조차 해주지 않았다.
“이쪽입니다.”
반쯤은 넋을 놓고 선반의 귀물들을 보고 있던 김진우는 미미르의 재촉에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도 한참을 걸었는데, 번쩍거리는 창고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나무 문 앞에 멈춰 섰다.
“이 문 너머에 영원의 창고로 통하는 문이 있습니다.”
“드디어 보게 되는군.”
미미르를 제친 김진우가 문을 열려는데 통통한 손이 허리춤을 붙잡았다.
“한 가지 명심하셔야 할 게 있습니다.”
막 문고리를 잡아가던 그가 심상치 않은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이 안쪽은 이제까지와 완전히 다른 공간입니다. 같은 영원의 창고여도 이 안쪽이 진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너머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평정심을 잃지 마시고, 스스로를 지키십시오. 만약 조금이라도 틈을 보였다간, 영원의 창고가 군주님을 집어삼킬지도 모릅니다.”
“집어삼켜?”
“탐욕에 눈이 멀어 자격이 되지 않음에도 손을 댄 자들은 그렇게 영원의 감옥을 헤매는 수감자가 되었습니다. 부디 제 말을 명심하십시오.”
창고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 입구만이라도 둘러보겠다는데 그 경고가 너무나 거창했다.
하지만 그냥 무시하기에는 미미르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 그도 허투루 받아들이지 못하고 얼굴을 굳혀보였다.
“명심하도록 하지.”
“그럼 부디 조심하시기를.”
김진우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허름한 목재 문을 잡아 당겼다.
끼이이익.
귀에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문 너머에서 와락 어둠이 달려들었다. 김진우는 온몸을 휘감아 오는 어둠을 뿌리치며 천천히 한발 한발 문 너머로 나아갔다.
쾅.
미미르가 문을 닫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낡은 문이 스스로 닫힌 것인지 등 뒤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완전한 어둠이 온 사방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빛이 사라진 세상에서 영원의 창고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은은한 보랏빛 섬광이 휘몰아친다. 그 사이를 이리저리 파고드는 붉은빛이 실타래처럼 엉켰다가 풀리기를 반복한다.
마치 조그만 소우주가 눈앞에서 팽창과 압축을 반복하듯 요요로운 모습. 영원의 창고로 통하는 문은 마치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것처럼 그렇게도 신비로웠다.
뒤늦게 신음처럼 한마디를 내뱉은 그가 그 휘몰아치는 빛무리 앞에 섰다.
“이게 영원의 창고구나!”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눈앞에 두고도 발길을 돌려야 하는 나그네의 심정이 이러할까.
이미 미미르에게 들어 아직은 진짜 창고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 두고 나니 그 사실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깊고도 깊은 상실감에 그는 온몸을 떨었다.
황홀한 섬광이 마치 유혹하듯 그의 앞에서 명멸을 반복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무심코 한 발 나아가 손을 뻗어 휘몰아치는 빛무리를 잡으려 했다.
당장에라도 손이 닿을 듯 다가선 상황. 그 순간, 갑작스레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탐욕에 눈이 멀어 자격이 되지 않음에도 손을 댄 자들은 그렇게 영원의 감옥을 헤매는 수감자가 되었습니다. 부디 제 말을 명심하십시오.”
뒤늦게 미미르의 경고가 떠올랐다. 그는 발작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통로로부터 물러났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
언제부터 울고 있었는지 마창의 소름끼치는 소리가 그제야 들려왔다. 아무래도 통로가 발하는 황홀한 빛에 매료되어 순간적으로 정신을 놓았던 모양이다.
하이로드의 강인한 정신마저 침범해 오는 끔찍한 유혹에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이다지도 하나같이 다…….”
제 주인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것인지,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탐욕의 권능이 영원의 유혹으로부터 저항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마터면 영원의 창고에 빨려들어 가 억겁의 시간을 헤매는 신세가 될 뻔했습니다. 하지만 탐욕의 권능은 모든 것을 빼앗고 탐하는 음험한 힘. 스스로가 갈구하고 갈망하지 않는 이상, 그 끔찍한 집착을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습니다.]한번 정신을 차리자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어둠은 더 이상 고요해 보이지 않았고, 통로가 발하던 빛은 더 이상 신비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둡고 요사스러울 뿐이었다.
툭.
그가 진저리를 치며 노려보는데, 통로가 헛구역질이라도 하듯 꿀렁거리다 무언가를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