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27)
던전 견문록-227화(227/319)
# 227
던전 견문록
제 228 화
82. 가면
“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잘 타일러서 데리고 가도록 할게요. 네, 네. 어머니, 출발할 때 전화 드릴게요.”
갈수록 가관이었다. 안젤라의 음성이 어찌나 살가운지, 듣고 있던 김진우의 온몸에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다.
“네, 쉬세요. 어머니.”
웃음기 섞인 인사로 통화를 마무리 지은 그녀가 그와 눈이 마주치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지금 뭐하는 거지?”
“뭐긴요. 얼마나 무신경한지 몇 달째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아들, 내내 걱정하시는 어머님 걱정 덜어드리는 거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말을 받는 그녀의 태도가 자연스러워도 너무 자연스러웠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꽤나 붙임성이 좋은 게, 딱 며느릿감이라 말했을지도 모를 모습이다.
“아니, 그걸 왜 네가…….”
하지만 김진우의 입장에서는 기가 찬 상황일 뿐이다. 거리를 두고 가족을 보호하라 보냈더니, 이제는 아예 안방을 꿰차고 며느리 행세를 할 기세다. 아니, 실제로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
“착하고 싹싹한 아이야. 타지에서 고생이 많을 텐데, 구김살도 없고 얼마나 이쁜지 몰라. 그러니 행여 딴 생각 말고 잘해주려무나.”
난생 처음으로 못미더운 음성으로 말하던 어머니를 떠올리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남녀 관계야 두 사람이 알아서 하는 거라 말 안 하려고 했다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그 호칭 좀…….”
“호칭요?”
“주인님이란 호칭이 평범한 건 아니지 않니.”
이쯤 되면 대놓고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편할 지경이었다.
“의지할 곳 없는 지상에서 이런 낙이라도 없으면 어떻게 버티라고요.”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자신을 지상에 방치한 김진우를 원망하는 기색이었다.
하기야 따지고 보면 은밀하게 가족을 보호하느니, 차라리 저렇게 대놓고 곁에 붙어 있는 것이 임무에는 유리했으니, 마냥 그녀를 탓할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말마따나 주인을 통해야만 세상과 온전히 소통할 수 있는 흡혈귀를 혼자 그토록 오래 두었던 건 조금 지나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더는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다.
“휴우, 일단 알았으니 이 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뒷일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지금으로써는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김진우는 얄미울 정도로 생글거리는 안젤라를 빤히 바라보다 말머리를 돌렸다.
“안젤라, 지저에 변화가 있었다.”
그는 그간 지저에서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간추려 전부 설명해 주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게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안젤라의 얼굴은 나중에 가서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덕분에 지금 지저는 혼란, 그 자체다. 심층과 저층이 맞닿고, 상층부도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변해버렸지.”
어딘가의 이름 모를 공작과 대치중인 9층의 상황마저 이야기 해주자 그녀의 얼굴이 더욱 심각하게 변해버렸다.
“그럼 지금 미궁이 위험한 상황인가요?”
“아니, 여유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미궁이 있는 이상 하루아침에 미궁이 함락당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야.”
공작급의 미궁이 하나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 자신의 힘이 통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이로드의 힘은 결코 싸구려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9층에 생성된 미궁은 하나가 아니었다. 동으로, 서로, 북으로, 다시 남으로. 사방이 적이었다.
발리셔스와 다이달로스의 연구가 성공적으로 끝난다고 해도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황. 그는 모든 것을 확실히 하고자 했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변수가 결코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런 재미난 놈이 걸려들었지.”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수는 중국 측의 던전 베이비들이었다. 하나도 아닌 무려 스물에 달하는 지저의 귀족이 중국의 탐색자 무리 속에 숨어 있었으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아야 했다.
“꼴은 이래도 지저의 자작이다. 비록 지금은 내가 인장을 회수한지라 반편이가 되었지만.”
김진우는 발치에 늘어져 있는 사내를 툭, 하고 그녀 쪽으로 밀어 보였다.
“과연, 근원이 꽤나 튼실한 놈이네요. 주인님을 제외하면 제가 봤던 지상인 중에서 가장 강해요.”
지상인이라면 제 주인을 제외하고는 발톱에 낀 때만큼도 못하게 여기던 안젤라가 드물게 감탄하는 기색을 해보였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자작의 위가 아니더라도 심층에서 태어난 놈이니까.”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김진우였지만, 사내는 그렇게 하찮은 존재가 아니었다.
태어난 층의 한계가 있다지만 대한민국의 던전 베이비들은 하나같이 일당백의 용사였다. 그런 이들 중에서도 협회가 지휘관으로 파견할 정도의 강자를 제압하고 수많은 탐색자 무리를 기세로 압도하던 이다.
만약 그 자리에 자신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직까지도 위세를 부리고 있을 자였다.
“제가 뭘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시죠?”
“뻔하지 않은가.”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그가 안젤라를 부른 이유는 하나였다.
“흡혈귀의 권능이 필요하다.”
“저는 진혈을 물려받지 못했어요. 제 능력이 통할지는 장담할 수 없어요.”
애초에 진혈을 물려받은 흡혈귀들은 지저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말에 그다지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네가 능력을 사용할 사람은 이자가 아니다.”
***
김진우는 협회에서 파견된 통역사를 통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사내가 류즈펑이란 이름을 가진 심층의 던전 베이비이며, 중국의 대한민국 지저 공작조의 총책임자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그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심층의 던전 베이비들이 지저 귀족의 위를 받아들였으며, 개중에는 공작급에 오른 이 역시 있다는 것도.
“자신이 끌려온 것을 알면, 뤼양이 가만있지 않을 거랍니다.”
통역사의 말끝이 떨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한 지상인에게는 지금의 광경이 지나치게 공포스러웠던 탓이다.
피칠갑을 한 채 바닥을 버르적거리며 말할 때마다 피를 쏟아내는 류즈펑이란 사내의 몰골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그는 자꾸만 눈을 돌렸다.
하지만 이들 중에 한낱 통역사를 신경 쓰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 뤼양이란 놈이 공작 자리를 꿰찬 놈인 모양이군.”
“1, 13층에서 태어난 던전 베이비이며 공작급 미궁을 다스리는 진짜 강자.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초인이니 지금에라도 자신을 풀어준다면 이제까지의 일은 없던 일로 해주겠답니다. 귀족의 인장을 아는 자라면 응당 그렇게 해야 한다고…….”
통역사는 이제 아예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공작이니 자작이니 오고 가는 단어가 위험스럽기만 한 것이, 눈앞에서 간첩의 회동이라도 목격한 듯한 얼굴이었다.
“뤼양이 그렇게 대단한 놈인지, 직접 보기 전엔 믿을 수 없군.”
김진우는 짐짓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그게 억지로 만들어낸 표정이라는 것 정도는 세 살 먹은 아이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얄팍하기만 했다. 하지만 두들겨 맞아 불어터진 류즈펑의 눈은 이미 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했다.
류즈펑은 자신의 위협이 통한 것이라 생각했는지, 기고만장해서 떠들어댔다.
“겨우 자작에 불과한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이니, 그의 군대가 지나간 곳에 남는 것은 폐허뿐이랍니다.”
“대단하군. 하긴 공작급의 미궁을 다스리는 자라면 그 정도는 되겠지.”
자신의 말을 통역사가 류즈펑에게 전해주는 동안 김진우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혹시 그자의 군대가 독수리 머리에, 사람, 그리고 염소의 몸을 지닌 괴물인가?”
“당신이 사티로스를 어디서 보았냐고 묻고 있습니다.”
통역사의 말에 그가 눈을 빛냈다. 2층과 맞닿은 곳이 중국의 지저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찔러보았더니, 정말로 9층에 나타난 공작급 미궁의 주인이 바로 뤼양이었다.
엉겁결에 사티로스라는 이름까지 듣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운이 상당히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좋아, 대략적인 건 알겠군. 지금부터는 굳이 통역하지 않아도 돼.”
“네? 네.”
눈을 동그랗게 뜬 통역사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류즈펑과 김진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류즈펑이 뭔가를 요구하는 듯한 눈치였다.
하지만 한쪽은 멀쩡했고, 한쪽은 처참한 몰골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으니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는 이미 판가름이 나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컥!”
역시나 기세등등해서 떠들어대던 류즈펑이 김진우의 주먹질 한방에 꽥, 하는 비명을 끝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더, 더 이상 일이 없으시다면, 이제 그만 돌아가 봐도 되겠습니까?”
기대보다는 절망에 찬 음성. 하지만 의외로 그는 선선히 통역사를 보내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오늘 여기서 보고 들은 건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지레 겁을 먹은 통역사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마음대로 해. 인터넷에 올리든 동네방네 소문을 내든. 할 수 있다면 말이야.”
“네? 히이익!”
그 말이 마치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말처럼 들린 것일까. 통역사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안젤라가 빨랐다.
“나를 봐요.”
발작을 일으키려던 통역사가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턱 끝까지 차올랐던 비명이 꿀떡 넘어가고, 슬며시 벌어진 입에서는 비명 대신 침이 흘러나왔다.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가 마치 혼백이라도 나간 듯 초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당신, 너무 피곤해 보여요. 아무래도 당장 사우나라도 가서 쉬어야겠어요.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모든 피로가 풀릴 거예요.”
안젤라의 말에 통역사가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흡혈귀의 최면 능력에 완전히 넘어간 통역사는 ‘왜 이렇게 피곤하지? 몸이라도 뜨겁게 지져야 좀 살겠어’ 라는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리며 안가를 빠져나갔다.
아마도 사우나를 끝마칠 때쯤 오늘 있었던 일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져 있을 것이다.
“저자는 어떻게 하죠? 돌려보낼 수도 없고, 제 능력도 통하지 않고.”
안젤라의 말에 김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들을 수 있는 정보는 다 들었으니, 정리를 해야겠지.”
“죽이실 건가요?”
안젤라가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그녀는 류즈펑의 생명력이 몹시 탐이 나는 눈치였다.
하기야 흡혈이야말로 가장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심층의 던전 베이비씩이나 되는 포로의 피가 탐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니, 일단은 살려둔다.”
“자작이라면 자신의 미궁도 있을 텐데, 그러다 포탈이라도 열어서 도망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지금에야 제 미궁의 오너룸을 보여주기 싫어 저리 험한 꼴을 자처하고 있다지만, 상황이 악화되면 죽기 살기로 포탈을 열지도 몰랐다.
“포탈을 열 수 있다면, 도망치겠지.”
“네?”
안젤라가 순간적으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한 얼굴을 해보이는데, 김진우의 존재감이 갑작스레 달라졌다.
“내 허락이 있기 전에는 너는 지저로 돌아갈 수 없다.
하이로드의 권능, 언령이 언어를 초월해 의지가 되어 류즈펑의 머릿속에 박혀들었다.
***
“그런 권능이 있으시면서 왜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으시고.”
“상대의 머릿속에 명령을 내리는 건 의지의 영역이지만, 정보를 얻는 건 일단 말이 통해야 하니까.”
안젤라의 말에 김진우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보다 주인님, 엄청 강해지셨네요.”
처음으로 진짜 군주의 기세를 마주한 안젤라는 어지간히 흥분했는지, 아직까지도 홍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덕분에 저도 목표가 생겼어요.
“목표?”
평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그녀가 드물게 속내를 내비쳤다는 사실에 그가 진지한 표정을 해보였다.
“진혈을 갖고 싶어요.”
스스로 입버릇처럼 진혈이 이어지지 않은 흡혈귀라 했던 그녀가 지금 더없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주인님의 피라면 저를 가짜가 아닌 진짜로 만들어 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