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28)
던전 견문록-228화(228/319)
# 228
던전 견문록
제 229 화
축 늘어진 어깨, 피로가 가득한 얼굴, 내뱉는 숨결마저도 피로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돌겠군.”
결국 참았던 푸념이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차라리 지저에서 공작들이랑 치고받는 게 속 편하겠어.”
드물게 약한 소리를 하는 그를 보며 안젤라가 싱그럽게 웃었다.
“네가 그런 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후, 됐다.”
그 밉살맞은 얼굴에 그가 울컥해 인상을 썼다가, 이내 한숨으로 말을 끝맺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은 여전히 따뜻하고, 살가웠다. 지저의 골치 아픈 문제 따위는 금세 저 멀리 사라질 정도로 그들의 품은 따뜻했다.
안젤라와의 일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는 가족의 온기에 웃고 떠들고 몹시도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미치겠군, 진짜.”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가족이 남긴 온기보다 난감함이 더욱 컸다. 가족들은 안젤라를 완전히 며느리 대하듯 하며 그를 한시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않았다.
“너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니, 슬슬 가정을 꾸려야 하지 않겠니?”
“착한 아이다. 놓치고 후회하지 말아라. 이제 엄마, 아빠도 손주 재롱이나 보고 살고 싶구나.”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얼굴로 자신을 압박하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하니 태평스럽게 웃고 있는 안젤라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뭐, 어때요. 이참에 효자 노릇 좀 하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 같은데요.”
대체 지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안젤라는 아예 지상인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즐겨 보던 드라마의 영향인지 아니면 그것이 그녀의 본래 모습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보다 더 대하기 힘들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작작 해, 안젤라.”
겨우 내뱉은 말이 스스로 듣기에도 화내는 것도 푸념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것이다.
“주인님은 궁금하지 않으세요?”
싱글싱글 웃어대던 안젤라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해보였다.
“주인님의 일부를 물려받을 아이가 대체 얼마나 대단할지.”
도미니크 역시 후손을 볼 것을 권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김진우는 그때 느꼈던 거북스러움을 지금 다시 한 번 느끼고 있었다.
지저의 존재들이 말하는 후계란 지상의 살뜰한 것과는 달리 꽤나 냉정한 구석이 있었으니, 마치 체스 판에 쓸모 있는 말 하나를 더 얹어놓는 듯한 뉘앙스였다. 그로서는 공감할 수 없는 생각이기도 했다.
“나는 나의 아이까지 지긋지긋한 지저에 묶이기를 바라지 않아.”
그것이 솔직한 그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주인님은 지저의 존재인걸요.”
하지만 그녀는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지독스럽게 차가운 현실이 그녀의 붉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주인님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아이를 갖지 않겠어.”
만약 벗어날 방법이 없다면 차라리 자신의 대에서 모든 것을 끝내고 말겠다. 반박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단호한 음성. 하지만 안젤라는 그저 웃어 보였을 뿐이다.
마치 그 웃음이 절대로 자신이 뜻을 이루지 못할 거라 비웃는 듯해 기분이 나빠졌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물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
「네, 그 건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2층에 생성된 게이트 문제는 박성진이 전력을 더 보강하여 입구를 틀어막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호시탐탐 대한민국의 지저를 노리는 중국의 탐색자들도 크게 당한 것이 있으니, 당분간은 몸을 사릴 것이다.
만약 그들이 몸을 사리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류즈펑이 실토한 정보에 의하면 이번 일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은 공작급 미궁의 지배자 뤼양. 대미궁과 맞닿은 미궁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뤼양을 흔들어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변해 버린 지형 탓에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겨우 발견해낸 개미귀신은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가뜩이나 거대했던 몸이 커다랗게 변해 버린 통로만큼이나 더욱 비대해져 있었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사냥감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괴수는 온전히 제 몸을 드러낸 상태였다.
푸석푸석한 외피, 두툼한 몸통, 그리고 그 몸통만큼이나 거대한 아가리를 가득 메운 톱니 같은 이빨, 실로 흉물스럽기만 한 모습이었다.
“끔찍하군.”
개미귀신의 실체를 본 김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괴하고 흉악한 괴수들로 가득한 지저에서도 보기 드물게 흉측한 모습에 비위가 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개미귀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개미귀신이 지금 하려는 짓은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무지막지한 행위였고, 다시 볼 수 없는 구경거리이기도 했던 탓이다.
[수많은 존재를 먹어치운 이 지저의 괴수가 지금 운 없는 미궁 하나를 더 희생자의 목록에 추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개미귀신은 지금 미궁 하나를 통째로 먹어 치우려고 하고 있습니다.]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그가 도착했을 때 개미귀신은 막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식사라는 것이 크리쳐도 아닌 미궁 자체였다.
진즉부터 괴수의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있던 김진우도 놀랄 만한 광경이었다.
개미귀신은 그가 놀라거나 말거나, 일말의 관심조차도 두지 않은 채, 하던 일에 몰두했다.
콰직.
통로가 박살 나고 어설프게 세워져 있던 미궁의 입구가 괴수의 주둥이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아그작, 아그작.
괴수는 마치 비스켓을 갉아먹듯 이름 모를 미궁의 외곽부부터 야금야금 씹어 넘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입구가, 그 다음에는 통로가, 그 이후에는 조잡하지만 나름대로 공들여 만들었을 게 분명한 창고와 각종 시설들이 개미귀신의 주둥이 속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미궁의 핵이 드러나고, 개미귀신은 그 어느 때보다 게걸스럽게 주둥이를 우적거렸다.
“끄악!”
어떻게든 괴수를 막아보려던 이름 모를 미궁의 주인이 비명과 함께 거대한 주둥이 속으로 빨려들어 가 짓이겨지고 마침내 미궁 하나가 통째로 개미귀신에게 집어삼켜졌다.
“끄윽.”
그리고 트림이라도 하듯 악취 풍기는 숨결을 내뱉었다.
“이런.”
식사를 마친 개미귀신이 다시 땅속으로 파고 들기 직전, 김진우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뒤늦게 목적을 떠올리고는 괴수의 앞으로 나섰다.
이제 막 식사를 마친 개미귀신은 배가 부른지, 그를 보고도 한동안 멀뚱멀뚱 바라만 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그 탐욕스러운 식성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닌지 이내 그 흉악한 주둥이를 벌리고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김진우는 온몸으로 하이로드의 존재감을 뿜어대며 작게 속삭였다.
“멈춰.”
언제나처럼 그의 기세가 한껏 실린 음성은 이내 의지가 되었고, 다시 거역할 수 없는 명령, 언령이 되었다.
[개미귀신이 언령에 저항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개미귀신은 그 무지막지한 육신에 비해 지능이 낮고 의지가 심약한 생물입니다. 그저 본능에 따라 사냥감을 쫓고 먹어 치울 뿐인 괴수는 당신의 언령에 저항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개미귀신을 멈춰 세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개미귀신이 일시적으로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눈으로 쫓으며 그가 다시 한 번 속삭였다.
“내 부하가 되어라.”
[개미귀신은 사회성이 몹시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저 먹을 수 있느냐, 먹을 수 없느냐로 모든 것을 구분하던 머리 나쁜 괴수에게 부하라는 말은 너무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막연하게 당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일에 개미귀신이 몹시 혼란스러워 합니다.] [서둘러 제압하지 않으면 혼란에 빠진 괴수가 날뛸지도 모릅니다.]의외로 쉽게 걸려든다 했더니, 개미귀신의 모자란 지능과 사회성이 발목을 붙잡았다.
다시 고개를 뻣뻣이 들며 난동 피울 기미를 보이는 괴수를 보며 김진우가 발을 내딛었다.
“날 따르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해주마.”
[오직 식탐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개미귀신에게 당신이 건넨 말은 더없이 효과적인 말이었습니다.] [개미귀신이 몹시 솔깃해 합니다.]역시나 멍청한 괴물답게 단순한 명령이 더 효과적이었다.
“방금 먹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곳을 알려주마.”
[개미귀신이 이제 당신의 말에 완전히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츄릅.
개미귀신이 걸쭉한 침을 흘리며 바짝 얼굴을 들이댔다. 마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그의 말을 듣고 싶은 듯한 모습이었다.
***
크아아아아.
개미귀신이 날뛰어대는 모습을 본 김진우는 기진맥진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 나쁜 괴수를 이끄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개미귀신은 정말로 머리가 나빴다.
말을 잘 듣는다 싶으면 곧잘 자신의 명령을 잊었고, 금세 처음 마주한 것처럼 식탐을 드러내며 달려들려 했다.
그때마다 그는 언령의 힘을 빌어 다시 괴수를 꼬드겨야 했으니, 10층에서 9층까지 오는 길이 절대로 쉬웠을 리가 없었다.
어지간한 그마저도 언령을 남발한 부작용으로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고, 몇 번이나 포기할까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험난한 여정이 전부 보답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끄아아아악!”
염소와 인간의 몸, 그리고 독수리의 머리를 한 괴물, 사티로스들이 개미귀신의 난동에 휘말려 짓이겨지고 갈기갈기 찢겨져 커다란 목구멍 속으로 넘어갔다.
와작, 와작.
열다섯에 달하는 사티로스들이 괴수의 한 끼 식사 거리가 되었고, 김진우는 손뼉을 치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것으로 당분간 뤼양은 정신이 없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공작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는 한, 저 먹성 좋은 괴물은 계속해서 날뛰어댈 테고,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사티로스들은 꽤나 큰 피해를 받게 되리라.
“아.”
생각에 잠겨 있던 김진우가 악취 나는 숨결이 부쩍 가까워진 느낌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개미귀신이 당신을 보며 입맛을 다십니다.] [방금 막 식사를 마쳤지만, 오랜 이동으로 허기진 개미귀신의 배를 채우기에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개미귀신이 당신을 먹이로 인식했습니다.]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는 불쑥 다가오는 괴수의 머리통을 피해 몸을 날려야 했다.
“이 망할 놈!”
괴수는 머리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
개미귀신은 다시 언령에 제압되었다. 그래 봐야 오래 가지 않을 게 뻔했지만, 이미 뤼양의 미궁이 지척인지라 김진우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부터 개미귀신을 상대해야 하는 건 자신이 아닌 뤼양과 사티로스들일 테니까.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빼내 대미궁으로 향했다.
대미궁에 도착한 그는 아직 끝나지 않은 발리셔스와 다이달로스의 연구를 뒤로하고 곧장 안젤라를 찾았다.
“의식은 모두 준비되었어요.”
안젤라가 빨갛게 상기된 볼을 하고 그를 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