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29)
던전 견문록-229화(229/319)
# 229
던전 견문록
제 230 화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반겨주는 안젤라의 안색은 초췌하다 못해 마치 큰 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조금 흉하죠? 의식을 준비하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어요.”
피로가 짙게 밴 얼굴로 제 뺨에 손을 얹는 그녀를 바라보다 김진우가 이유를 물었다.
“진혈을 채우기 전, 몸속의 탁한 피를 비워내야 했거든요.”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제 몸의 피를 전부 뽑아내고 싶었지만, 생명의 근원까지는 건드릴 수가 없었노라며, 도리어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할 정도로 진혈의 가치가 큰 것일까. 김진우는 병색이 완연하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안젤라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주인님이 장님이라면, 눈을 뜨기 위해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으시겠어요?”
그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나마 그녀의 절실함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제게 있어 진혈이란 그런 거예요. 가짜가 진짜가 되는 것. 더는 다른 이의 생명에 기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자신의 의지와 눈으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 그게 진혈과 진혈을 물려받지 못한 흡혈귀의 차이랍니다.”
그녀는 전에 없이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
시간이 흐를수록 낯빛이 시체의 그것처럼 변해가는 안젤라를 보며 그가 의식을 서두르자 말했다.
“언제나와 똑같아요. 주인님은 제게 피를 제공해 주시면 돼요.”
푸르게 변색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성이 점차 미약해졌다.
“대신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피가 필요할 뿐이랍니다.”
그녀는 이제 스스로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그에게 매달려 있었다. 팔뚝을 통해 느껴지는 그 공허한 무게감에 김진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알았으니 대화는 이제 그만하도록 하지.”
그는 그녀를 곁에 마련되어 있던 작은 침대 위에 눕혀주었다.
“하나만, 하나만 더요.”
이제는 거의 눈을 감다시피 한 그녀가 품속을 더듬어 날카로운 단도 하나를 꺼내 보였다.
“어쩌면 제가 자제력을 잃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망설이지 말고…….”
그녀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그 의미를 알아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닌 것 같군.”
실패하면 그녀는 하루하루 피를 탐해야 살 수 있는 괴물이 된다. 이성은 흡혈의 본능에 잠식되고 육신은 무너져 내려 추악하게 변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망설이지 않았다.
“음.”
손목에 느껴지는 따끔한 느낌. 김진우는 눈에 힘을 주고 안젤라를 바라보았다.
의식은 생각보다 길고 지루했다.
안젤라는 지독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피를 섭취했다. 평소 주인의 피라면 환장하던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덕분에 의식이 시작되고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가 마신 피의 양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그는 현기증은커녕, 그 어떤 고통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장시간 한 자세를 유지한 팔뚝이 조금 시큰거렸을 뿐이었다.
김진우는 안젤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창백했으며, 안색도 좋지 않았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묘한 소음과 목울대를 쥐어짜는 듯한 소리가 아니었다면,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내부에서부터 엄청난 변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파스스슥.
꿀을 바른 듯 결 좋은 금발 머리가 가닥가닥 끊어지고 갈라지다 이내 흩날리기 시작했다. 창백하지만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 역시 바싹 말라 마치 가뭄에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고, 그녀는 천천히 세월에 부식되기 시작했다.
“윽.”
가만히 그녀를 살펴보고 있던 김진우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손목을 통째로 들이마실 것처럼 힘주어 피를 빨아대는 안젤라. 상처를 통해 빠져나가는 피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변화가 가속되었다.
머리가 빠진다. 다시 돋아난다.
피부가 갈라진다. 주름이 진다. 다시 탱탱한 새살이 돋아난다.
이제껏 더디게 흘러가던 시간이 마치 영상을 빨리 감듯 순식간에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 돌았다. 많은 양의 피가 한꺼번에 빠져나가자 급속도로 몸이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를 들이마시는 안젤라의 입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쩌면 제가 자제력을 잃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망설이지 말고…….”
의식이 시작되기 직전, 그녀가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바로 곁에 놓여진 단검의 날카로운 빛이 눈 가득 들어왔다.
아니, 아직은 아니다. 조금은 더 버틸 수 있어.
김진우는 다시 또 노인처럼 변해버린 안젤라를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고비는 금세 다시 찾아왔다. 멈출 줄 모르는 그녀의 흡혈이 이제 위험 수위에 이른 것이다.
그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벌써 수십 번이나 젊음과 늙음을 오갔고, 그는 짙은 피로를 느꼈다. 이제는 정말 결정해야 할 때였다.
의식을 치르기 전, 그녀는 말했다. 어쩌면 자신이 과욕을 부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만약 의식이 실패하면 자신은 피를 탐하는 추악한 괴물이 될 거라고 말했다.
그 끔찍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의식을 간절히 원했다.
진혈을 얻고 완전한 종이 되기를 바라는 염원, 주인의 곁에 당당하게 서고 싶다는 마음. 둘 중 어느 쪽이 더 큰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나를 이용하려는 것일지도 모르지.
진혈이 된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을 수 있는, 온전한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것. 새로 태어난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제멋대로인 그녀로 인해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몸이 무거워질수록 고민은 깊어졌고, 단검의 예기가 유난스레 눈을 찔러왔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단검을 집어 들지 않았다.
김진우는 안젤라를 조금 더 믿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안젤라.”
잠깐 사이에 깊게 잠긴 음성으로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피값은 꼭 받아내겠다.”
정신없이 피를 탐하는 그녀가 들을 리 없건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니 반드시 진혈을 얻어라. 그리고 나를 섬겨라.”
나직한 속삭임, 그에 대답이라도 하듯 허공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흡혈귀 안젤라가, 진혈의 흡혈귀로 변이를 시작합니다.]***
김진우가 안젤라의 의식을 돕고 있던 그 시각, 지저에는 난리가 났다. 무지막지한 괴수가 닥치는 대로 주변의 생명체를 사냥했던 탓이다.
처음에는 소규모 부대 몇이 희생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를 이상하게 여긴 인근의 정찰대가 근방을 탐색하며 참사가 벌어졌다.
끄어억.
개미귀신은 한껏 차오른 포만감에 기분 좋게 트름했다. 몸속의 공기가 빠져나가니 차올랐던 배가 다시 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움푹 꺼진 배를 다시 채울 만한 먹잇감은 충분했다.
“키약!”
날카로운 포효가 이내 비명이 되고, 먹잇감 하나가 뱃속으로 삼켜졌다. 그렇게 개미귀신은 닥치는 대로 주변의 모든 것들을 먹어 치웠다.
괴수를 향해 사납게 달려들던 사티로스들이 어느 순간이 되자,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투쟁심과 폭급한 성정이 괴수의 강인함에 억눌린 것이다.
개미귀신은 서두르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굶어도 꺼지지 않을 만큼 충분한 식사를 마쳤고, 원하면 언제든 사냥할 수 있는 사냥감들이 근처에 널려 있었다. 그래서 개미귀신은 물러서는 사티로스들을 잡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괴수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개미귀신은 평생을 허기에 시달려 왔다. 그래서 유일한 지상 명제가 배를 채우는 것이었으며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랬던 개미귀신이 근래 들어 호사 아닌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배를 채워도, 채워도 먹이는 충분했고, 기다리면 제 발로 걸어 아가리 속으로 기어들어 왔다.
덕분에 포만감에 익숙해졌고, 더 이상 허기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허기가 해결되자 개미귀신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각이란 것을 하게 되었다.
기왕이면 맛이 좋은 식사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리고 개미귀신은 무엇이 맛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먹어보았던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 미궁의 핵이야말로 개미귀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진하게 풍겨오는 맛 좋은 음식의 냄새에, 게으른 개미귀신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티로스들이 왔던 방향, 그들의 성이 있는 쪽을 향해서였다.
***
나른한 눈초리로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한동안 바라보던 김진우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안젤라의 생명을 내건 도박이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안젤라가 흡혈귀에서 진혈의 흡혈귀가 되었습니다.] [진혈의 흡혈귀는 일반 흡혈귀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입니다. 생명의 근원에 기생하는 피의 계약을 통해서만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평범한 흡혈귀와는 다르게 진혈의 흡혈귀는 그 자체로 오롯한 하나의 종입니다. [안젤라가 흡혈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육신의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고유 권능을 얻었습니다.] [이제 갓 깨어난 진혈의 흡혈귀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사용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성장만 해도 어지간한 심층의 귀족들은 눈 아래로 볼 수 있는 대단한 것입니다.] [안젤라가 완전한 진혈의 흡혈귀가 되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겉으로 변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저 전보다 더욱 어려지고 아름다워졌을 뿐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안젤라는 아예 다른 존재가 된 듯했다.
아름답지만 어딘지 모르게 께름칙했던 그녀의 존재감은 막 피어난 꽃처럼 화사했고, 홍조가 어린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마치 도자기 인형이 생명을 얻은 듯한 광경이었다.
[멸족되었던 진혈의 일족이 다시 지저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새로운 일족이 탄생한 것만큼이나 축복받을 일입니다.] [온 층에 진혈 일족의 귀환 소식이 알려집니다. 흩어졌던 흡혈귀의 일족이 그녀의 소식을 듣고 다시 집결할 것입니다.] [그들을 모두 발아래 두고 나서야 안젤라는 진정한 어둠의 여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녀가 피조물을 생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권속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과연 진혈의 흡혈귀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실감할 수는 없었지만, 의식에 성공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기쁜 일이었다.
[과거 하이로드들이 지저를 다스리던 시절, 흡혈귀는 옛 군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였습니다. 어둠을 다스리는 진혈의 능력은 강대한 군주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진혈을 따르는 수많은 권속들과 피조물은 하이로드들의 군대만큼이나 막강했습니다.] [하이로드들은 이 강대한 어둠의 지배자를 마침내 군주로 인정하고 지저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끔찍한 적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악몽같았던 황혼의 시간 속에서 진혈의 일족은 후손조차 남기지 못하고 멸족했으니, 군주의 계승권이 소실되고 말았습니다.]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또 다른 하이로드의 정보를 얻은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잠이 든 안젤라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흡혈귀들은 타인의 생명에 기생해야 하는 저주를 타고 난 존재들입니다. 다른 하이로드들의 권능이 파편이 되어 흩어진 것과는 다르게 진혈의 권능은 피의 저주에 묶여 그 어느 곳에서도 자리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진혈의 일족이 태어났다는 것은 정처 없이 지저를 떠돌던 진혈의 권능이 마침내 그릇을 찾았다는 것과 다름없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그 순간, 의식에 지쳐 잠이 들었다 생각했던 안젤라가 눈을 떴다. 그런데 그렇게 눈을 뜬 그녀의 눈빛이 생소했다.
마치 오랜 세월을 군림해 왔던 절대자의 그것처럼 권태로움이 가득한 눈동자가 그를 마주 보았다.
[파편이 되어 희미해진 다른 하이로드의 권능과는 다르게, 이제껏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진혈의 권능은 그 막강한 권능 뿐 아니라 사라졌던 사념마저 담겨 있었습니다.] [안젤라가 옛 군주의 화신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