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30)
던전 견문록-230화(230/319)
# 230
던전 견문록
제 231 화
83. 고대의 약속
“아아.”
도톰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음성은 침대 맡에서 속삭이는 연인의 그것처럼 고혹적이었고,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은 떼 묻지 않은 백치미가 넘쳤다.
나른한 손짓조차도 조각가가 고심 끝에 내놓은 조각상의 끄덕임만큼이나 아름답기만 했다.
그녀는 마치 오래도록 방치되어 먼지가 잔뜩 내려앉은 인형처럼, 손대면 흔적도 없이 뭉개질 명화처럼,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있었다.
하지만 김진우는 그 치명적인 미태에 감탄하기보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옛 군주의 화신은 너무 오랫동안 지저를 헤맸습니다. 억겁의 시간과 지저의 끔찍한 악의는 군주들조차도 적으로 두기를 꺼려했던 그녀의 정신을 좀먹고 말았습니다.]눈앞에서 빨갛게 번뜩이는 메시지를 본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빼냈다. 아니, 빼내려 했다.
꽈악.
하지만 그녀가 놓아주지를 않았다.
그 가녀린 손아귀 어디에서 그런 무지막지한 힘이 솟은 것인지, 그녀는 그의 손목을 꽉 부여잡은 채 미동조차 없었다.
“흐응.”
또 다시 의미 없는 흥얼거림이 그녀의 잇새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녀의 탄성에는 분명 감탄의 기색이 있었다.
“안젤라.”
머릿속으로 떠오른 수없이 많은 가정,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결과를 떠올리면서도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힘주어 부른 안젤라의 이름에 온당한 주인의 권위와 하이로드 특유의 존재감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에게 닿은 것은 주인의 권위가 아닌 하이로드의 기운이었던 모양이다.
“안젤라?”
얼핏 듣기에는 순결한 소녀가 수줍게 말하는 것 같기도, 또 어떻게 들으면 요염한 여인이 침상에서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한 음성, 그는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진혈의 흡혈귀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매료시키는 치명적인 존재입니다. 그녀의 압도적인 매혹에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다행스럽게도 당신의 강인한 정신력과 의지력은 그 치명적인 유혹을 이겨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유혹에 저항하는 데 성공했습니다.]잠시지만 알 수 없는 열기에 들떴던 김진우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안젤라… 사랑스러운 이름이로다.”
유혹에 저항하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듣는 것만으로도 의식이 혼미해지고 마는 미성이었다. 그는 자꾸만 느슨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엄한 얼굴을 해보였다.
“기억이 나는구나. 예전에도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던 이들이 있었지.”
그저 압도적인 아름다움 외에는 특별할 것 없던 그녀의 존재감이 갑작스레 팽창했다. 그런데 그 기운이라는 게 전에 만났던 통곡의 군주, 캐서린 이상이었다.
“그대는 하이로드인가?”
절대자의 그것처럼 오만한 음성에 김진우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멍청한 질문이었구나. 그들 중 하나가 아니라면 나를 이리 내려다보지 못할 테지.”
오만을 넘어 광오하기까지 한 음성에 김진우가 쏘아붙이듯 대꾸했다.
“몸이나 좀 일으키고 얘기하시지?”
“육신을 움직이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라 마음처럼 쉽지 않구나. 그대에게 양해를 구하노라.”
세월과 악의에 좀먹었다던 정신은 생각보다 멀쩡해 보였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의 방만한 자세에 미안해하고 있었고, 또 충분한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가 안젤라의 육신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 그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그대가 사과해야 할 건 그게 아니다. 남의 몸을 차지하고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뻔뻔하지 않은가.”
“그렇구나. 그대의 적의는 육신의 주인을 걱정하는 데서 기인했구나.”
마치 이제야 알았다는 듯한 그 느긋한 음성에 차라리 그는 차라리 허탈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대는 걱정하지 말라. 나의 사념은 오래 머물 수 없노라. 내게 주어진 일을 마치고 나면 온데간데없을 것이노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지만, 그는 기뻐하기보다는 ‘주어진 일’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느꼈다.
“할 일이라는 게 뭐지?”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엉뚱한 말을 해보였다.
“그대의 기운이 익숙하다 했더니, 한 눈으로 바라본 반쪽 세상을 진리인 양 떠받들던 그자의 기운이었구나.”
아마도 외눈박이 군주, 보탄의 기운을 느끼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하구나. 그대가 품고 있는 기운은 그자, 하나의 것이 아니니.”
통곡의 군주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을, 진혈의 화신은 단숨에 알아챘다.
“스스로 지저의 태양이 되기를 원했던 미치광이.”
그녀는 그가 채 개화시키지 못한 광휘 군주의 기운도,
“심약한 요정들을 어둠 속으로 내몰았던 가혹한 어머니.”
온전히 잇지 못한 요정 군주의 기운도 모두 알아챘다.
“모두 그대의 속에 잠들어 있도다.”
진혈의 화신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도 만족할 줄 모르는 무저갱이 그대 안에 도사리고 있구나.”
‘무저갱’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김진우는 의식이 날아갈 것만 같은 아득함을 느꼈다.
마치 불꽃에 달군 양초처럼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 그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아아, 내가 어찌하여 그 끔찍할 정도로 긴 세월 동안 영혼이 흩어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었는지, 이제야 기억이 나노라.”
어떻게든 몸을 바로 세우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었지만 그저 흐느적거리는 몸짓에 불과했을 뿐, 그는 비틀거리다 이내 쓰러지듯 그녀의 위에 올라타고 말았다.
“눈 하나와 바꾼 예언, 빛으로 만든 약속, 십만 요정들의 머리카락으로 땋은 인연의 실. 모두 하나를 가리키고 있으니.”
숨결이 닿을 듯 맞닿아버린 얼굴, 진혈의 화신이 화사하게 웃었다.
“나 또한 그 약속의 증거가 되기를 기꺼이 자처하겠노라.”
가뜩이나 혼미한 정신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까지.
“나 가장 붉은 피로 증언하리니.”
“도대체 뭐라는 거야…….”
그는 사납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잇새로 새어나온 것은 술 취한 듯 혀 꼬부라진 음성뿐이었고, 이내 그마저도 턱 끝을 넘다 도로 삼켜지고 말았다.
“예언은 이루어질 것이다.”
마지막 순간 귀를 파고드는 화신의 음성을 들으며, 그는 기어코 의식을 잃고 말았다.
***
“주인님?”
다시 김진우가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보인 것은 염려를 가득 담은 안젤라의 얼굴이었다.
“안젤라?”
“주인님!”
그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와락 그의 품에 안겼다.
“아…….”
몽롱했던 의식이 돌아오며, 그는 자신이 침상에 양손을 짚고 겨우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와중에도 용케 쓰러지지 않고 버텼던 모양이다.
“그녀는?”
앞뒤 다 잘라낸 말이었지만 안젤라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는 다시 잠이 들었어요.”
다행스럽게도 안젤라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그의 의식이 반쯤 날아가 있었던 순간을, 빠짐없이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주인님이 모든 것을 이루었을 때, 다시 돌아오겠노라 말했어요.”
자신의 몸속에 또 다른 인격이, 그것도 언제든 자신의 몸을 빼앗을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음에도 그녀는 그다지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녀가 말하기를,
“진혈을 손에 얻었지만, 피의 계약은 여전해요. 주인님은 여전히 저의 주인님이고,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에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애초에 그녀가 진혈을 얻기를 원했던 가장 큰 이유가 타인에게 기생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온전한 스스로를 얻고 싶어서가 아니었던가.
“저는 애초에 스스로 서는 법을 모르는 걸요.”
이미 길들여진 것일까. 안젤라는 피의 계약에서 벗어나기를 요만큼도 원하지 않았노라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고도 겨우 성공한 의식인데, 더 욕심냈으면 의식도 실패했을 거예요.”
그녀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댔다.
“그러니까 안심하세요. 만약 다시 그녀가 깨어난다고 해도 제 몸에 깃들어 있는 한,”
안젤라는 마치 칭찬받기 위해 주인의 무릎 위에 올라탄 고양이처럼 가르릉대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결국 주인님을 거역하지 못할 거랍니다.”
***
진혈의 사념에게 지배받았던 순간의 기억을 잃지 않은 안젤라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신의 기억 너머를 엿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사념에 담긴 강렬한 의지 한 가닥이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약속의 증거라… 그 약속이 대체 뭐지?”
“모르겠어요. 다만 주인님이 그 약속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사실 밖에는…….”
대체 자신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까마득한 옛날 군주들이 나누었던 약속과 자신이 무슨 상관인지, 그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를 통해 그는 여태까지 자신이 느껴왔던 위화감이 그저 망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가의 왕이 된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행보, 그 뒤에 알게 모르게 존재했던 행운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도박판에서 명운을 내걸고 던진 주사위의 눈금이 사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높은 숫자가 나올 수밖에 없도록 조작된 것이었다면, 도박사는 속임수를 부린 자신의 행동에 자괴감에 빠져야 할까, 그도 아니면 승리의 대가에 환호해야 할까.
김진우는 그중 후자였다.
다만 멍청하게 승리의 과실만을 누릴 생각이 없다는 게 야비한 도박사와 그의 차이점이었다.
멍청하게 먹여주는 밥만 축냈다가는 결국 살 오른 돼지처럼 도축되고 말 거란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찬탈자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공교로운 타이밍, 그가 본질에 접근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일이 터지고 말았다.
“당장 모습을 드러내 놓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공작들을 먼저 움직여 지저를 정리할 모양입니다.”
미미르는 전에 없이 긴장된 얼굴로 상황을 알려왔다.
“저희도 이제 준비해야 합니다.”
“저희?”
“찬탈자의 살생부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은, 저뿐이 아니니까요.”
진혈의 화신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날을 기점으로, 멈추었던 약속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
개미귀신은 이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저 식욕뿐이었던 괴수는 마침내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끔찍한 재앙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재앙에 가장 먼저 날벼락을 맞은 것은 사티로스의 미궁이었다.
아그작, 아그작.
심층에서도 가장 강대한 부류에 속하는 공작의 군세가 속절없이 괴수에게 당하고 또 당했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사티로스들이 맛좋고 영양가 높은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개미귀신이 집어삼킨 사티로스들의 수만 해도 물경 수천에 이를 지경이었다.
상황이 그쯤 되자 오만한 공작도 이 끔찍한 괴수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공작은 오백에 달하는 전원이 영웅급으로 이루어진 군세를 이끌고 개미귀신을 공격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진 개미귀신은 사납게 저항하며 고집스럽게 식사를 계속했다. 하지만 심층의 공작은 이제 막 깨어난 괴수가 상대하기에 지나치게 강한 존재였다.
수천의 수하들을 잃은 공작의 분노는 개미귀신이 공들여 불려놓은 몸을 삼분지 일이나 내놓아야 할 정도로 끔찍했다.
끄어어어.
공작의 살의를 피해 괴수는 울부짖으며 지저를 내달렸다. 그 바람에 지진 이후 처참하게 망가졌던 9층 지저의 통로가 더욱 더 난장판이 되며 추적이 따라붙었지만, 괴수는 아무래도 좋았다.
개미귀신은 그저 자신에게 치명상을 가한 공작을 피해 달아나고 또 달아났다. 그 와중에 괴수를 이끈 것은 식욕뿐이던 시절의 막연한 기억이었다.
자신에게 수없이 많은 먹이감을 제공하고, 또 처음으로 소통을 시도했던,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 개미귀신은 김진우의 기운을 따라 대미궁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