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31)
던전 견문록-231화(231/319)
# 231
던전 견문록
제 232 화
찬탈자가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움직이기 시작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진우는 초조해 하지 않았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당장에 첫 숙청 대상으로 지목당한 미미르가 같은 처지에 있었고, 앞서 각성한 하이로드들이 있었다.
따로 밀약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하이로드들이 찬탈자와 공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 역시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당장 그들과 연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미미르는 따로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전면에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고, 통곡의 군주를 비롯한 하이로드들은 너무 멀리 있었다.
게다가 나름대로 밀약이 있었던 통곡의 군주는 누군가에게 아끼는 물건을 강탈당하고 정신이 없을 터였다. 지금으로서는 조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진우는 이런 날을 대비해서 한 가지 보험을 들어 두었다.
“조만간 지저가 시끄러워질 것이니, 그대는 중심을 똑바로 잡고 흔들리지 말라.”
용제, 아그립투스의 핏줄이 바로 자신의 손에 있었다.
“전력을 다해 그대의 미궁을 비호해 주겠다. 하지만 그조차 여의치 않다면 나는 생과 사를 갈라놓는 것으로 내 아들이 짊어진 의무를 벗겨내리라.”
비록 섬뜩한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가장 먼저 조력을 청해볼 수 있는 이는 아그립투스였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용제는 대미궁을 찾지 않았다. 그래서 김진우는 자신이 그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저에게 과오를 씻을 기회를 주십시오.”
다시 만난 오르테아가는 몇 번이고 자신의 명예를 바로세울 수 있게 해달라 간청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비겁자가 명예를 운운하는 것이 얼토당토않게 들렸지만,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지금은 비겁자라도 쓸 곳이 있었다.
“네 아비에게 나를 안내해 다오.”
뜬금없는 말에 오르테아가가 일순간 멍청한 얼굴을 해보였다.
“답지 않게 부성애 가득한 용제라면 분명 네게 끈 하나를 남겨두었겠지.”
오르테아가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리숙한 드라칸의 속내를 떠보는 것은 그에게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그걸로 지난 과오를 모두 없었던 일로 하도록 하지.”
“정말입니까!”
역시나 이 드라칸은 글러먹었다. 긍지 높은 용족의 후예라는 말이 우스울 정도로 본성이 경망스러웠다.
명예란 말 한마디로 되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거늘, 오르테아가는 그의 한마디에 노골적으로 기쁜 낯을 해보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저 죽고 죽이는, 살아남는 것만이 미덕인 세상을 살아온 그에게 명예란 한 푼 가치도 없는 허상에 불과했다.
“그러니 안내해.”
“뜻대로 할 테니, 약속은 지켜주십시오.”
비늘 위에 덮어놓은 재질불명의 흉갑에 불쑥 손을 집어넣은 드라칸이 낯익은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보였다.
“포탈 주문서로군.”
미미르를 통해 몇 번이나 보았던 주문서를 보며 김진우가 웃어보였다.
***
용제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주문서를 찢고 포탈을 넘기가 무섭게 색색의 드라칸들이 주변을 둘러싼다 싶더니, 금세 용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엉덩이가 무거운 양반이야. 난 그대가 먼저 나를 찾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알아듣지 못할 말이로다. 설명이 필요하다.”
예상과는 다른 용제의 방향에 김진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 그쪽, 뭐 저 아래서 연락받은 거 없어?”
“연락이라니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용제는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거 상황이 다소 어렵게 됐는데?”
당연히 찬탈자의 명을 받았을 거라 생각했던 아그립투스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자초지종을 물어오는 용제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니, 금세 심각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는 아무래도 나를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게 된 모양이다.”
그 말마따나 찬탈자가 둘 사이에 이루어진 모종의 밀약을 눈치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오르테아가가 나의 미궁에 있는 걸 아는 건, 믿을 수 있는 수하들뿐이다.”
“나 역시, 후계자가 될지도 모르는 일족의 흠을 떠들어대고 다닐 이유가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했더니, 용제 역시 보안을 철저히 지켰노라며 다소 꺼림칙한 얼굴을 해보였다.
“일이 꼬여버렸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찬탈자에게 배제당한 용제에게 기대할 수 있는 건 무력뿐이었다.
“어쩐지 너무 쉽게 나온다 했어.”
미미르마저도 구체적인 찬탈자의 계획을 알아내는 데 실패한 상황인지라, 마음이 더욱 무거워지고 말았다.
“어쩌면 찬탈자의 칼끝이 향한 건 나뿐만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찬탈자라고 했으니, 빌미를 준 이상 용제 역시 무사할 거란 보장은 없었다.
본신의 무력과 강대한 군세가 남다르긴 했지만, 한 손이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용제 역시 위기감을 느꼈는지 눈빛이 방금 전보다 몇 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대와의 연계를 공고히 해야겠구나.”
용제의 결단은 놀라우리만치 빠르고 단호했다.
“괜찮겠어? 그저 돕는 것과는 다를 텐데. 그대 역시 충성의 용언에 속박된 게 아닌가.”
스스로 말한 바를 지키지 못하면 끝내 저주받고 마는 드라칸의 특성을 짚어 물었더니, 용제는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내비쳤다.
“주인? 다 자란 드라칸은 오직 스스로를 섬길 뿐이다.”
아무래도 용제와 찬탈자의 관계는 주종 관계가 아닌 거래에 가까웠던 모양이다. 덕분에 믿을 만한 조력자를 얻게 된 김진우는 비록 정보는 얻을 수 없었지만, 용제라는 듬직한 우군을 얻을 수 있었다.
***
그리고 곧바로 김진우가 찾은 것은 통곡의 군주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미궁을 비운 채였으며, 그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결국 아무런 성과도 없이 미궁에 돌아온 김진우는 미미르에게 제공받은 무지막지한 다운 잼을 풀어 전력을 보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사티로스들을 상대하며 개개인의 무력이 모자람을 느낀 그에게는 아무리 수를 늘려봐야 부족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대안이 된 것은 안젤라였다.
진혈을 얻으며 일신상의 무력이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진 그녀는 이내 진혈의 향기에 이끌려 모여든 흡혈귀를 추려 군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사실 그전까지 대미궁에서 안젤라의 위치는 다소 애매한 면이 있었다.
그녀는 모리건을 비롯한 소환수들처럼 전장을 누비며 험한 일을 도맡아 하지도 않았고, 도미니크나 릭샤샤처럼 미궁의 대소사에 관여하여 운영을 보조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하릴없이 주인의 곁을 맴도는 흡혈귀. 그게 딱 안젤라에 대한 다른 이들의 인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위상은 진혈을 얻은 후로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뒷받침해준 것이 진혈의 풍문을 듣고 몰려든 흡혈귀들이었다.
수백에 달하는 흡혈귀는 새롭게 탄생한 진혈의 여왕에게 제 심장이라도 꺼내 보일 듯 아양을 떨었고, 발치에 엎드려 노예를 자처하기를 주저치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모리건을 비롯한 소환수들이 심한 우려를 표한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의 왕만을 떠받드는 이들 사이에 새로운 여왕을 추대하는 무리가 섞여 든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당장 주인이 누군지도 몰라보는 멍청한 놈들을 쓸어버리겠습니다.”
모리건의 격앙된 음성에도 김진우는 시큰둥하기만 했다.
가뜩이나 찬탈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그인지라 모리건의 장단에 맞춰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탓이다.
“그들은 요긴하게 쓸 일이 있다. 그러니 그대는 흡혈귀들이 뭘하든 신경 쓰지 말라.”
“하지만!”
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김진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로 내 허락 없이는 움직이지 말도록.”
티끌만큼이라도 왕의 존엄함을 해치는 것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위협을 제거하는 게 대미궁의 소환수들이었다.
그러니만큼 조금이라도 여지를 두어서는 안 됐다. 덕분에 그는 매번 소환수들이 찾아올 때마다 허투루 대하지 못하고 골머리를 썩어야 했다.
“킥, 다들 불만이 많은 모양이네요.”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안젤라는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듯, 내내 웃는 낯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들을 거두지 않는 것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을 테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저들을 수하로 거두시는 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김진우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안젤라는 기꺼이 자신의 권속을 넘겨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진혈의 흡혈귀는 자신을 따르는 권속이 많아질수록 더욱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흡혈귀들 역시 피의 계약에 묶였을 때보다는 진혈과 함께하는 편이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의심과 시기로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에는 그의 이성은 지나칠 정도로 차가웠다.
“도미니크와 릭샤샤에게 대하는 것만큼만 저들을 배려해도 이런 불만은 나오지 않을 거다.”
다만 불만이라면 안젤라가 일부러 모리건을 비롯한 과격한 소환수들의 원성을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도미니크와 릭샤샤는 그녀에게 주어진 행운에 그다지 염려를 표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오히려 새로운 전력이 생겼다는 사실에 기꺼운 눈치였으니, 진혈의 흡혈귀를 고깝게 보는 것은 전쟁광들뿐이었다.
그리고 안젤라는 그런 그들을 약 올리기라도 하듯 보란 듯이 흡혈귀들의 추종을 즐겼다.
도미니크와 릭샤샤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일부러 무시하는 건가? 저들과 그녀들을 달리 대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군.”
그의 질문 아닌 질문에 안젤라가 두말할 것도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주인님의 애정이 다르니까요.”
일고의 가치도 없는 대답, 김진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
안젤라를 추종하는 세력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대체 지저 어디에 저 많은 흡혈귀들이 있었는지, 차라리 놀라울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되는 대로 이종족들의 거처 근처에 자리를 잡고 흡혈귀들을 몰아두었던 안젤라는 나중에 가서는 대미궁의 외곽 중에서도 서쪽에 해당되는 공간을 통째로 차지하고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를 찾아온 흡혈귀의 수가 어느덧 일천을 넘었던 것이다.
“주인님과 함께할 시간이 줄어서 속상해요.”
새롭게 합류한 흡혈귀들을 권속으로 삼는 것만 해도 하루가 모자라다며 칭얼거리던 안젤라였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따금씩 푸념을 하면서도 권속을 늘리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권속이 늘어날 수록 강대해지는 진혈의 흡혈귀답게 그녀는 나날이 강해졌고, 며칠이 지나자 김진우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얻게 되었다.
실로 놀라울 정도의 성장 속도였다.
이쯤 되니 그녀를 어느 정도 믿고 방치하던 도미니크도 슬그머니 우려의 시선으로 흡혈귀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안젤라야 도미니크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따금씩 시간을 내어 제 주인을 만나는 것만으로 행복한 얼굴을 해보였을 뿐이지만.
“시일은 맞추지 못했지만, 결과물만큼은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그렇게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을 때, 김진우는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개미귀신이 마침내 대미궁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