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33)
던전 견문록-233화(233/319)
# 233
던전 견문록
제 234 화
[지저가 생긴 이래, 수많은 대미궁이 있어 왔지만, 독자적으로 핵을 성장시킨 경우는 없었습니다. 나가의 심장을 받아들인 대미궁이 어떻게 변모할지, 또 언제 성장이 끝날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어쩌면 내일 당장 성장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찬란한 섬광과 함께 떠오른 메시지가 전에 없이 불길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메시지는 마치 성장이 영영 끝이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이런…….”
혹시나 시간이 너무 걸리는 것은 아닌지 때늦은 후회를 해보아도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후였다. 지금은 그저 주사위의 눈금이 조금이라도 잘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응?”
눈앞의 메시지에 집중하고 있던 김진우는 위화감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나가들의 염원과 기대, 열망이 어우러져 한껏 달아올랐던 오너 룸의 공기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
주변을 둘러본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나가들의 모습이 온데간데없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던 것은 수백 개의 알이었다.
[나가의 심장과 운명을 함께하는 나가 일족 전체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들은 나가의 심장이 성장을 마치기 전까지 깨어날 수 없습니다.]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비록 종의 한계에 부딪쳐 성장을 멈추었다지만, 현재까지 대미궁의 주전력은 나가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이종족을 합친 것보다 많은 수가 존재했고, 또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핵의 성장과 동시에 그들이 깊은 잠에 빠져 버렸으니, 전력의 공백을 막을 길이 없었다.
맞닿은 심층의 공작들이 언제 대미궁을 침범할지 모르고, 거기에 더해 찬탈자까지 움직이기 시작한 상황. 그로서는 당장 내일을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들의 성장이 꼭 필요했으니, 그는 이를 악 물고 버텨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안젤라!”
“네, 주인님.”
“나가들의 빈자리를 그대의 권속들로 대신하겠다.”
안젤라가 눈가를 휘어 올리며 제 가슴을 두들겨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눈치 보느라 한곳에 웅크리고 있었던 흡혈귀들을 언제 쓸까 기다리고 있었노라며 지체하지 않고 흡혈귀들을 풀었다.
“모리건! 발리셔스를 찾아 복원된 모아이들을 인수받아라! 그들과 함께 미궁의 입구를 지켜라!”
“뜻대로 하겠나이다!”
전면전에 약한 흡혈귀들로는 나가들의 빈자리를 완전히 채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영웅급 소환수들과 보레아스를 비롯한 귀순 귀족들을 미궁의 요소요소에 배치했다.
“릭샤샤.”
“왕이시여.”
“도미니크가 돌아올 때까지 그녀의 모든 업무는 그대에게 맡기겠다. 진행하던 일들을 파악하여 지장이 없도록 하라.”
“명하신 대로 하겠나이다.”
릭샤샤마저 명령을 받고 어딘가로 사라지고, 오너 룸에 홀로 남은 김진우는 다시 한 번 알로 변해버린 나가들을 살펴보았다.
[나가의 알.] [다시 깨어나기까지 나가들을 지키기 위해 생겨난 이 거대한 알은 그 자체로 요람이고 성벽입니다. 나가들은 단단한 껍질 안에서 다시 깨어날 때까지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나가 일족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변모한 나가의 알은 거대한 생명력의 집합체입니다. 알을 노리는 이들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보기에는 그저 크기의 차이만 있을 뿐인 나가의 알들이었지만, 그중에서 유달리 눈에 들어오는 알이 있었다.
[도미니크가 잠든 나가의 알.] [나가의 미궁과 늘 함께해 왔던 도미니크는 사랑받는 시녀이자, 조언자입니다. 또한 그녀는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왕의 대리자이기도 합니다. 이제껏 주인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해 왔던 충성스러운 그녀는 꿈속에서조차 왕을 위해 봉사할지도 모릅니다.]김진우는 조용히 알을 어루만졌다.
늘 냉기가 돌던 나가 아가씨의 피부처럼, 그녀의 알 역시 차갑기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안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부디 좋은 꿈꾸기를.”
비록 그녀와 나가들의 공백을 메우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그는 그렇게 그들의 귀환을 빌어주었다.
***
나가 일족 전체가 잠에 빠져든 그 시각, 대미궁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나를 찾아온 손님이 있어?”
그러지 않아도 전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김진우는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껏 갑자기 미궁을 찾아온 손님 중 좋은 소식을 전해 온 이는 없었으니, 그는 대번에 날이 섰다.
“안내하라.”
“네.”
이런 일은 권속을 시켜도 될 법한데 안젤라의 엉덩이는 여전히 가벼웠다. 어쩌면 그녀는 도미니크와 나가들이 잠들어 있는 오너 룸에 자신의 권속을 들이기가 꺼려졌던 것이리라.
“대체 누가 날 찾아왔지?”
“정체는 밝히지 않았어요. 스스로의 소개는 주인님을 만나면 하겠다고 하던데요?”
“건방지군.”
“그럴 만한 자격은 있어 보였답니다.”
진혈에 오르며 삭풍의 보레아스조차도 눈 아래로 내려다보던 안젤라의 말 치고는 꽤나 의외였던지라 그는 더욱 더 발걸음을 서둘렀다.
“다만 품고 있는 기운이 그다지 좋지는 않아요. 지저의 존재가 아무리 음험하고 어둡다지만 그녀는 유독 심했어요.”
“그녀?”
“네, 손님은 여자니까요.”
안젤라의 설명을 듣는 사이에 미궁의 외곽에 도달한 그는 저 멀리서 모리건과 대치하고 있던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로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린 탓에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드러난 체형만 보아도 완숙한 여성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꽤나 장신에 속하는 모리건을 눈 아래로 볼 정도로 거대한 여인의 기운은 평범한 여인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과연 안젤라가 자격을 논할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무척 죄송하게 생각해요.”
어지간한 사내라면 듣는 것만으로도 뼈가 흐물흐물해질 것 같은 음성, 여인은 첫 대면이라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친근한 태도로 인사를 건네 왔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해 주세요.”
김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까딱 흔들었다.
“조용한 곳에서 얘기하지.”
그녀는 그 어떤 질문조차 하지 않는 김진우의 태도에 이채를 띄었다. 하지만 이내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모리건, 주변을 경계하라.”
“네.”
모리건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굳이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저 눈빛으로 자신을 다시 찾아줄 것을 부탁했을 뿐이었다.
“자, 여기서 얘기하지.”
대미궁의 중심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외곽에서도 외곽에 속하는 영역, 김진우는 걸음을 멈추고 여인을 돌아보았다.
은근히 주변을 힐끗거리며 탐색하던 그녀가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심층의 백작이 무슨 볼 일이 있어, 나를 찾은 거지?”
심층의 백작이라는 말이 나왔음에도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치렁치렁한 머리 사이로 눈을 번뜩였을 뿐이다.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네요.”
“알아봐 달라고 그렇게 기운을 줄기줄기 흘려대는데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모리건과 대치하고 있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가 심층의 귀족이며 그것도 남작이나 자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귀한 몸이라는 사실을.
“타이레논에게 들었던 것보다 더 상대하기 까다로운 분이군요.”
“타이레논이라… 그대가 그자의 주인인가?”
지저의 자작이자 타락의 여왕 브륜테스를 섬기는 타이레논을 언급한 것만으로도 그녀는 스스로의 정체를 밝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는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반가워요, 전승의 사령관. 현명한 모사꾼들의 여왕, 브륜테스예요.”
김진우는 굳이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존재에게 진명을 밝힐 생각도 없었고, 제 입으로 낯부끄러운 전장의 사령관이니 정복자니 알려진 이름을 내뱉기도 애매했던 탓이다.
“그래, 날 찾아온 이유는?”
그는 곧장 용건을 꺼내 들었다. 스스로를 현명한 모사꾼들의 여왕이라 소개하고, 제 수하에게조차 자신을 현명한 여왕이라 칭하도록 한 브륜테스라면 필시 머리싸움에 능한 존재일 것이다.
그런 존재와 말을 길게 섞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흠.”
역시나 브륜테스는 그의 단도직입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꿈틀대며 불만스러운 기색을 내보였다.
하지만 이곳까지 찾아온 것만 해도 누가 아쉬운 입장인지는 자명했으니,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용건을 꺼내 들었다.
“그대와 힘을 합치기를 원해요.”
생각지도 못한 용건이었지만, 김진우는 표를 내지 않았다.
침묵이 스스로의 머리를 자신하는 자들을 얼마나 압박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인지라 그저 입을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그녀는 그가 반응이 없자 조금은 흐트러진 입매를 해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녀였다.
“이건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심층 백작 모두의 의견이에요.”
이번만큼은 그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로를 거꾸러트리기 위해 호시탐탐 눈치를 보고 있던 백작들이 힘을 합쳤다는 건 단 한 번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어째서지?”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브륜테스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줄 생각도 없었던지라, 짧게 질문을 던지고는 냉랭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요.”
앞뒤 다 잘라낸 말이었지만 김진우는 단번에 그녀가 말하는 ‘그’가 찬탈자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게 백작들과 무슨 상관이지?”
“그가 이제야 움직이게 된 것은 저희 백작들 때문이니까요.”
슬슬 감이 오고 있었다. 하이로드의 힘을 탐낸 나머지, 찬탈자의 눈마저 가려버린 백작들의 야욕이 탈이 난 모양이다.
“쯧.”
잠깐 사이에 백작들이 처한 상황을 파악한 그는 짧게 혀를 찼다. 이제까지 그들 덕분에 찬탈자의 감시를 피한 것은 사실이나, 선의로 그랬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노린 것은 하이로드의 권능과 대미궁이었고, 단지 그뿐이었다.
이제 와서 백작들에게 의리를 지킬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브륜테스의 말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 속도 모르고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의 급박함을 설명하고, 또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혜택을 베풀어 주었는지를 떠들어댔다.
그렇게 한참을 지껄여대고 나서야 그녀는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저희들은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답니다.”
강대한 군세만큼이나 유능한 인재들을 거느린 백작의 말 치고는 지나치게 자조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그녀가 말한 ‘불신’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아나톨리우스가 파수꾼에게 습격받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