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36)
던전 견문록-236화(236/319)
# 236
던전 견문록
제 237 화
84. 공작의 침공
둔중하게 깔려 있던 군기가 창처럼 뾰족하게 끝을 모아 대미궁을 향했다. 척척거리는 발소리마저도 온 지저를 짓밟을 듯 사납게 울려댄다.
김진우는 사티로스 대군의 진군을 지켜보며 눈을 치떴다.
필시 아리아네가 중간에 수작을 부린 게 틀림이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개미귀신을 찾아 9층 지저를 헤매던 사티로스들이 저리 저돌적으로 대미궁을 향할 리가 없다.
어쩌면 간악한 그녀는 대미궁에 일어난 이변을 알아채고, 그것마저 고자질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뤼양과 그녀가 의사소통이 가능할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최악의 경우 사티로스들이 곧장 대미궁으로 들이닥칠 수도 있었다.
더는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사티로스 무리를 노려보던 그가 귀환을 서둘렀다.
김진우가 다시 대미궁에 도착했을 때, 안젤라는 이미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다소 창백한 안색으로 자신이 본 것을 전부 보고했고, 그는 자신의 짐작과 그리 다르지 않은 상황에 놀라울 것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지금이라도 흡혈귀들을 풀어, 적들을 교란시켜 볼까요?”
안젤라가 방법을 제시했지만, 김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암습에나 쓸모가 있는 흡혈귀가 떼로 달려든다고 해서 일만이 넘는 대군이 머리를 돌릴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전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믿을 수 있는 수하들은 전부 대미궁의 중심부를 지켜야 했고, 활용할 수 있는 전력이라고는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를 이종족과 흡혈귀뿐이다. 게다가 그마저도 파수꾼이 섞여 있을지 모르니, 그야말로 손발이 묶인 채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워야 했다.
“전투를 준비하라. 모든 전력을 뒤로 물리고, 안에서 적을 맞아 싸운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김진우의 표정이 어느새 전장에 선 것처럼 바짝 날이 섰다. 그런 그의 명령에 다소 어수선하던 대미궁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미궁의 일부가 파괴되더라도, 철저하게 적을 끌어들여 상대하도록 한다.”
일단 사티로스들이 미궁 외곽에 도달하면 어떻게든 유인하여 대미궁의 뱃속으로 구겨 넣는 것이 우선이었다. 수천 폭도를 집어삼킨 전적이 있는 대미궁이라면, 적 중 상당수를 걸러낼 수 있을 것이다.
“안젤라, 네가 흡혈귀들과 함께 중앙 통로를 맡는다.”
그는 쉬지 않고 지시를 내렸고, 명령에 따라 흡혈귀와 이종족들이 대미궁의 곳곳에 녹아들었다.
“후우.”
지시를 받은 병력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홀로 입구에 남은 김진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까지 상대했던 그 어떤 적보다 강대한 군대가 코앞까지 성큼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쯤 되자 그는 차라리 마음이 편해지고 말았다.
늘 곁을 지켜왔던 도미니크와 나가들이 없다는 것이, 찬탈자가 움직였다는 소식이, 지저의 시스템이 등을 돌렸다는 점이, 파수꾼의 존재가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이래서야 전승이란 이름이 아깝고, 하이로드의 위엄이 무색하다.
김진우는 전투를 목전에 두고 나서야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온 그는 더 이상 패배를 염두에 두지 않게 되었다.
이제껏 자신이 상대해 왔던 적 중에 단 하나라도 쉬운 이가 있었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살아남아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걱정이 너무 많아졌어…….”
자조적인 음성. 그도 그럴 것이 책임질 것이 많아지면서 언젠가부터 몸이 굼뜨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깨달았다.
김진우는 저 멀리서 느껴지는 사티로스들의 사나운 군기를 느끼며, 마창을 잡아 들었다.
설령 이번 전투에서 많은 것을 잃어 뒤 이어 찾아올 적들을 상대할 기력을 잃는다 해도 반드시 이겨내고 말리라.
사티로스들이 대미궁에 도착하기까지 불과 수 시간을 앞두고, 그는 완벽하게 임전 태세를 마쳤다.
***
척, 척.
사티로스들은 마치 퍼레이드를 펼치는 군인들처럼 발을 맞추며 전진했다. 그렇지만 그 기세만큼은 꽃가루 날리는 퍼레이드에 나선 군인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사납고 날이 서 있었다.
사티로스들은 훈련된 병사라기보다는 맹수에 가까웠고, 억지로 발을 맞추느라 차라리 고생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마치 잘 조련된 사자가 조련사에게 재롱을 피우듯 어색하면서도 섬뜩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수만 사티로스의 지배자요, 심층의 공작인 뤼양의 취향 탓이었으니, 그는 너무나 흡족한 얼굴로 자신의 군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의 말대로군. 과연 저 너머에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사티로스의 진군을 바라보던 뤼양이 곁에 있던 여인을 돌아보았다.
“이제 곧이에요. 제 수하들을 학살하고 핵을 갈취한 악마가 사는 곳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제 몸을 훑어가는 음험한 시선에 여인, 아리아네가 마치 겁먹은 소녀처럼 몸을 움츠려 보이며 헐벗은 몸을 가려 보였다. 뤼양은 그 모습을 보며 도리어 더욱 더 가학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 원수만 갚아주신다면, 그 은혜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갚겠어요.”
입술을 악다무는 표정이 비장하면서도 어쩐지 묘한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어지간한 사내라면 그 모습을 보면서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하지만 뤼양의 입꼬리가 그리는 것은 미색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내의 그것이 아니었으니, 더없이 사납고 위험스럽기만 한 것이었다.
“착각하고 있군.”
뤼양의 말에 아리아네의 표정에 순간 금이 갔다.
“설마 같지도 않은 그대의 이야기에 이 대군을 움직였을까.”
대미궁을 나선 아리아네가 김진우를 모함하여 사티로스들과 맞붙이려고 수라도 쓴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뤼양은 그녀의 사정에 한 점 관심도 없어 보였다.
“난 그저 괴수보다 더욱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발견했을 뿐이야. 그대의 가치는 딱 길잡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붉게 상기된 얼굴에 떠오른 것이 그저 욕정만은 아니었는지, 뤼양의 눈동자는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차갑게 식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대의 수고를 덜어준 대가를 받지 않을 것도 아니지만 말이지.”
금세 히죽거리며 웃어대는 모습이 경망스럽게 보일만도 하련만, 그의 전신에 풍기는 기운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과연 지저의 공작, 싸구려 연극에는 놀아나지 않을 모양이다.
아리아네는 자신의 계략이 들통 났다는 것이 당황스러운지 급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대와의 셈은 전투가 끝난 뒤로 미루겠다.”
그 모습을 보며 뤼양은 꽤나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사냥을 앞둔 맹수의 자신감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승리 이후 손 안에 들어올 여체에 대한 기대감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대는 내가 어떻게 저들을 짓밟는지 구경이나 하거라.”
광오하기까지 한 한마디를 남긴 뤼양이 다시 사티로스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고개 숙인 아리아네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이유야 어찌 됐건 사티로스들이 대미궁을 찾기만 하면 그만.
아리아네는 검은 속을 숨기고, 겉으로는 강대한 공작의 위세와 깊은 심계에 짓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떨어보였다.
***
사티로스 대군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텅 비어버린 9층은 그야말로 무주공산, 사티로스들은 빠르게 대미궁에 도달했다.
“이거 위세에 비해 너무 허술해 보이는군.”
대미궁의 지척에서 군대를 멈춰 세운 뤼양은 조용하기만 한 입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사정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저쪽에서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 없는 건 확실해요.”
대미궁에 도달할 때까지 단 하나의 나가도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아리아네가 슬쩍 뤼양에게 고했다.
“그리고 설령 저들이 멀쩡했다 한들, 이 대군을 막아낼 수는 없을 거예요.”
여전히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사티로스들을 보며 그녀가 뤼양을 부추겼다. 속셈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행동이었던지라 그는 잠시 눈을 흘겼다가 이내 피식 웃어 보였다.
“어차피 두들겨 보면 답이 나오겠지.”
아리아네는 김진우를 심층의 백작이라 말했고, 뤼양은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미궁의 기운이 심상치 않기는 했지만, 그다지 걱정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공작의 군대가 움직였으니 그 자신감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저 안을 살펴라.”
당장에라도 대미궁의 입구로 모든 병력을 쏟아부을 것 같았던 뤼양이 손짓했다. 대열의 선두에 서 있던 사티로스 부대 몇이 대미궁을 향해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보무도 당당하게 대미궁을 향해 들어섰던 사티로스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뒤, 뤼양은 먼저 보낸 병력이 전멸했음을 용케 느끼고는 다시 한 번 병력을 들여보냈다.
이번에는 처음의 두 배에 달하는 사티로스가 대미궁으로 들어섰고, 그들 역시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들어간 병력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린 처음과는 달리 생존자가 있었다.
두꺼운 가죽이 이곳저곳 뜯겨져 나간 사티로스 몇이 돌아와 안쪽의 상황을 보고했다.
“적의 수가 예상보다 많은 모양이야. 하지만 차라리 잘 됐어. 뭔가 신묘한 수라도 있나 했더니, 단순히 홈 어드벤티지를 이용하겠다는 생각인 것 같으니까.”
잠깐 사이에 수백의 병력을 잃었지만, 뤼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미궁을 이용해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겠다는 적의 의지를 확인한 것으로 만족한 눈치였다.
“그래도 특이하군. 흡혈귀가 떼로 몰려 있는 건 본 적이 없는데.”
살아 돌아온 수하가 우악스럽게 머리채를 붙잡고 선 흡혈귀를 바라보던 뤼양이 눈을 빛냈다.
“음.”
아리아네는 자신이 모르는 병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불안해 졌지만, 금세 생각을 정리하고는 눈치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저 오만한 지저의 공작은 그다지 시간을 지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쯧, 약해. 너무 약해.”
입을 열지 않는 흡혈귀를 난도질하다 죽여 버린 뤼양이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딴 허약한 놈들이라면 어둠에 숨어 있든, 그 수가 몇이든 문제될 게 없지.”
설령 흡혈귀보다 더한 놈들이 있다고 해도 사티로스들이 질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듯한 기색이었다.
“살아 있는 건 모두 죽여라.”
어울리지 않게 발을 맞추고 모양새를 신경 쓰느라 억눌려 있던 맹수들의 야성이 그 한마디에 폭발했다.
크아아아아아.
뤼양은 그 모습을 보며 곧 미궁이 함락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이었다. 아리아네 역시 가만히 끝도 없이 대미궁을 향하는 사티로스를 보며 눈을 빛냈다.
수천의 폭도가 대미궁을 향해 달려들었을 때, 그녀는 그들이 어떤 식으로 최후를 맞이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기세 좋게 달려 나간 사티로스 중 상당수가 그들과 같은 최후를 맞이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운이 없다면 절반, 아니, 그 이상의 병력이 허무하게 사라질지도 모를 상황,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뤼양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듯, 한시도 대미궁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금방 끝나겠군.”
무지막지한 수 앞에서 저항조차 무의미한지, 미궁을 향해 달려드는 사티로스들의 행렬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근데 백작의 미궁치고는 제법 그럴싸하지 않은가? 이 정도라면 꽤나 전리품이 나오겠어.”
벌써 미궁이 제 손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뤼양의 음성은 광오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갑작스레 진동하기 시작한 대미궁을 보며 뤼양이 눈을 부릅떴다.
“이런 개 같은!”
“갑자기 왜…….”
당혹스러움과 혼란이 가득한 음성에 아리아네가 물었다. 천연덕스러운 목소리에 담긴 탐색의 기미를 뤼양은 전혀 느끼지 못한 듯했다. 그는 오로지 갑작스러운 이변에 정신이 팔려 눈을 번뜩이는 그녀를 채 발견할 수 없었다.
“병력의 2할이 사라졌어…….”
수천의 사티로스, 대군의 2할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그조차도 그저 시작에 불과했으니, 탐욕스러운 괴수는 이제 막 깨어났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