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37)
던전 견문록-237화(237/319)
# 237
던전 견문록
제 238 화
김진우는 눈을 감고는 오너 룸에 앉아 대미궁을 침범한 끈적끈적한 군기를 가늠해 보고 있었다.
“적이 중앙 통로를 가로질러 계속해서 밀려들고 있나이다!”
릭샤샤가 다급하게 보고했지만 그는 여전히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적이 너무 깊숙이 들어오게 될 터, 어서 결단을 내리소서!”
늘 침착했던 그녀가 몇 번이나 보챌 정도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적의 수는 많았고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이대로라면 대미궁이 적의 손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진우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사티로스들이 절반 가까이 대미궁에 들어서고 난 후였다.
“기상 시간이다, 대미궁이여.”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미궁이 괴성을 지르며 깨어났다.
“먹어치워라.”
언젠가 수천의 폭도를 집어삼켰던 끔찍한 식욕이 다시 도래했다.
고오오오오오.
소름 끼치는 대미궁의 포효가 사티로스들의 단말마마저도 집어삼키고, 수천에 달하는 맹수가 그대로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사티로스들은 이제껏 대미궁이 맛보았던 그 어떤 소환수보다 맛 좋고 영양가가 높았습니다. 덕분에 대미궁에 들어선 병력의 절반도 채 먹어치우지 못했지만, 배가 차버리고 말았습니다.] [포만감으로 배가 가득 찬 대미궁은 더 이상의 식사를 이어갈 수 없습니다. 모처럼 찾아온 만찬을 놓친 대미궁이 몹시 안타까워합니다.] [막대한 생명력을 흡수한 대미궁은 그 에너지를 소화하는 데 다소 시간이 필요합니다. 소화가 끝난 후 모든 생명력은 던전 에너지로 변환됩니다.] [변환된 던전 에너지는 비활성화되어 있던 시설들을 재활성화시키고 소환수를 소환하는 데 사용됩니다.]가급적이면 많은 수의 사티로스를 대미궁이 처리해 주기를 바랐던 김진우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수천에 달하는 사티로스가 대미궁의 한 끼 식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몇 배는 되는 수가 미궁 밖에, 또 안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쉬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싸워야 할 때였다.
“입구를 닫고.”
굉음과 함께 대미궁의 문이 닫혔다.
“모든 함정을 가동한다.”
사티로스를 최대한 끌어들이기 위해 잠 재워 두었던, 명장의 반열에 오른 미궁 설계자의 걸작들이 마침내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켰다.
거칠 것 없이 대미궁을 파고들었던 사티로스들에게 지옥이 시작되었다.
***
“제길!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뤼양은 그야말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있는 상태였다. 쉽게 생각했던 백작 나부랭이의 미궁이 계속해서 애를 먹이고 있었다.
수천에 달하는 병력이 순간적으로 증발하는가 싶더니, 갑작스레 미궁의 입구가 사라지고 안으로 들어선 수하들의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다. 처음에 사라진 병력의 손실에 비하면야 지금의 피해는 그야말로 얼마 되지 않는 수였지만, 지속적인 피해의 누적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네년! 나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지!”
뤼양의 분노는 결국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아네를 향했다. 그녀만 아니었어도 아까운 수하들이 이토록 속절없이 증발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말해! 내가 모르는 게 뭐지? 대답 여하에 따라 지금 당장 네년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마.”
이제는 숫제 으르렁대는 듯한 뤼양의 사나운 음성에 아리아네가 온몸을 떨었다.
“제, 제가 아는 건 이미 저, 전부 말씀드렸어요.”
시꺼먼 속내를 숨긴 그녀의 연기는 감쪽같았다. 뤼양 역시 몇 번 더 다그쳤지만, 남작에 불과한 그녀가 알아봐야 뭘 알겠냐며 그저 분풀이에 불과한 폭력을 행사했을 뿐이다.
“미치겠군, 고작 백작급 미궁 따위에게.”
이제 와서 고민해 봐야 이미 사라진 병력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공작에 오른 뒤로 무서운 게 없었던 그의 입장에서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일 투성이였다.
미궁에 들어선 병력은 그가 이끌고 온 사티로스 중 절반에 해당되는 수였다. 그중 절반이 눈 깜짝할 사이에 증발해 버렸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소환수와의 교감이 끊어지고 있었다.
설령 같은 공작급의 미궁에 병력을 밀어 넣었어도 이처럼 단시간에 피해가 극심하지는 않았으리라.
가볍게 생각했던 나들이에 생각지도 못한 병력의 손실이 있었다. 이쯤에서 병력의 진퇴를 고민해 봐야 했다.
하지만 그냥 물러서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직도 상당한 수의 병력이 저 안쪽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으며, 그 많은 병력을 전부 포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지난 지진으로 무지막지한 타격을 받은 지금의 자신이라면 저들을 반드시 살려야 했다.
크어어어어.
생각에 잠겨 있던 뤼양은 갑작스레 터져 나온 수하들의 포효에 고개를 들었다.
“입구가 뚫렸습니다!”
머리통이 깨어진 사티로스 수십이 목숨과 맞바꾸어 만들어낸 통로를 보며 뤼양은 이를 갈아붙였다.
“통로 넓히고 안으로 들어간다!”
***
어렵사리 뚫어낸 통로 너머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사방에 적과 아군의 시체가 가득 차 있었으며, 그들이 흘린 피로 인해 발바닥이 끈적하게 들러붙을 지경이었다.
뤼양은 그 목불인견의 참상을 보며 완전히 차갑게 식어버린 눈빛을 해보였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조바심이 가득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이쯤 되니 그 스스로도 약간은 위기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사티로스들은 고작 백작의 미궁을 점령하지 못해 이리 허무하게 당할 졸자들이 아니었다. 설령 간계에 빠졌다 한들, 힘으로 부수고 짓밟는 것, 끝내는 상대의 육신을 찢어발길 충분한 힘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많은 피해가 생겼다는 건 적이 그만큼 대단한 구석이 있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그게 이 특이한 미궁이 가진 본연의 능력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무엇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더 이상 적을 자신의 아래로 보지 않았다.
“최소한 공작급의 미궁에 들어섰다고 생각하라.”
그의 말에 피 냄새에 흥분해 당장에라도 내달릴 것 같았던 사티로스들이 억지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끄악!”
몇 번이나 암습이 있었다. 어둠에 몸을 숨긴 흡혈귀들이 달려들었지만, 피해는 생기지 않았다. 작정하고 나선 뤼양이 그 모든 암습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그렇지만 피해가 줄었다 뿐이지 상황은 결코 좋아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미궁 안에 먼저 들어선 수하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주인의 기운을 느꼈을 텐데도 불구하고 모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뤼양은 병력을 추스르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이 정체불명의 미궁을 먼저 함락시키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번쩍거리는 통로의 벽은 눈을 어지럽히다 못해, 방향감각마저 앗아갔고,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각종 함정들은 그들의 걸음을 더디게만 만들었다. 그나마 적의 소환수가 별 볼 일이 없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뤼양과 사티로스들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미궁의 중심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고작 백작이 아니었어.”
백작의 미궁이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지나치게 방대하고 함정의 깊이가 음험하기만 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뤼양이 아리아네를 노려보았다. 모진 분풀이에 이미 너덜너덜해진 미몽의 여왕은 분노에 찬 눈길이 닿자 움찔, 몸을 떨어 보였다.
“지저의 신비에 대고 맹세컨대, 이 미궁의 주인은 공작에 이르지 못했어요.”
딴에는 맞는 말이었다. 김진우는 하이로드에 오르며 지저의 귀족위를 반납했으니 공작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 숨겨진 사정을 알 리 없는 뤼양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하기야 중요한 일도 아니지. 어차피 이 미궁은 오늘 내 발 아래 무릎을 꿇게 될 테니까.”
그의 눈빛이 광망을 뿜었다.
“이 미궁의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살려달란 말 대신 죽여달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어줘야 직성이 풀리겠어.”
섬뜩한 다짐과 함께 뤼양이 더욱 더 속도를 높였다.
***
뤼양이 미궁에 들어선 그 시각, 김진우는 그야말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원래부터가 강력한 무력이 각종 증폭 효과에 홈 어드벤티지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전신이 따로 없었다.
사티로스 중 어느 누구도 그의 일격을 받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주변에는 사티로스가 가득했다. 과연 이곳이 자신의 미궁인지 적의 본거지인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적들에게 둘러싸여 무아지경으로 창질을 해대던 김진우가 문득 멈춰 섰다. 그는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노려보듯 온통 신경을 저 너머에 집중하고 있었다.
“끄으.”
그간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시달렸는지, 무방비하게 창을 늘어뜨린 그를 보고도 사티로스들은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고 억눌린 신음 소리만 내뱉었다.
“엉덩이가 무거워도 더럽게 무거운 놈이군.”
아직은 멀지만 그래도 제법 또렷하게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에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혹시라도 뤼양이 발을 돌릴까 염려되어 이제껏 그는 제대로 된 하이로드의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사티로스들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순전히 육신의 힘만으로 싸우느라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주인님!”
그가 뤼양의 기운을 쫓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안개가 불쑥 피어오르며 안젤라가 나타났다.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부디 권속들의 퇴각을 허락해 주세요.”
어차피 우두머리가 나선 이상 흡혈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개미귀신마저 쫓아낸 공작의 힘이라면 흡혈귀의 암습은 통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선뜻 허락해 주었다.
안젤라는 그의 말에 기쁜 기색도 없이 곧장 안개로 화해 사라졌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평소처럼 느긋하게 움직일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자, 그럼 네놈들의 주인을 만나러 가볼까.”
유달리 적막했던 전장에 다시 섬뜩한 파육음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처음의 위기감도 잠시, 뤼양은 금세 들뜬 얼굴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찮게 보았던 미궁이 지속적으로 자신을 골탕 먹이자 오히려 탐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무려 공작씩이나 되는 존재를 애 먹일 정도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욕심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지금에 와서는 차라리 다른 공작들이 이곳을 알기 전에 자신이 발견한 것을 다행이라고까지 생각하는 듯했다.
비록 수하들의 피해가 컸지만, 그는 더 이상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오로지 곧 제 손에 쥐어질 미궁의 핵에 대한 기대감뿐이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가 김진우를 처음 보았을 때, 대군을 홀로 막아선 정신 나간 몰골을 보고도 그리 이상하지 않게 생각한 것은.
“오오! 저 죽을 자린지도 모르고 잘도 찾아왔구나!”
뤼양은 단숨에 그가 이 정체불명의 미궁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고는 환호했다.
“뭐라는 거야, 어지간히 앵앵거리는군.”
김진우는 그런 뤼양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말은 통하지 않았어도 척 보기에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히 보였던 탓이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것을 남에게 내줄 정도로 너그러운 성격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기분이 좋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뤼양의 곁에서 그토록이나 찾던 여인을 발견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리아네.”
비록 엉망진창의 꼴을 하고 있었지만 도망자를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소 창백하게 질린 모습이었지만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꺼떡.
정체가 모두 들통 났다고 생각한 탓일까. 자신을 마주하고도 오히려 도발하듯 고개를 까딱이는 그 모습이 어이없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 김진우는 차라리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는 이내 웃음기가 싹 사라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기다려, 내가 그쪽으로 간다.’
마지막 한마디가 입술 끝에서 채 가시기도 전에 김진우가 사티로스 대군 사이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