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38)
던전 견문록-238화(238/319)
# 238
던전 견문록
제 239 화
검지를 쭉 뻗은 채 기세 좋게 떠들어 대던 뤼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여긴 심지어 심층도 아니라고!”
이미 자신의 미궁과 맞닿은 이곳이 심층에도 이르지 못한 저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기에 예상치 못한 피해에 당황은 했을지언정 겁을 먹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이 아는 지저에 대한 상식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각 층의 구분과 한계는 명확하고 저층에서 심층에 이르기까지 힘의 격차는 절대적이다.
저층에서 태어난 존재는 절대로 심층의 존재를 이길 수 없으며, 심층의 존재는 보다 깊은 층의 존재를 거스를 수 없다.
이것이 그가 아는 지저의 절대적인 법칙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서 그 모든 상식이 무너지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비명이 끊이지가 않는다. 그때마다 사방에 솟구치는 것은 억센 부리가 달린 사티로스의 머리요, 털 숭숭 난 반인반마들의 사지뿐이었다.
피보라가 피어나 마치 통로 일부가 피안개에 집어삼켜진 것과 같은 모습.
뤼양은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존재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기에 충격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이익!”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처음 이 기이한 미궁의 주인을 봤을 때만 해도, 그저 이 작은 나라가 꽤나 깊은 곳에 존재하는 미궁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의외일 뿐이었다.
고작 12층까지밖에 존재하지 않는 지저. 당연하게도 상대는 13층에서 태어난 자신보다 약자일 거라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대체 뭐란 말인가.
강인하고 억센 사티로스들이 마치 사자를 만난 양 떼처럼 찢기고 흩어져 사방팔방으로 튀어대고 있었다.
설령 자신이 저들 가운데 뛰어든다고 해도 저런 위용은 보이지 못하리라.
창날이 휘청이면 머리가 육신과 분리되고, 창끝이 한 발 내딛으면 어김없이 하나에서 둘 이상의 심장이 터져 나갔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때마다 사내가 쥔 창은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울어댔다. 절명한 것은 제 수하들인데 가증스럽게도 비명은 창이 질러대고 있었다.
뤼양은 그게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들려 이를 까드득 깨물었다.
“물러서라!”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사납게 포효했다. 인간의 성대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거칠고 탁한 소음. 그렇지 않아도 양 떼처럼 사내에게 내몰리던 사티로스들이 이때다 하고 우르르 사방으로 흩어졌다.
“감히!”
그 모습을 보니 뤼양은 다시 한 번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자신의 강대한 군대가, 자존심이 산산조각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
사내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뤼양은 이미 처음부터 사내가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통로를 가득 채운 사티로스를 저리 양단하듯 가로지를 이유가 없었으니까.
“네 이놈! 감히 소국의 졸자 주제에!”
실상 상대가 노린 것은 아리아네였지만, 오만함이 뼛속까지 스며든 지저의 공작은 사내가 자신을 꺾는 것으로 이 전투를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존심이 상했고, 전에 없이 분노했다.
“앞에 나서라! 내 직접 그대의 힘을 시험하리라!”
뤼양이 사납게 포효하며 한 발 나섰다.
사티로스들이 열어준 통로 너머에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 사이에 온몸을 벌겋게 물들인 사내. 뤼양은 그 무지막지한 선혈이 전부 제 수하의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네놈을…….”
목소리만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천참만륙낼 것 같은 음성. 벽에 바짝 붙어선 사티로스들을 둘러보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음…….”
푸른 광망이 넘실대는 눈동자, 그 너머에 보이는 것은 투쟁심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열기였고 열망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뤼양은 마음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자신이 상대를 사냥감으로 보았듯, 상대 역시 자신을 사냥감으로 보고 있었다. 뤼양은 오만함을 싹 걷어낸 얼굴로 사내를 노려보았다.
이 싸움,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뤼양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이런. 그래도 땅따먹기 해서 딴 공작 자리는 아닌 모양이야.”
자신을 마주한 순간, 눈빛이 차갑게 식어버린 뤼양을 본 김진우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조금은 방심해 주기를 바랐는데, 이거 아쉽게 됐어.”
“그럴 작정이었으면, 조금은 자제를 하셨어야죠.”
언제 나타난 것인지 피보라 속에서 불쑥 솟아난 안젤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방법이 없었으니까.”
뤼양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김진우는 가볍게 그녀의 말을 받아주었다.
“이제 어쩌실 건가요?”
안젤라 역시 전력의 공백이 심각한 미궁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터라, 더는 얘기하지 않고 앞으로의 일을 물었다.
“어쩌긴, 저렇게 레드카펫을 깔아주니 가만있기도 뭐하군.”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뻔뻔함. 제 스스로가 만든 피의 길을 두고 그는 되도 않을 농담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남의 집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말이야.”
“조심하세요. 적은 시시껄렁한 남작과 다르고, 음험하기만 한 백작과도 달라요. 적은 당당한 심층의 공작이에요.”
끝없이 치솟는 공작의 투기는 진혈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안젤라에게도 위협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로 몇 번이나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적이 공작이고 나발이고 간에.”
김진우는 그녀와는 달리 여유가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것저것 걱정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지고 나니 그는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싸운다. 그리고 이겨내고 살아남는다.
복잡한 계산 따위는 눈곱만큼도 끼어들 여지가 없는 지저의 율법이 새삼 선명하게 새겨졌다.
“맡겨둔 물건이 있으니 가지 않을 수도 없잖아?”
그의 시선이 여전히 뤼양의 그림자에 숨어 노골적인 탐색의 시선을 던져오는 아리아네를 향했다.
“그리고 무단 침입의 대가정도는 받아야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의 몸은 쏜살 같이 튀어나가고 있었다.
전장의 한가운데, 하물며 앞에 선 것은 지저의 절대자라 할 수 있는 공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더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여인과 노닥거리는가 싶더니, 자신을 힐끗거리며 웃어 보이기까지 한다.
화가 나는 상황이었지만 뤼양은 분노하는 대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투기를 끌어올렸다.
이미 상대가 최소한 자신과 동급이라 가정한 상황. 아니, 그것도 방금 전까지의 얘기일 뿐이다. 상대의 존재감은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자신이 선 곳이 상대의 본거지라는 사실이 지금 이 순간 그를 무섭도록 짓눌렀다.
만만한 저층의 미궁을 상대한다는 사실에 들떠 경솔하게 들어섰던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뤼양은 스스로의 힘과 위치에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심층에서도 흉악하기로 소문난 사티로스 전사들을 이끄는 수장이자, 지저 귀족들의 정점에 선 공작이다.
겁먹은 개처럼 꼬리를 말고 주저앉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뤼양은 자신을 향해 짓쳐드는 사내를 노려보며 괴성을 내질렀다.
“와라!”
하체의 관절이 기괴하게 비틀리고, 다소 평평했던 안면이 앞으로 툭 튀어나온다.
상체의 근육이 요동을 치며 불뚝 불뚝 솟아나오고 늘어트린 손마디 끝으로 기다랗게 손톱이 튀어나왔다.
그야말로 뼈가 뒤틀리고 거죽이 돋아나는 변화, 뤼양은 어느새 사티로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방심은 없다. 3류 악당처럼 최후의 최후까지 힘을 아껴두었다가 봉변을 당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끌어냈다.
“카악!”
인간의 그것을 벗어난 포효, 뤼양이 사납게 울부짖으며 사내를 향해 마주 쏘아져 나갔다.
***
지저를 살아간다는 건, 특히나 하나의 미궁을 책임지고 진정한 지배자가 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종을 초월하여 그들과 동화된다는 의미였다. 김진우는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진실을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납게 기세를 북돋으며 달려오는 뤼양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저의 존재 그 자체였으니까.
그래서 그는 전투에 앞서 뜨겁게 타올랐던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싸늘해진 마음과는 달리 근육은 달아올랐고, 착실하게 적을 분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악!
마창이 비명을 지른다.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에도 마창은 스스로 움직여 적을 향해 자신을 쏘아내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김진우는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내고는 그대로 마창을 내질렀다.
“캇!”
뤼양이 끝이 매섭게 휜 부리로 창날을 쳐냈다. 어느 것도 관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던 마창, 궁니르가 처음으로 적에게 막힌 순간이었다.
김진우는 실망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공작씩이나 되는 존재가 창질 한 번에 나가떨어질 거란 생각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콱.
마창을 튕겨낸 뤼양이 머리를 들이 밀며 부리를 내리찍었다. 지저에 몇 안 되는 공작 치고는 실로 조잡하고 무식한 공격이었지만 그만큼 빠르고 위협적인 일격이기도 했다.
그대로 넋 놓고 있다간 날카로운 부리 끝에 머리가 꿰뚫릴 판국이었다. 김진우는 튕겨져 나간 마창을 끌어당기며 창대로 뤼양의 부리를 내리찍었다.
억센 팔이 엉겨 붙어 제 부리를 누르는 창대를 밀어냈다. 그 무지막지한 근력에 그는 억지로 버티지 않고 힘껏 발을 내질러 뤼양의 가슴께를 걷어차며 물러났다.
그렇게 튕겨나듯 물러나는 와중에도 십수 번의 창질이 흘러나왔고, 뤼양 역시 사지를 마구 휘저으며 창을 밀어내고 억센 손톱으로 허공을 긁어댔다.
탁.
소득 없는 공방이 오가고, 둘 사이의 간격이 벌어졌다. 하지만 금세 두 초인은 엉겨 붙어 지독스러울 정도로 효율적인, 그래서 더욱 무식해 보이는 공방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
멀찍이서 제 주인과 공작의 전투를 지켜보던 안젤라는 입을 쩍 벌렸다. 그래도 하이로드니 공작이니 대단한 존재끼리 맞붙었기에 뭔가 특별한 전투가 벌어질 줄 알았더니, 세상에 개싸움도 이런 개싸움이 없었다.
박치기를 하고 손톱을 할퀴어대고, 창을 마구잡이로 내지르는 두 괴물의 전투는 그 격에 비해 너무나도 투박하기만 했다.
쾅!
하지만 그 여파는 결코 단순치 않았다. 공작의 몸을 스치고 흘러간 창질 한 번에 단단한 대미궁의 벽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고, 공작의 사소한 발구르기 한 번에 반경 수 미터 대지가 가라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저건 너무 개싸움이잖아! 권능은 뒀다 뭐하려고!”
안젤라는 결국 참았던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그녀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갑작스레 전투의 양상이 변했다. 먼저 변화를 도모한 것은 뤼양이었다. 거대한 사티로스로 화한 공작은 손날 끝에서 위험스러운 흑기를 뽑아 들었다.
쉬익!
그렇게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하나둘 갈라지더니 순식간에 수십 가닥의 채찍이 되었다.
“주인님!”
사방을 점하고 짓쳐드는 채찍,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공격에 안젤라가 저도 모르게 경호성을 내질렀다. 괴물로 화한 공작과는 달리, 주인은 아직까지 인간의 육신을 하고 있었으니, 그 흉맹한 공격에 피륙이 상할까 걱정이 되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은 그저 기우에 불과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검은 채찍을 바라보고 있던 주인이 너무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수십 가닥의 흑기를 흩어버린 것이다.
“아!”
아니, 반대다. 그것은 흩어버렸다기 보다는 빨아들였다고 해야 할 광경이었다. 가닥가닥 끊어져 흘러내리던 흑기마저도 주인의 손끝을 향해 빨려들었다.
주인은 황당하게도 적의 공격 자체를 먹어치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