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41)
던전 견문록-241화(241/319)
# 241
던전 견문록
제 242 화
86. 파수꾼의 주인
새하얀 피부에 검붉은 점이 생기더니, 이내 새까맣게 썩어 들어간다.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끔찍한 광경, 당사자가 얼마나 큰 고통을 느끼고 있을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아리아네는 끔찍한 저주에 몸이 녹아내리는 와중에도 끝끝내 침묵을 고수했다.
고통을 참느라 악다문 이가 다 깨어져 나가고, 입술은 짓씹혀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그녀는 입을 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과연 폭력 앞에서 무릎 꿇고 살려 달라 애원하던 그 아리아네가 맞기는 한 걸까. 미몽의 여왕이라는 거짓 가면을 벗은 그녀는 그토록이나 독했다.
“흐으, 끄, 끓는 솥단지에 넣고… 뚜껑을 덮는다 해도, 제, 제 입을 열 수는 없을 거예요.”
그녀는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비록 깨어져 나간 이 탓에 발음도 엉망진창이고 툭툭 끊겨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 안에 담긴 도발의 기색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떠들어댈 힘이 있으면, 내 질문에나 답을 해줬으면 좋겠군.”
김진우는 그 지독스러운 인내력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해봐. 그대 말고 다른 파수꾼이 이곳에 남아 있나?”
하지만 아리아네는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이, 이건 어떨까요. 번갈아 가며 하, 하나씩 질문을 하는 건…….”
이쯤 되니 차라리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는 모양이야, 지금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 알고 있을 텐데.”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그녀를 한줌 핏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질긴 숨을 잇고 있는 것은 순전히 그가 그녀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몇 번이나 자신을 배신한 것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끝장내고 싶었다. 하지만 분풀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에게 얻을 정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도 멍청한 짓이지.”
그래서 그는 그녀의 제안을 거부하는 대신, 저주의 진행을 늦춰주었다.
“좋아,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겠다.”
이미 썩어문드러진 육신의 일부야 어쩔 수 없다 해도, 당장 새 살이 뭉개지는 고통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아리아네는 한결 편한 얼굴을 해보였다. 필사적으로 버텨내기는 했지만, 그녀 스스로도 고통을 참는 게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기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굳이 거래 같지도 않은 거래를 제안을 할 이유가 없었다.
“경고하건데 어설프게 거짓을 고하거나, 시답지 않게 말을 얼버무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겨우 고통에서 해방되어 숨을 돌렸던 아리아네의 얼굴이 갑작스레 일그러졌다.
“잠시 진행을 멈추었을 뿐, 저주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악!”
그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단 사실에 마음을 놓았던 것일까. 기습적인 고통에 그녀가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럼 내가 먼저 질문하도록 하지.”
다시 고통이 멈춘 것인지 파리한 안색을 한 아리아네가 그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
없던 벽이 솟아나고 천장이 내려앉는 일 따위는 대미궁에서 더 이상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소환수들은 갑작스레 생겨난 벽이 자신들의 주인과 배신자를 집어삼켰음에도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저 그 너머에서 무슨 대화가 오갈지, 또 무슨 일이 있을지 궁금한 얼굴을 해보였을 뿐이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기에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안젤라가 지루함에 하품을 하며 말했지만, 릭샤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주인의 귀환을 기다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까칠하기는…….”
자신을 무시하는 릭샤샤의 태도가 못마땅한지 몇 번 입을 비죽인 안젤라였지만, 애초에 주인이 아니고선 입을 좀체 열지 않는 언더 엘프들의 성정을 아는지라 굳이 말을 더 붙이지는 않았다.
“하나만 묻겠다.”
그런데 웬일인지 릭샤샤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오, 물어봐. 우리 과묵한 언더 엘프 아가씨는 뭐가 그렇게 궁금할까?”
“내가 그대를 믿어도 되겠는가.”
가볍게 그녀의 말을 받던 안젤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대의 충성을 진정 믿어도 되겠냐는 말이다.”
“아마 네가 아닌 다른 이가 그런 질문을 던졌다면, 그대로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줬을 거야.”
살가운 말투에 비하면 지나치게 살벌한 내용이었지만 정작 릭샤샤는 눈썹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결같은 표정으로 대답을 종용했을 뿐이다.
“그런데 의미 없지 않아? 뭐, 상황이 어수선하니 이해는 하는데, 과연 그런 질문이 의미가 있을까?”
심층의 주인들마저 제 심복을 믿지 못해 칩거한 상황에서, 말 한마디로 파수꾼을 걸러내겠다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과묵한 언더 엘프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의미 있다.”
안젤라가 의외라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 말은, 내 말을 믿는다는 거야?”
릭샤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좋아, 모처럼 네가 듣기 좋은 말을 해줬으니, 나도 질문에 대답해주지.”
안젤라는 자신이 끝까지 져버리지 않은 피의 계약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짤막한 설명을 들은 릭샤샤는 완전히 납득한 얼굴을 해보였다.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야? 주인님의 말 외에는 네게 무가치한 거 아니었…….”
안젤라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고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전까지의 유쾌함은 온데간데없고 사냥감을 눈앞에 둔 듯 날카롭게 번뜩이는 그녀의 눈빛이 릭샤샤의 온몸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너, 뭔가를 알고 있구나?”
“파수꾼에 관련된 건 아니지만 이상한 게 있다.”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춘 릭샤샤의 태도를 본 안젤라는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주인님은 알고 있어?”
릭샤샤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생각이 있는 모양이네. 그냥 한 얘기 같지는 않고… 좋아, 나한테 바라는 게 있다면 말해.”
“내가 도움을 청할 때, 단 한 번만 나에게 힘을 보태다오.”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안젤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하필 나지? 넌 날 싫어하지 않았나?”
“싫고 좋고 할 것도 없다. 그저 도미니크가 없는 지금은 그대만이 나를 도울 수 있을 뿐.”
“아, 답답해. 너나 도미니크나 주인님 외에는 너무 말을 아껴. 이야기하다가 숨넘어갈 지경이야.”
단편적인 대답에 속이 탔는지 안젤라가 신경질을 부렸다. 릭샤샤가 그런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지나가듯 말했다.
“지상에 제멋대로 들락거릴 수 있는 건 주인님을 제외하면 그대뿐이니까.”
뜬금없는 말에 영문을 알 길이 없던 안젤라는 다시 그녀를 닦달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릭샤샤가 빨랐다.
“주인님께서 돌아오셨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 쩍 갈라진 벽이 있었고 그 너머에 그토록이나 기다리던 김진우가 있었다.
“나중에 꼭 이야기해 줘야 돼.”
마음 같아서는 계속해서 그녀를 들들 볶고 싶었지만, 그러자니 주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
김진우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혼자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던 아리아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안젤라와 릭샤샤도 그 사실을 눈치챘지만, 굳이 찾지 않았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나 빤했던 탓이다.
하기야 꿈을 통해 타인과 접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미몽의 여왕이라면 출구 없는 감옥이라 한들 안심할 수 없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김진우가 그녀를 그대로 방치해 두었을 리 없었다.
과연 모습을 드러낸 그는 아리아네에 대한 언급은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주인님, 배신자들은 다 찾아내셨나요?”
어지간히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하기야 적아를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운신의 자유가 대폭 제한된 그녀니 일의 경과가 궁금할 만도 했다.
“안타깝게도 다른 파수꾼의 존재는 알아낼 수 없었어.”
“아.”
안젤라는 노골적으로 실망한 얼굴을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소득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김진우가 뒤늦게 표정을 달리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찬탈자는 움직이지 않은 것이 아니었어.”
“네? 그게 무슨…….”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안젤라가 무심코 되묻고 말았다.
“찬탈자는 움직이지 못한 거였어.”
***
아리아네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그녀는 다른 파수꾼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또 그들을 구별해낼 수 있는 능력도 없었다.
그저 하나의 공통된 임무를 위해 움직일 때만이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말했다.
“그대들은 어떤 식으로 임무를 전달받은 거지?”
“이번에는 제가 질문할 차례예요.”
잠시나마 그녀와의 거래를 잊고 있었던 김진우가 뒤늦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거래는 거래였던지라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나마 그녀의 질문을 기다렸다.
“당신이 계승받은 진짜 이름이 뭐죠?”
“탐욕.”
김진우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어차피 오늘이 가고 나면 그녀는 사라질 존재,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과연…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아무래도 수없이 많은 존재를 먹어치운 대미궁과 그 지배자의 만행을 지켜봐 왔던 그녀인지라 금세 납득한 얼굴을 해보였다.
“이번에는 내 차례군. 그대가 받은 임무의 내용은?”
“당신의 힘을 시험하는 게 제 임무였어요.”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뤼양과 사티로스들을 대미궁으로 끌어들였던 탓에, 그녀의 임무가 대미궁을 멸망시키는 것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단순히 대미궁과 그의 힘을 시험해보는 것이 목적이라 말했다.
“의도를 알 수 없군.”
“저 역시 임무를 따를 뿐, 그 속뜻은 알 수 없어요.”
“좋아. 이번에는 그대 차례다.”
“당신의 목적은 뭐죠?”
“개인적인 복수. 디나리온 역시 파수꾼의 목표였나?”
“처음에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맞아요.”
아리아네는 저주의 진행이 멈춘 뒤로 묘하게 순종적이었다.
그것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대화가 끝난 후 다시 시작될 고통이 두려웠던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최대한 이 기회를 활용했다.
그 뒤로도 질문과 답이 오갔다. 김진우는 아리아네에게 파수꾼에 관련된 질문을 던졌고, 그녀는 그가 얻은 탐욕의 힘에 대해 묻고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오가는 질답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녀는 그저 계시와도 같은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장기판의 가장 하찮은 말과도 같은 존재였던 탓이다.
어쩐지 핵심에 다가서지 못하고 언저리를 맴도는 듯한 기분.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너무 밑지는군.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은 게 하나도 없다.”
“질문 자체가 내가 답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내가 누굴 위해 일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당연히 그녀가 찬탈자를 위해 움직일 거라 생각했던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찬탈자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었나?”
“아니요.”
“그럼…….”
“이번에는 제 차례인걸요.”
그는 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태도는 방금 전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어떻게든 입을 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텨내던 그녀가 지금은 마치 비밀을 말해주지 못해 안달 난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저주의 진행이 멈춘 직후였는지, 그도 아니면 자리를 대미궁이 만들어낸 밀실로 옮기고 나서 부터였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태도가 돌변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장난은 적당히 하도록 하지. 그 정도로 표를 내면 모른 척해주기도 힘들다. 나는 그대와 다르게 연기에 소질이 없거든.”
김진우는 눈을 날카롭게 뜨고는 아리아네를 노려보았다.
“새로운 명령이 떨어진 건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것도 없었던 그녀의 가슴께에 언제 생겨난 것인지 눈동자 모양의 문양이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