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43)
던전 견문록-243화(243/319)
# 243
던전 견문록
제 244 화
87. 첫 경험.
‘사티로스들의 지배자가 전쟁에 패배했다.’
‘정체불명의 미궁이 ’영원의 유배지‘를 함락시켰다.’
크나큰 대재앙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대규모 전쟁의 결과는 생각 이상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진정한 심층의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공작이 전사했다는 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급부상하여 어느 누구보다 빠르게 공작의 자리에 오른 신흥 강자가 베일을 채 벗기도 전에 스러진 것이다.
심층의 판도가 변화하는 결정적 사건이었고, 층이 맞닿아 재편된 지저 미궁의 주인들이 위기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죄악의 마군을 꺾은 나가의 왕이 버티고 선 9층 지저 미궁의 주인들은 더욱 더 애가 닳았다.
그들은 그간 아껴두었던 자원을 남김없이 쏟아부어 지진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찰과 탐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바빠진 것은 김진우였다.
그는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존재, 베일에 싸인 공작을 패퇴시킨 인물이며 그 노른자위와도 같은 핵을 취한 승자였다.
지저의 이목이 대미궁에 집중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째이나이다.”
릭샤샤가 굳은 얼굴로 보고했다. 그녀는 언더 엘프를 이끄는 수장이자 도미니크가 사라진 대미궁의 실질적인 행정자로서 대미궁의 내외를 돌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번에는 또 어디의 누구던가.”
“동편에 위치한 미궁의 정찰대였나이다.”
근래 들어 대미궁 인근에 다른 미궁의 정찰대가 빈번하게 출몰하고 있었다. 덕분에 언더 엘프와 흡혈귀들이 바빠졌다.
그들은 염탐자들이 대미궁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필사적으로 교란시켰고 그 과정에서 빠르게 피로도가 누적되고 있었다.
“일단은 개미귀신을 이용해 저들의 접근을 최대한 막고 있으나, 언제까지 막을 수 있는지는 장담치 못하겠나이다.”
릭샤샤의 우려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9층과 맞닿은 중국 측의 지저는 심층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었고, 미궁 하나하나가 전부 공작급에 이르는 거대 세력이었다. 그들이 보낸 정찰대를 상대하기가 쉬울 리 없었다.
“어렵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조금만 더 부탁한다. 지금은 시간이 필요해.”
뤼양을 꺾으며 얻은 전리품은 결코 적지 않았다.
비록 오래도록 지저에 군림해온 세력은 아니었으나 그 기반은 생각 이상으로 탄탄했고,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죄악의 결정체’는 김진우가 생전 본 적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전리품을 수습하고 전력화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정 힘에 부치면 말하라. 개미귀신으로 부족한 전력은 내가 메꾸도록 하겠다.”
릭샤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보였고, 김진우는 않는 소리를 내뱉었다.
“끄응.”
저 우직한 언더 엘프의 수장은 결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설령 자신의 일족이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제 주인의 손을 빌리지 않고, 끝내는 맡은 바 소임을 해내고 말 것이다.
릭샤샤와 도미니크가 다른 것이 바로 이런 점들이었다. 미궁 전체를 하나의 유기물로 보고 적절하게 인력을 배치하는 도미니크와 다르게 릭샤샤는 지나치게 우직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무능하다거나 맡은 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유연함이 부족할 뿐이었다.
“릭샤샤.”
“말씀하소서.”
고개 숙인 릭샤샤의 어깨가 유달리 굳어 보였다.
“그대는 지금 잘하고 있어. 나가들이 없는 지금, 그대마저 없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거야.”
생각지도 못한 따뜻한 격려에 릭샤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 당치도 않나이다!”
“아니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난 그대가 자부심을 갖고 조금 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
저 우직한 언더 엘프의 창백한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는 것은 보기 드문 광경이었고, 그는 솔직한 감상 그대로 껄껄거리며 웃어 보였다.
릭샤샤는 그게 또 못내 감격스러우면서도 부끄러운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이제 슬슬 후보를 결정하실 생각인가요?”
릭샤샤가 떠난 자리에 언제 나타난 것인지 안젤라가 서 있었다. 그녀는 삐딱하게 벽에 기대고 서서는 능글맞은 얼굴로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뭔가 놀릴 거리를 찾는 듯했다.
“후보?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조강지처가 없는 지금이 적기 아니에요? 그녀라면 주인님이 원할 때 언제든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칠 텐데.”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가뜩이나 장난 심한 안젤라가 지상을 다녀온 뒤로 부쩍 더 능글맞아졌다. 어울리지 않게도 그녀는 드라마를 꽤나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아침 드라마를 특히 좋아했다.
조강지처란 말은 아마도 그녀가 열렬히 시청하던 아침 드라마에서 배웠으리라.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고 온 거라면, 그만 하지.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뤼양을 격퇴했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찬탈자의 명을 받은 공작들이 호시탐탐 대미궁을 노리고 있었고, 아직 대미궁은 최상의 전력을 갖추지 못했다. 연애 놀음을 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니요, 이럴 때일수록 더 후손을 생각하셔야 해요.”
하지만 안젤라의 생각은 그와 달랐던 모양이다. 느물거리던 그녀는 언제부터인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건 혈족. 지금부터라도 나중을 생각하셔야 뒤가 든든해지지 않겠어요?”
장난기가 쏙 빠진 진심 어린 조언, 김진우도 더는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왜들 그렇게 후손에 집착하지?”
“저야말로 주인님이 이해가 가지 않아요. 번식하고 후손을 남긴다.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요? 굳이 미궁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고, 섭리이자 순리예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흡혈귀가 순리를 말하는 것이 우스웠다. 하지만 그는 웃을 수 없었다. 안젤라가 전에 없이 날카롭게 질문을 던져왔던 탓이다.
“설마 주인님, 자신의 후손이 인간이 아닐까봐 두려우신 거예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도 아니면 주인님의 후손은 지저에 몸담지 않기를 바라는 건가요?”
이번에도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안젤라의 말이 전부 맞았던 탓이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요?”
그녀는 작정했는지 집요할 정도로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지상을 들락거리며 인간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 그녀의 질문은 꽤나 날카로웠고,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도 김진우의 내면을 완전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트라우마, 수많은 토굴꾼의 희생을 딛고 살아온 그는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지독할 정도로 인색했다.
그것이 자신을 위해 희생한 토굴꾼들에 대한 미안함인지, 그도 아니면 무언가가 결여된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차라리 결여에 가까울 정도로 행복하고 싶다는 욕구가 없었다.
“전부 다 맞는 이야기겠지.”
만약 예전이었다면 안젤라의 질문에 화가 났을 것이다. 속내를 낱낱이 까보이는 건 누구에게나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해져 있었다. 힘을 얻었고 힘에 걸맞는 정신을 갖추어가고 있다.
그는 화를 내는 대신 그녀의 말을 인정하고,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일까. 필요한 일을 사감에 얽매어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묘하게 핀트가 어긋났지만, 그는 처음으로 후손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하기 시작했다.
안젤라는 그런 그의 갈등을 읽었고, 자신감이 생겼는지 성큼 다가섰다.
“주인님이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모든 것을 바칠 여인이 이곳에 한가득이에요.”
고민에 잠긴 사이 진혈의 흡혈귀 특유의 새빨간 눈동자가 바로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녀의 유혹은 은근하지 않았다. 타고난 매력, 진혈에 이르러 한층 더 눈부셔진 미태를 마음껏 뽐냈다.
지상에서 공수한 블라우스의 단추를 몇 칸 풀어 보이고, 가슴골을 드러내며 몸을 붙여왔다.
우서의 물컹함과는 다르고, 침대의 푹신함과도 다르다. 처음으로 느껴본 여체의 뭉클함에 그는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바짝 주었다.
“음.”
오늘은 어쩐지 흡혈귀 특유의 비릿한 피내음조차 나지 않는 듯했다. 비릿한 향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여인 특유의 달콤한 향기, 그는 무의식중에 코를 벌름거리며 그 아찔한 매혹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갑자기 왜 이렇게 적극적이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상황, 그는 숨을 고르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반쪽짜리였던 예전과는 다르게 진혈을 얻은 지금이라면, 저도 주인님의 후손을 잉태할 수 있으니까요.”
과연, 그래서였던 것일까. 그녀의 유혹이 전에 없이 노골적이다 했더니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새하얀 손가락을 내밀어 그의 가슴께를 쓸어 만졌다.
“욕심부리지 않을게요. 저는 주인님이 얼마나 많은 여인을 취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아요. 질투는 못난 여자들이나 하는 거니까요.”
“건방지군.”
대미궁의 모든 것들의 생사여탈을 쥔 군주에게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광오했다. 애초에 그가 허락을 구해야 할 상대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이런 자신감이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흐음.”
생각이 바뀌자 태도도 바뀌었다. 당장 어떻게 할지 확신이 선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작은 변화만으로도 당장의 상황을 즐기기에는 충분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역시 사내였고, 안젤라는 여느 사내든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저를 취한다고 해서 바로 후손이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안젤라는 영악했고, 처음부터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후손의 문제는 뒤로하고 그의 경계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녀의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가 있는 듯 보였다.
조금 전부터 김진우의 숨결이 평소보다 훨씬 더 거칠어져 있었다.
“저를 취하세요. 다음 일은 나중에 생각하면 돼요.”
살아 있는 자를 유혹하는 치명적이고 달콤한 속삭임에 김진우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아.”
어디를 어떻게 한 것인지 안젤라가 신음도 탄성도 아닌 소리를 내뱉었다.
“그대는 너무 건방지다.”
유혹에 넘어가는 모양새를 해서야 군주의 체면이 살지 않는다. 그는 더없이 가느다란 그녀의 허리를 휘어잡아 바짝 끌어당겼다.
“그래서 싫으세요?”
안젤라는 두려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보기 좋게 눈가를 휘어 올리며 웃어보였을 뿐이다.
그는 그녀의 질문에 입을 놀리는 대신, 행동으로 대답해 보였다.
[안젤라의 권능이 발동했습니다.] [살아 있는 자를 유혹하는 독배, 그 치명적인 매혹의 주문이 몸을 옭아맵니다.]***
김진우는 멍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막 꿈에서 깨어난 듯 몽롱한 눈동자에 초점조차 잡히지 않았고, 헐벗은 몸 위로 울긋불긋한 얼룩이 한가득이었다.
그는 마치 십 일 밤낮 동안 격전을 치른 듯 무력하게 늘어진 채로 한참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곁으로 안젤라가 바짝 붙어 배 부른 고양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눈을 감은 그녀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행복해 보였다.
한참만에 고개를 돌려 아름다운 흡혈귀의 얼굴을 바라보던 김진우가 쓰게 중얼거렸다.
“졌군.”
첫 경험의 상대로 진혈의 흡혈귀는 지나칠 정도로 매력적이었고, 타고난 요부였다.
그는 무기력하다 싶을 정도로 그녀에게 농락당하고 말았다.
위대한 전승의 사령관이 처음으로 패배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