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44)
던전 견문록-244화(244/319)
# 244
던전 견문록
제 245 화
“권능까지 사용하는 건 반칙 아닌가?”
관계의 여운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나자, 김진우는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탐욕의 군주가 투정을 부리는 광경은 진귀하다면 진귀한 모습이었고, 안젤라는 노골적으로 상황을 즐기는 표정이었다.
“지저에 반칙이 어딨어요.”
그녀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도 큰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저항하고자 했다면, 흡혈귀의 권능 따위야 하이로드의 정신을 침범할 터럭만 한 여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흩뿌린 매혹의 향을 들이마시는 것으로 자신의 망설임을 없애려 했고, 그 효과는 꽤나 굉장했다. 덕분에 그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순수하게 안젤라와의 관계를 즐길 수 있었다.
“그나저나 도미니크가 화내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전혀 걱정되지 않는 얼굴로 그렇게 지껄여대는 안젤라의 얼굴은 차라리 즐거워 보였다. 말과는 달리 도미니크의 분노 따위는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와는 달리 김진우의 얼굴은 심각했다. 어쩐지 결혼하지도 않았는데 본처를 두고 바람이라도 핀 듯한 기분이었다.
“다리가 생겼을 때 꽤나 기뻐했었거든요.”
그의 심정을 모를 리 없는 안젤라는 꽤나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발견한 듯, 싱글벙글이었다.
***
깊은 관계를 맺었지만, 안젤라는 결코 선을 넘지 않았다. 그녀는 주인의 총애를 등에 업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지도, 그렇다고 해서 다른 소환수들을 눈 아래로 여기며 기고만장해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변함이 없었고 언제나와 같았다.
김진우 역시 첫 경험의 황홀함에 갑작스레 여색을 밝히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담담하게 깊어진 관계를 받아들였으며, 자신을 얽매고 있던 틀 하나를 벗은 것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녀가 아닌 다른 이들이었다.
“왕이시여.”
“왕이시여.”
대미궁의 외곽을 돌아다니는 안젤라의 권속들이 그를 보자 분분히 바닥에 엎드려 지극한 공경의 예를 표했다. 그것이 지난 전투에서 보인 하이로드의 위엄 때문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자연스러워 그는 무의식중에 안젤라를 돌아보았다.
“여왕의 남자라면 당연히 왕이라 불려야 마땅하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흡혈귀들끼리는 서로 알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안젤라는 차라리 이렇게라도 저들이 주인님을 알아 모시게 되었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며 히히덕거렸다.
***
“왜 이제야 말한 거지?”
김진우는 머리를 짚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왕의 휴식을 방해할까 저어되어 미처 보고하지 못했나이다.”
릭샤샤의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가 말하는 휴식이 안젤라와 보낸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게 너무나 빤했던 탓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는 금세 불편한 얼굴을 해보였다.
“벌하여주소서, 기꺼이 받겠나이다.”
그가 언짢은 기색을 보이자 릭샤샤가 바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굴종의 자세를 취했다.
“됐다, 그대를 탓하고자 말한 것이 아니다.”
저 맹목적일 정도로 충성스럽고 우직한 언더 엘프에게 화를 내는 건 못난 짓이었다. 그는 한숨과 함께 그녀에게 고개를 들라 말했다.
“그보다 사자의 정체는 파악이 됐나?”
“말이 통하지 않았으나, 생김생김을 보아 북쪽 방면에 위치한 공작급 미궁의 사자로 사료되나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탐색하듯 대미궁의 근방을 맴돌던 정찰대가 사라지더니, 돌연 사자가 방문한 것이다. 그는 릭샤샤의 대답에 잠시 생각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대미궁의 사방에 포진한 공작급 미궁은 각기 소환수들의 생김생김이 남달랐는데, 북쪽의 미궁이라면 개중에서도 소와 인간을 합친 듯한 모습을 한 이들이었다.
“방문 목적도 모르겠군.”
말이 통하지를 않으니, 그들이 갑작스레 대미궁을 찾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탐 내지 친교의 목적을 지닌 게 아닌가 생각되나이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비록 반편이라지만 당당한 공작 중 하나인 뤼양을 꺾은 미궁이 지척에 있으니, 한번 확인이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파견한 사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은 어디에 있지?”
“섣불리 자극할 생각은 없는지, 알아서 멀찍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이쪽의 전갈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혹시 이쪽의 전력을 얕볼까 염려되어 모리건을 비롯한 쟁쟁한 소환수들로 감시토록 했다니, 나름대로 현명한 대응이었다.
“좋아, 만나보도록 하지.”
속내가 무엇인지 아직 알 수는 없었지만, 굳이 손님을 자처하는 이들을 배척할 이유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
과연 보고 받은 대로 북쪽 미궁의 사자들은 반인반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화 속의 미노타우르스가 현실에 존재한다면 그들과 같을까. 떡 벌어진 어깨에 위맹한 뿔이 꽤나 강력해 보이는 소환수들이었다.
“저들에게 방문 목적을 물으라.”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대미궁을 나서기 전에 찾은 미미르가 통역관을 붙여준 것이다.
“이 아이를 데려가십시오. 굳이 당장 돌려보낼 필요는 없으니 적당히 쓸 곳을 찾아 마음껏 부리십시오.”
그렇게 얻은 통역관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이였다. 처음 미궁을 얻었을 때, 여동생의 결혼 자금을 갖고 도망쳤던 난쟁이. 언젠가 블랙 머천트의 경매장에서 재회했던 임프 소녀였다.
“만약을 대비해 이쪽 말고도 다른 쪽의 언어도 가르쳐 두었으니, 제법 쓸 만할 겁니다.”
승전을 축하한다며 그렇게 임프 소녀를 떠안기듯 맡긴 미미르는 조만간 연락을 주겠다며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을 암시했다.
자신감에 넘치는 표정을 보니 나쁜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속내를 시원하게 털어놓지 않는 음흉한 임프의 속내가 못내 신경 쓰였다.
“지저에 길이 남을 승리를 축하하고,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방문했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생김새와는 어울리지 않는 맑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런가. 축하에 감사한다 답하고, 관계야 그쪽에서 먼저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는 한 굳이 척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전하라.”
김진우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태도로 그들의 축하 인사를 받아주었다. 실로 오만한 모습이었으나 심층 공작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그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실제로 미노타우르스를 닮은 반인반마들은 혹시라도 그의 기분이 상할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느릿한 동작으로 자신들이 메고 온 상자를 열어 보이고는 시끄럽게 울어댔다.
“말로 나누는 친교는 의미가 없어, 나름대로 성의껏 선물을 준비해 왔답니다.”
“둔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제법 싹싹하군.”
이번에는 임프 소녀도 굳이 그의 말을 통역하지 않았다.
“이쪽은 준비한 것이 없으니, 일간 사자를 보내 답례하는 걸로 하지.”
친교가 목적이었다면 황소들은 나름대로 목적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들은 대화가 끝났음에도 좀처럼 떠날 생각을 않았다.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모양이군.”
그의 말에 임프 소녀가 황소들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다. 아마도 용건이 있다면 밝히라는 의미이리라.
“사실은 권유, 아니 부탁할 것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랍니다.”
“결국 저 선물이 그냥 주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군.”
김진우는 당장에라도 황소들이 건네준 선물 상자를 돌려보낼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들 역시 그러한 기미를 알아챘는지 양손을 휘저으며 황급히 변명했다.
“무리한 부탁은 아니고, 이쪽에도 도움이 되는 제안일 테니 들어보고 가부를 결정해달라 합니다. 설령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 해도 자신들은 이곳과 적대할 생각이 없답니다.”
이쯤 되니 김진우도 그들의 부탁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어차피 들어보고 거절하면 그만인지라 그는 그들의 용건을 물었다.
“남쪽 미궁의 사자가 방문하더라도 그들을 만나지 말라는데요? 혹시 만나게 되더라도 그들을 절대로 믿지 말라고.”
이번에는 말이 제법 길어지는 모양인지, 임프 소녀가 중간중간 통역을 해주었는데, 사자의 어투가 전에 없이 거칠기만 했다.
굳이 듣지 않아도 억센 발음과 격앙된 말투가 그 남쪽 미궁이라는 존재에 대해 욕이라도 퍼붓는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역시나 임프 소녀는 사자의 말 대부분을 잘라내고는 용건만 말해주었다.
***
북쪽 미궁의 사자, 스스로를 타루스라 칭한 황소들은 돌아갔다.
“공작쯤 되니 정치질도 이렇게 적극적인 건가.”
아무래도 지저가 합쳐지기 전에도 공작들간의 알력이 극심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적일지 아군일지 모를 대미궁을 찾아와 뜬금없이 다른 미궁의 험담을 할 리가 없었다. 짐작컨대 북쪽과 남쪽의 공작은 서로 앙숙일 게 분명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저들 사이에 저희가 끼어버린 모양새네요.”
안젤라가 복잡한 것은 질색이라며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다. 어차피 있어 봐야 지저의 정세를 판단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그녀가 아닌지라 김진우도 굳이 잡지 않았다.
남은 것은 릭샤샤와 모리건을 비롯한 고대의 영웅급 소환수들. 그는 그중에서도 모리건에게 물었다.
“모리건, 네가 보기엔 사티로스와 비교하여 저들이 어떻던가.”
“만약 같은 수라면 사티로스들은 저들을 절대 이기지 못할 겁니다.”
기다렸다는 듯한 대답, 수도 없는 전장을 전전한 까마귀의 평가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산 넘어 산이군. 만만한 놈이 하나도 없어.”
“그 만만치 않은 놈 중 하나를 거꾸러트린 게 주인님 아닙니까?”
모리건의 말에 소환수들이 자신감에 찬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며 웃어보였다. 그간 수많은 승리를 일궈온 자신들의 주인이 이룬 또 하나의 대승이 꽤나 자랑스러운 눈치였다.
“하나, 반편이었던 뤼양과는 다르게 저들은 진짜배기란 말이지.”
하지만 김진우는 수하들의 아부 아닌 아부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무력은 몰라도 미궁 자체의 전력으로만 보았을 때, 어느 쪽이 열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차피 타루스들이 갑작스레 태도를 바꿔 당장 대미궁을 향해 이를 드러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소 여유를 갖고 사태를 관망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쩌긴. 저들이 그리 욕하던 남쪽 미궁의 존재를 만나보고 결정해야겠지.”
***
타루스들이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남쪽 미궁의 사자가 대미궁을 찾았다.
“이건 뭐, 이쪽 지저는 차라리 동물원이라고 해도 좋겠군.”
사티로스들은 양과 독수리 인간을 합쳐놓은 모양이었고, 타루스들은 황소의 생김새에 가까웠다. 그리고 남쪽 미궁의 사자는 덩치가 무지막지한 백곰이었다.
그나마 차이점이 있다면 인간을 섞어놓은 듯했던 다른 미궁의 소환수들과는 다르게 이번 사자는 정말 백곰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용건을 물어야겠지?”
그 느긋한 태도에 다소 질린 얼굴을 해보이면서도 임프 소녀는 자신의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다.
지저의 어둠과는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털을 두른 백곰들은 처음부터 꽤나 격앙된 어조로 떠들어댔다.
“뭔가 문제가 있나?”
그런데 잠깐 말을 주고받던 임프 소녀의 표정이 금세 돌변한 것이 아무래도 뭔가 심각한 이야기라도 들은 듯했다.
그의 말에 임프 소녀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