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45)
던전 견문록-245화(245/319)
# 245
던전 견문록
제 246 화
임프 소녀의 통역을 기다렸지만, 정작 먼저 들려온 것은 여린 음성이 아니라 깊은 동굴에서 흘러나오듯 웅웅대는 굵직한 목소리였다.
“반갑소, 전승의 사령관이여.”
김진우는 순간 멍한 얼굴을 해보이고 말았다. 놀랍게도 백곰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꽤나 듣기 좋은 억양의 한국어였다.
“전부터 그 명성을 익히 들었던 바,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다오.”
비록 심하게 울려대는 통에 알아듣기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제법 유창한 어휘였다.
“우리말을 할 줄 아는군?”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그가 얼떨떨하게 대꾸하니, 백곰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우리 우르수스는 힘만 세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타루스들과는 다르오. 우릴 아는 자들은 우리를 가리켜 지저의 현자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소. 그런 우리가 언어 몇 가지하는 게 그리 놀랄 일은 아니라오.”
꽤나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런가.”
거대한 백곰이 우쭐대듯 턱을 치켜올린 모습은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이었다.
“그러니 그대는 본인이 유창하게 말한다 해서 너무 놀라지 마오.”
사실은 곰이 말한다는 것 자체가 적응하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그는 구태여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말하는 곰보다 더욱 기괴한 경험은 수도 없이 했다. 이제 와서 우르수스라 자신을 소개한 곰의 언변에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거대한 주둥이를 덜컥거리며 떠들어대는 백곰의 모습은 도무지 적응될 것 같지 않았다.
“흐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백곰에 대한 감상을 털어낸 김진우는 왠지 모르게 안절부절 못하고 발을 동동 굴러대는 임프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쩐지 백곰과 그가 대화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임프의 작은 머리통 속을 들여다보려는 건 어리석은 일이오. 그들은 그 작은 머리통 속에 놀라울 정도로 사악하고 교활한 꾀를 담고 있으니까.”
백곰의 말에 임프 소녀가 발끈해 앞으로 나서려다 그의 표정을 발견하고는 도로 뒷걸음질을 쳤다.
“나에게 뭔가 숨기는 게 있군.”
조금 전부터 임프 소녀를 살펴보고 있던 김진우는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설명하라. 만약 나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그대도, 그대의 주인도 절대 무사치 못할 것이다.”
그는 석연치 않은 임프 소녀의 반응과 백곰의 태도를 보며 둘 사이에 뭔가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어떤 변명과 거짓조차 용납하지 않는 서슬 퍼런 기세로 임프 소녀를 압박했다.
강대한 지저의 지배자들조차도 견뎌내지 못했던 하이로드의 기운이다. 한낱 임프 따위가 그의 기세를 받아넘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임프 소녀는 목이라도 졸린 듯 창백한 안색으로 설명해 주었다.
“우르수스는 저희 블랙 머천트에서 포섭한 세력 중 하나예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왕께서는 블랙 머천트에게 확답을 주지 않으셨소.”
임프 소녀의 말을 백곰이 정정해 주었다.
“하지만 그대가 저 겁 모르고 설쳐대던 사티로스를 꺾은 덕에 왕께서도 결정을 내리셨소.”
백곰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멋들어지게 웃어 보였다.
“우리 우르수스 일족은 전승의 사령관, 나가의 왕께 정식으로 동맹을 요청하는 바요.”
***
우르수스 일족과의 동맹은 손해 볼 것이 없었기에 당연하게도 김진우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먼저 대미궁을 찾아왔던 타루스들을 함께 도모하자는 밀약을 맺었으나, 당장에 군대를 일으켜 자신들을 도울 필요는 없다 말했다.
“지금은 멍청한 타루스들의 제안을 거절하지 말고, 시간을 끄는 것으로 충분하다오. 그들이 헛된 꿈을 꾸는 동안 우리는 착실하게 현실을 바로 볼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백곰들은 몹시 만족하여 돌아갔으며, 조만간 다시 찾아올 것을 기약했다.
“자, 이제 남은 이야기를 해볼까.”
멀어져 가는 백곰들의 뒷태를 바라보던 김진우가 표정을 달리 하며 임프 소녀를 돌아보았다.
***
“찬탈자의 마수는 뻗어오지, 군주님께서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으셨지, 제 입장에서는 얼마나 걱정이 되겠습니까요.”
어떻게 알았는지 우르수스가 떠나기가 무섭게 나타난 미미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자신이 평소 얼마나 주인을 끔찍이 챙기는지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르수스들과 연이 닿은 건 그야말로 천운이었습죠. 그들은 지저에서는 보기 드물게 온건하며, 약속을 잘 지키는 족속이거든요.”
어찌나 그의 눈치를 살피는지 데룩데룩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어지간한 이라면 그 노력이 가상하여 모른 척 넘어가 줄만도 할 광경, 하지만 김진우는 냉담하기만 했다.
“그대는 아직 나를 납득시킬 만한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거야 그들과 밀약을 맺을 때…….”
“지저의 신비에 걸고 맹세했다는 말로 넘어갈 생각은 말도록.”
밀약의 주체가 블랙 머천트였다면 모를까, 우르수스는 정확하게 전승의 사령관을 지목했다.
“내 이름을 판 이상,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 말에 미미르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우르수스 일족 외에 그대와 밀약을 맺은 공작의 이름을 말하라.”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을 듯 단호한 태도에 결국 미미르가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을 해보였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살기를 거두어주십시오. 이 미천한 임프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습니다요.”
“내가 살기를 거두고 말고는 그대의 대답 여하에 달려 있다.”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을 하고서도 미미르는 한참을 망설였다. 하지만 달리 빠져나갈 방도를 찾지 못했는지 결국은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말았다.
“아눌락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하기야 하이로드의 진명만큼이나 알기 어려운 것이 공작급 귀족들의 진명이었으니 그의 귀에 생소하게 들리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온몸이 굳고 말았다.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의 또 다른 이름, 절대적인 맹독의 군주이자.”
미미르는 그런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십삽만일천육백이십일 지옥 거미의 지배자.”
그를 비참하게 부리던 괴수의 이름이 미미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군주님께서 태어나신 지옥 거미 둥지의 왕, 아눌락스가 군주님의 또 다른 동맹입니다.”
말을 마친 미미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자신의 주인과 거미 공작이 어떤 악연으로 묶여 있는지를 알고 있었던 미미르니만큼 차마 눈을 뜨고 주인의 표정을 살필 용기가 나지 않은 것이다.
“아눌락스라…….”
한참 만에 침묵을 깨고 김진우가 씹어뱉듯 거미 공작의 이름을 내뱉었다.
“아눌락스…….”
몇 번이고 반복해 끄집어내도 희석되지 않은 증오와 분노가 찐득하게 그의 음성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런 이름을 갖고 있었군.”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미미르가 움찔 눈을 떴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김진우의 표정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미르는 그 어느 때보다 더한 공포를 느껴야 했다.
***
미미르는 돌아갔다. 홀로 남은 김진우는 몇 번이고 반복해 아눌락스의 이름을 되뇌었다.
“거미 공작, 아눌락스. 맹독의 군주, 아눌락스.”
미미르가 왜 끝까지 동맹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려 했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나가의 미궁을 처음 떠안았을 때부터 곁에서 자신을 지켜봐온 미미르는 진즉부터 거미 공작과 자신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쉽사리 원수와 한 깃발 아래 서게 됐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으리라.
어쩌면 미미르는 어렵사리 성사시킨 동맹을 그가 파탄 낼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만큼 거미 공작에 대한 그의 증오는 컸고, 원한은 깊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는 원수의 이름에 이성을 잃는 대신, 그 어느 때보다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스스로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지금이라면 웃는 낯으로 거미 공작의 얼굴을 대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기분. 물론 그 미소는 결코 살갑지도 친절하지도 않을 것이다.
“벌써 이만큼이나 가까워졌군.”
이름조차 알 길이 없었던, 까마득히 높은 곳에 위치했던 원수가 어느새 성큼 눈앞에 다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다.
그는 그 사실이 더없이 기꺼웠고, 그래서 웃고 말았다.
“이번에는 얄궂게도 같은 편이 되었군.”
가능하다면 최대한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파멸시킨다. 그보다 멋진 복수가 어디 있겠는가. 한참을 웃어대던 그가 별안간 정색했다.
“하지만 그들의 피 값을 잊지는 않으리라.”
자신을 살리기 위해 비참하게 죽어가야만 했던 수많은 토굴꾼과, 어둠 속에서 덧없이 버려진 자신의 평생을 떠올리며 그가 사납게 눈을 번뜩였다.
***
뻔뻔하고 넉살 좋은 미미르도 이번 일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는지, 답지 않게 선물을 보내며 아양을 떨었다.
당연하게도 김진우는 그 모든 것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나가들의 공백을 메우는 데 사용했다.
“원하는 것이 있으시면, 구해오도록 하겠습니다.”
미미르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비굴한 얼굴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드문 일이군, 그대가 이토록이나 선심을 쓰다니.”
나름대로 나가의 미궁이 이만큼 성장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미미르와 블랙 머천트에게 하는 말 치고는 지나치게 뻔뻔했지만, 작은 임프는 그 어떤 불만도 표할 수 없었다.
“아이쿠, 애초부터 군주님의 것인데, 저야 그저 물건을 맡아두었을 뿐 아니었겠습니까?”
오히려 간사하게 웃으며 양손을 비벼대는 미미르는 천만의 말이라며 펄쩍 뛰어 보였다. 그런 미미르를 흡족하게 바라보던 김진우가 슬쩍 말을 꺼냈다.
“더 바라는 건 없는데, 하나 물어볼 게 있긴 하지.”
차라리 가장 아끼는 보물을 꺼내 달라 했어도 이만큼 겁에 질린 얼굴을 하진 않았으리라. 헤실거리던 미미르의 얼굴이 바짝 굳어버렸다.
하기야 질문에 답한 대가로 지금 이 꼴이 되었으니, 그의 말에 겁부터 집어먹는 게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뭘 또 물어보시려고…….”
간신히 표정을 수습한 미미르가 눈알을 굴려댔다.
“뭐 대단한 건 아니니 그렇게 벌써부터 바짝 얼어 있을 건 없어.”
그렇게 말한 김진우가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 그건…….”
미미르는 그가 꺼내 든 작은 물건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 어떻게 그걸 군주님이… 분명 그놈은 영원의 창고 안에 있었을 텐데.”
“위선의 가면이라고 불리는 놈인데, 당최 어디에 쓰는 놈인지 알 수가 없더군.”
떨리는 음성을 단번에 잘라낸 김진우가 손안의 가면을 보란 듯이 흔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