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47)
던전 견문록-247화(247/319)
# 247
던전 견문록
제 248 화
하이로드가 사용하던 물건, 당사자의 이명을 이어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위선자의 가면은 가치가 무궁무진했다.
당장 외눈박이 군주가 사용하던 궁니르만 해도 그 위력과 효용이 남달랐으니, 모르긴 몰라도 위선자의 가면 역시 그에 못지않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김진우의 입장에서 위선자의 가면은 용도도 불명의 애물단지였을 뿐이다. 어쩌면 음흉한 하이로드의 영혼이 새로운 육신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이 위험천만한 아이템은 매력보단 꺼림칙한 면이 컸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별 이견 없이 미미르의 말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손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큭.”
머리로는 수도 없이 어서 가면을 넘겨주라 되뇌었지만, 정작 자신의 손은 의지를 벗어나 가면을 꼭 움켜쥔 채 놓아주지를 않았다.
“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모양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눈만 꿈벅거리던 미미르가 뒤늦게 눈치채고는 기겁했다.
“어서! 어서 놓으십시오!”
“하지 않는 게 아니야!”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노력해 보았지만 가면은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손만 따로 노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손을 잘라내는 것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기이할 정도로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를 한 미미르는 당장에라도 그의 팔을 베어낼 것 같았다. 그는 사납게 으르렁대며 미미르를 쏘아보았다.
“끄응, 아무래도 저희가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곁에서 끙끙대며 머리를 싸매고 있던 미미르도 결국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가면이 벌써 새로운 주인을 정한 모양입니다.”
***
그 뒤로도 미미르는 몇 번이나 팔을 잘라내는 것이 어떻겠냐며 김진우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꺼림칙한 가면의 주인이 되는 것도 싫지만, 한 팔을 잘라내는 것은 더욱 더 사양하고 싶었다.
“육신을 강탈당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미미르가 얼마나 열심히 설득을 했는지, 하마터면 그러마하고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이성을 찾은 그는 미미르의 말을 단박에 거절했다.
“아직 이 가면이 정말로 그대가 생각하는 그런 불길한 물건인지 알 수 없지 않은가.”
“지금의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무려 하이로드씩이나 되는 존재의 육신을, 비록 팔 한 짝, 일부나마 강제할 수 있는 물건이 과연 평범한 물건일 리가 없지요.”
“그대는 내 팔을 정말 잘라내야 직성이 풀릴 모양이군.”
오만상을 쓴 채 매섭게 쏘아붙이자, 미미르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이라고 작게 대답했다.
“제길, 이놈이나 저놈이나 어지간히 이 몸을 탐내는군.”
그의 몸에 둥지를 틀려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음.”
스스로의 육신을 노리던 수많은 존재를 떠올리던 그는 문득 개중에 단 하나 육신에 기생하는 데 성공한 존재에 생각이 미쳤다.
기생마. 비록 필요에 의해서라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질적인 무언가를 제 몸에 받아들인 존재였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공교롭게도 가면을 쥔 채 부들거리는 손은 기생마가 터를 잡은 오른손이었다.
“설마…….”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만약 정말로 가면이 자신을 주인으로 선택했다면,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군주님, 부디 작은 것을 잃지 않으려다 큰 것을 잃는 우를 범하지 마소서.”
“잠깐.”
끈질기게 들러붙는 미미르의 말을 잘라낸 김진우가 뭔가를 시도하듯 오른팔을 이리저리 휘적대 보았다.
“그대의 생각이 틀린 모양이다.”
“아직도 기대가 남으신 겁니까? 군주님의 육신 일부를 강제했다는 것 자체가 가면의 원주인이 무슨 의도로 이런 불길한 것을 남긴 것인지 알 수 있는…….”
“아니. 가면에게 잠식당한 건 내 손이 아니다.”
뜬금없는 말에 미미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그게 무슨…….”
“가면에 넘어간 건…….”
김진우가 그런 미미르를 보며 오른손을 불쑥 들어 보였다.
“내 오른팔이 아니라 기생마다.”
그의 추측을 확신이라도 시켜주듯 한 발 늦게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아무리 기운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해도 하이로드가 애용하던 물건에 남은 힘의 잔재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일개 기생수에서 기생마로 진화하며 종의 한계를 어느 정도 뛰어넘은 기생마지만, 이 강렬한 유혹을 견딜 수는 없었습니다.] [기생마는 처음으로 주인의 의지를 거슬렀습니다. 그만큼 위선자의 가면에 대한 기생마의 욕심은 컸습니다.]***
영원의 창고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위선자의 가면은 언제 그렇게 버텼냐는 듯이 다시 품으로 돌아갔다.
마치 더는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아니, 안심한 건 기생마 쪽인가.”
그저 추측에 불과하지만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어쨌건 간에 또 골치 아픈 놈을 떠안았군.”
홀린 것이 기생마든 자신이든 가면이 자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군주님, 절대로 그의 흔적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시궁창에 처박은 그 간악한 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기물을 남긴 것인지, 저는 두렵습니다.”
미미르는 차라리 절박해 보일 정도로 몇 번이나 거듭 당부했다.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그자의 흔적이 하필이면 지금 군주님의 손에 쥐어진 것도 공교로운데 하필 영원의 창고라니요.”
놀랍게도 미미르는 자신의 전 주인이던 외눈박이 군주의 의도마저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도 전부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지저를 위하던 블랙 머천트의 암상인, 그 모습이 결코 일부러 꾸며낸 것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작은 임프는 전 주인에 대한 충정과 의리보다는 지저에 또다시 이변이 일어날까 걱정이 큰 눈치였다.
“이 영원의 창고란 성질 고약한 괴물이 무슨 변덕을 부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쪽은 제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 말 명심하시고 혹시라도 가면을 시험해 볼 생각일랑은 마십시오.”
더없이 간절하고 간절했던 미미르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린 그가 혼잣말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걱정하지 마라. 나 또한 뭣 모르고 놀아날 생각은 없으니.”
비록 위선자의 가면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지만, 그는 이번 일을 통해서 그간 미심쩍었던 메시지 창의 태도 변화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다.
기생마의 존재를 떠올리지 못한 채, 메시지 창이 조금만 더 늦게 떠올랐다면 상황이 어찌 흘러갔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는 하이로드였고 공작 뤼양을 꺾으며 자신감이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렇게 고양된 자신감은 그의 판단력을 흐렸으리라.
탐욕. 그 어떤 것보다 우선했던 자신의 권능이 가면에 담긴 불길함마저 먹어치울 거라 과신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쯤 되면 이제껏 신비라는 이름을 빌어 자신을 밀어주던 메시지 창이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위선자의 가면이라는 불길한 물건을 이리도 강권할 리가 없었으니까.
“이렇게 자꾸 나를 쥐고 흔들려는 것은.”
지저 전반을 아우르는 메시지 창마저 자신에게 등을 돌렸지만, 그는 지금에 와서는 차라리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저리를 맴돌던 자신 스스로가 지저의 중심에 성큼 다가섰다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실감이 났던 탓이다.
“그만큼 그대들이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김진우는 대미궁 한구석에 자리 잡은 어둠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강렬한 의지를 담은 속삭임, 어둠이 마치 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고오오, 하고 울었다.
***
위선자의 가면, 그 원주인과 지저에 숨겨져 있던 비사를 들었던 그날 이후로 9층 지저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지진의 피해를 복구하느라 웅크리고 있던 북쪽과 남쪽, 동쪽의 미궁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우르수스들과 타루스들이 연일 서로를 공격했으며, 그간 단 한 번도 미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동쪽 미궁의 소환수들 역시 슬금거리며 대미궁 인근까지 진출했다.
“아주 개판이구만.”
그 모든 보고를 들은 김진우는 솔직하게 감상을 털어 놓았다.
공작들이 얼마나 호전적이며 얼마나 쉬지 않고 전쟁을 벌이는지, 토굴꾼이었던 그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르수스와 타루스의 전쟁은 과한 면이 있었다.
그들은 어부지리를 노리는 또 다른 미궁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며,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낼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사티로스들을 먼저 처리한 게 득이 되었어요. 저 무식한 백곰과 황소들도 눈치를 보느라 대미궁의 인근에서 만큼은 전투를 자제하는 분위기니까요.”
안젤라의 말에 김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로선 내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지 부담되겠지.”
이미 우르수스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지저의 약속이란 으레 그렇듯이 언제 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스스로를 현자라 칭했던 백곰들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또한 우르수스와의 동맹 사실을 모르는 타루스들은 어떻게든 그를 이 난잡한 전쟁 통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양측의 사자가 벌써 몇 번씩이나 대미궁을 다녀갔으며, 우르수스들은 그의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또 타루스들은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무려 심층의 공작이나 되는 존재가 이리 몸을 낮추고 처세를 하니, 그 포악함과 강대함을 익히 알고 있었던 김진우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누리고만 있을 수는 없겠지.”
공작들의 전쟁이 과열되고 있었다. 지저가 좁다 뛰어다니는 백곰과 황소의 수가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었으며, 그들이 흘린 피 내음은 점점 짙어지기만 했다.
치솟은 투기와 살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피어오르는 군기가 곧 큰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려주었다.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실 건가요?”
“우르수스와의 동맹을 알면서도 엉뚱한 소리를 하는군.”
안젤라는 주인의 핀잔에도 굴하지 않았다.
“말뿐인 약속이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설마 내가 저들과의 약속을 어길 거라 생각하는 건가.”
미미르는 말했다. 백곰들이 지저에 보기 드물게 온건하며 신의가 있는 종족이라며 그들과의 연계를 강권했다.
“그건 알 수 없죠. 주인님 속을 누가 알겠어요.”
안젤라는 활짝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녀는 차라리 그가 약속을 어기기를 기대라도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어차피 누구의 손을 들어주든 마지막에 웃는 건 주인님 혼자 아니에요?”
그녀는 자신의 욕심 많은 주인님이 결코 공작들과의 공존을 선택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공작들이 자신의 주인을 당해내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그녀는 전쟁의 향방보다는 그가 어떻게 나올지를 더 기대하는 듯했다.
마침 그녀의 호기심을 채워주기라도 할 것처럼 전쟁이 심화되었다. 수천의 백곰과 황소가 대미궁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공터에서 대치했다.
그리고 두 종족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사자를 보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