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48)
던전 견문록-248화(248/319)
# 248
던전 견문록
제 249 화
88. 양다리
“이거야 원…….”
서로를 노려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타루스와 우르수스를 본 김진우는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들이 하는 양이 제 편 들어달라 칭얼거리는 어린애와 다름없어서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웃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 상황이 우습기만 하다지만, 무려 심층의 공작들이 치르는 전쟁이다. 피가 튀고 살이 튀는, 결과에 따라 수만의 소환수가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찢겨져 나갈 전쟁이 바로 코앞에 닥쳐 있었다.
그 끔찍한 전쟁의 주최가 바로 저들이었다. 지금 보이는 모습이 유치하고 우습다 해서 저들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만약을 대비해 배치한 흡혈귀를 비롯한 병력은 그들의 광폭한 기세에 잔뜩 짓눌려 바싹 굳어 있었다.
“이걸 어쩐다.”
빤히 저들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진우는 모르는 척 능청을 떨었다. 그럴수록 애가 닳는 것은 양측의 사자들이었다.
그나마 밀약이 있던 우르수스 쪽은 비교적 여유가 있어 보였지만, 타루스 쪽은 안절부절 못하며 어떻게든 그에게 확답을 받고 싶어 했다.
“만약 자신들을 돕지 못하겠다면 최소한 이번 전쟁에 손을 보태지 않기를 바란답니다.”
그날 이후로도 여전히 대미궁을 떠나지 않은 임프 소녀가 백곰들의 눈치를 살피며 타루스들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내 미궁 앞마당에서 그렇게 소란을 떨어대는데, 가만있는 것도 웃기지 않나?”
초기까지만 해도 제법 멀찍한 곳에서 전투를 하던 두 미궁이 근래 들어서는 대미궁의 인근까지 진출해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피 내음이 맡아질 지경이었다.
북쪽과 남쪽의 미궁이 전쟁을 하는데, 하필이면 대미궁이 그 중심에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한답니다. 하지만 백곰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그들을 피해 다른 곳을 전장으로 삼을 수도 없다고 하네요.”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 그대들이야말로 지저가 좁다 날뛰어대는 망나니가 아닌가!”
온건한 백곰답지 않게 사나운 포효. 그대로 두었다간 한참이나 서로를 헐뜯으며 날을 세울 것 같은 상황이다.
이미 그들의 대거리질을 한참이나 지켜봐야 했던 김진우인지라 금세 짜증이 난 얼굴로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어차피 그대들이 설쳐대는 곳이 본 미궁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인지라 사실상 그대들의 만행을 모른 척 눈감아 주기도 뭐한 입장이다.”
꽤나 오만하고 고압적인 태도였지만 양측의 사자는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하기야 총력을 다해도 모자랄 상황이니, 근래 급부상했던 사티로스를 거꾸러트린 강자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그대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도록 하지.”
김진우는 생각했다. 공작과 공작, 두 미궁의 전력은 아마도 호각지세일 것이다.
꽤나 오랫동안 대립해 왔을 게 분명한 타루스와 우르수스 일족은 아직도 결판을 내지 못하고 있었고, 아마도 이번 전쟁 역시 그렇게 쭉 이어져 온 많고 많았던 충돌 중 하나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그렇게 전쟁이 끝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한쪽이 크게 승리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뤼양의 힘을 흡수하며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스스로를 돌이켜 보건대 저 중 승자가 나온다면 꽤나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급부상한 미궁이 대미궁의 인근에 남아 있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제안했다.
“마침 이곳에서 제법 떨어진 곳, 그대들의 미궁이 위치한 북쪽과 남쪽의 중간 즈음에 적당한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승부를 보는 게 어떻겠는가.”
마치 참관인이라도 되는 양, 또는 중재자라도 되는 양 듣기에 따라 광오하고 오만하게도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타루스와 우르수스들은 군말하지 않고 그의 제안을 따랐다. 그렇지 않아도 사티로스들을 꺾은 강자의 앞마당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런 차에 마음껏 싸울 수 있는 전장을 마련해 준다니, 그들은 차라리 반가운 기색을 해보였다.
그 뒤로는 개별적인 면담이 이루어졌다. 양측의 사자들은 지원을 요청하며 많은 보상을 약속했다.
우르수스는 전리품 전체를 공평하게 나누고 차후에도 긴밀한 협조를 유지할 것을 제안했고, 타루스는 당장 자신들이 지닌 다운 잼과 각종 보물을 넘겨줄 것을 약속했다.
어느 쪽이든 손해가 되는 조건은 아니었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무려 공작씩이나 되는 이들의 제안으로는 꽤나 파격적인 것이었다.
자존심이고 물질적인 손해고, 상대 미궁을 꺾을 수만 있다면 다른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김진우는 그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그들의 제안을 기꺼워했다.
“흠, 모르겠네요.”
사자들이 모두 돌아간 뒤 안젤라가 말을 걸어왔다.
“뭐를 모른다는 거지?”
“주인님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그녀가 혼란스러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실제 그는 양측의 사자 모두에게 긍정적인 답을 주었으니까.
“글쎄.”
“타루스들이 제시한 조건은 당장 부족한 미궁의 재정을 충당하기에 꽤나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하지만 우르수스들의 제안 역시 매력적인 건 마찬가지죠. 언제나 가장 큰 대박은 승패가 정해진 전장에서 약탈하면서 얻는 법이니까요. 어느 쪽을 돕든 저희는 손해 볼 게 없어요.”
그녀는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았다. 김진우는 그런 그녀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뿐이다.
“아, 답답해서 못 견디겠어요.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주시면 안 돼요?”
이런저런 추측을 늘어놓던 안젤라가 결국은 답답한 속내를 비췄다.
“안젤라, 비록 지금 저 둘이 내 눈치를 보고는 있지만, 정말 나의 위세를 인정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일례로 저들은 그저 사자를 보냈을 뿐, 그 주인이란 작자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지.”
만약 저들이 대미궁을 정말 강대한 상대라 인정했다면, 공작들이 직접 설득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사자를 보내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저들은 이번 전쟁만 이기면 나 같은 건 언제든 찍어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우르수스들은 블랙 머천트와 이미 밀약이 된 상태 아닌가요? 꽤나 믿을 만한 자들이라고…….”
김진우는 안젤라의 말에 웃었다.
“밀약이라. 그리고 믿을 만한 존재라고? 답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군.”
지저에서 믿음만큼 부질없는 단어가 있을까. 명예와 신의를 중시했다던 고대의 지저는 이미 멸망했고, 남은 것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맹수가 가득한 지저뿐이었다.
그리고 두 공작은 그 맹수 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선 포식자들이었다. 사냥감의 내장과 고기로 배를 채운 두 포식자가 언제까지 부른 배만 두들기고 있을까.
김진우가 아는 공작은 결코 만족을 모르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금세 밀약 따위는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새로운 사냥감을 향해 이를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대미궁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리라.
대미궁의 소환수들은 백곰과 황소들을 당해내지 못할 테고,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두 공작은 정신 나간 뤼양처럼 쉽사리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 전황을 타개하는 비책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아예 그런 상황을 원천봉쇄할 생각이었다.
“어떻게…….”
안젤라는 여전히 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간단해.”
김진우는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승자고 패자고 전부 너덜너덜하게 만들면 돼.”
두 맹수는 서로의 급소를 물어뜯느라 최후의 최후까지 눈을 돌리지 못할 것이다.
사냥꾼이 그물을 들고, 창을 꼬나 쥐고 다가서는 그 순간까지 서로의 목줄기를 물어뜯은 주둥이를 돌리지 못할 것이다.
틈을 보였다간 제 목줄기에 박힌 송곳니가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낼 테니까.
“그래서 난 전쟁을 더 크게 키울 생각이야.”
그는 미리 생각해둔 것이 있는지, 자신감에 찬 웃음을 지어 보였다.
***
“그게 무슨…….”
“현명한 우르수스 일족의 사자여. 한번 생각을 해보아라.”
우르수스의 사자는 거대한 주둥이를 덜그럭거리며 당혹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어차피 한 번의 전투로는 승패가 갈리지 않을 터, 승리 하나를 더한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그대들의 지리한 전쟁은 끝나지 않을 텐데.”
장황한 설명에 백곰이 눈을 굴려댔다.
아무리 지진 이후로 지저가 넓어졌다고 해도 저 거대한 괴수가 수만씩 들러붙어 싸울 전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전쟁에서 승리한다 해도 적의 병력을 다소 소모시킬 뿐이었다. 게다가 수장이 건재한 이상, 저 부유한 공작들은 언제든 부족한 소환수를 보충해 다시 전장으로 내몰 것이다.
끝나지 않는 전쟁, 그게 우르수스와 타루스들이 이제껏 길고 긴 전쟁을 멈추지 못했던 이유였다.
“그럴 바에야 제대로 한번 크게 판을 키워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아무리 다운 잼이 썩어나는 공작급 미궁이라도 절대로 복구할 수 없는 피해라는 게 있다.
그리고 김진우는 타루스의 병력을 대거 끌어내 몰살시킬 계획을 털어 놓았다.
“그러니 나는 초반에 타루스의 편을 드는 시늉을 해보이겠다. 그들이 우군을 얻고 기고만장해 있을 때, 그대들은 타루스들에게 거짓 패배를 선물해 주어라.”
승리에 도취된 타루스들이 더 큰 승리에 목말라 할 때, 그때야말로 긴 전쟁이 결판이 날 것이다.
“그들이 여세를 몰아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고 할 때, 나는 다시 그대들의 편에 서리라.”
우르수스는 바로 확답을 주지 않았다.
전쟁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할 테지만, 타루스들이 총 공세를 작정할 정도로 열세를 보이려면 얼마나 많은 피해를 감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탓이다.
자신의 주인을 만나고 돌아온 우르수스의 사자는 결국 그의 제안을 따르겠노라 대답했다.
“부디 그대가 한때의 호기에 편승하는 승냥이가 아니기를 바라겠소.”
일족의 피를 전제로 한 그의 계획이 영 고까웠는지 우르수스의 표정은 곱지 않았다.
우르수스의 사자들과 담판을 지은 김진우는 타루스들과도 밀약을 맺었다. 백곰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처음부터 전력으로 타루스들을 도울 것이라 말해 주었을 뿐이다.
타루스들은 몹시 만족한 얼굴로 약속했던 다운 잼과 귀물들을 보내주었고, 김진우는 웃는 낯으로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게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전장은 대미궁에서 제법 멀찍이 떨어진 곳에 마련되었다. 지난 지진 이후로 생겨난 공터 중에서도 가장 큰 공터였기에 거대한 크리쳐들이 대규모로 치고받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이 정도면 그대들도 불만은 없겠지?”
김진우의 말에 우르수스와 타루스들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강대한 미궁 인근에서 전투를 벌이기에는 걸리는 것이 많았으리라.
“그럼 언제든 마음 내킬 때 시작하라고.”
그의 천연덕스러운 한마디에 황소와 백곰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왔다.
“와, 이게 말로만 듣던 양다리인가요. 주인님, 완전 나쁜 남자네요. 나중에 자신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얼마나 상실감이 클까요.”
드라마에서 주워들은 것인지, 되도 않을 소리를 지껄여대는 안젤라를 보며 김진우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양다리는 아니지. 난 애초에 저 둘과 사귄 적이 없으니까.”
뻔뻔하기만 한 대답에 안젤라가 황홀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주인이 준비한 축제가 몹시도 기대되는 눈치였다.
하기야, 그녀는 흡혈귀. 피가 난무하는 축제야말로 황홀한 파티나 다름이 없으리라.
“슬슬 시작하려는 모양이군.
각기 5천에 달하는 백곰과 황소들이 포효하며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