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49)
던전 견문록-249화(249/319)
# 249
던전 견문록
제 250 화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타루스들이었다.
“끄워어어어어.”
걸쭉하게 울부짖으며 쾅, 쾅, 발을 구른 타루스들이 일제히 돌격을 시작했다.
탐색전이고 뭐고 염두에도 두지 않는 그 무질서한 돌격은 지독할 정도로 저돌적이었다.
하지만 이에 맞서는 우르수스들의 기세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타루스와는 달리 대열을 갖춘 채, 한발 한발 내딛으며 나아갔다. 수천의 백곰이 발을 맞추어 전진하는 모습은, 타루스들의 광폭한 돌격과는 달랐지만 그에 못지않은 단단한 군기가 있었다.
“쿠오오오오오.”
백곰들이 포효하며 기세를 끌어올리고, 그 사이 지척까지 도달한 타루스의 선봉이 우르수스의 선봉과 충돌했다.
“크아아악!”
비명과 포효, 그리고 그 사나운 울부짖음으로 가릴 수 없는 섬뜩한 파육음이 온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이건 정말이지…….”
수천 대 수천, 무려 공작급 미궁의 괴수들이 맞부딪치는 모습을 본 안젤라가 황당한 얼굴을 해보였다.
“무식하군요.”
그녀는 그 어떤 말로도 포장할 수 없는 그 과격한 전투에 대한 솔직한 감상을 내놓았다.
“진짜 너 죽고 나 죽자. 이거 아닌가요?”
그녀의 말마따나 타루스와 우르수스들의 전쟁은 그 어떠한 전략도 속임수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힘의 격돌에 가까웠다.
조금은 기상천외한 전투를 기대했던 그녀인지라 차라리 실망하는 기색마저 보일 정도였다.
“이런 식이라면 백작들의 지휘력이 차라리 나아 보일 지경이에요.”
신속 기동을 무기로 삼는 철혈의 아나톨리우스는 기습과 적진 돌파의 달인이었고, 절망의 파르테논은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어 스스로 자멸하도록 만드는 데 능통했다.
악몽의 디나리온과 타락의 브륜테스 역시 그들에 못지않은 암계와 지략의 달인이었다.
나가의 미궁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아나톨리우스의 비호 아래 있었던 안젤라는 그런 백작들의 전투를 몇 번이나 지켜봐 왔다.
그래서 그녀는 공작들의 전투 역시 백작들과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갈 거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타루스와 우르수스들의 전투는 본신의 무력을 제외한 모든 것이 배제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힘과 힘으로 맞부딪치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전투, 거기에는 그 어떤 모략도 암계도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럼 그대가 보기에는 아나톨리우스가, 백작들이 저들을 이길 수 있을 것처럼 보이나?”
갑작스러운 김진우의 질문에 안젤라는 순간이지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만약 비슷한 전력이라면…….”
“그런 가정은 무의미해. 어차피 백작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소환수들을 얻을 수 없을 테니까.”
그의 목소리는 냉담했다.
“저들은 무식한 게 아니야. 단지 효율적일 뿐이지.”
그는 토굴꾼이었다.
열심히 파낸 토굴이 운 나쁘게 타 미궁의 통로와 연결이라도 되는 날에는 꼼짝없이 살벌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는 좁은 구덩이 따위에 몸을 숨긴 채 거칠고 사나운 괴물들이 서로를 물고 뜯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다이달로스가 자랑하는 함정이 사티로스들 앞에서 어떠했는가. 또한 그대와 그대의 권속들이 펼친 기습이 저들에게 어떤 효과를 발휘하던가.”
안젤라는 이번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던 탓이다.
장인의 반열에 오른 미궁 설계자가 자신 있게 만들어낸 함정은 뤼양의 병사들을 잠시 붙들어두는 게 고작이었고, 야음을 틈탄 흡혈귀들의 기습은 난폭한 괴수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전략이니 뭐니, 애초에 누가 얼마나 손해를 덜 보고 상대를 찍어 누르는가를 위한 것이 아닌가.”
적을 찾아볼 수 없는 거력, 단단한 육신, 날카로운 이와 발톱, 그들의 무기는 그 어떤 신산귀계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가장 큰 무기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음…….”
안젤라는 머릿속에서 백곰과 황소들을 상대했고, 이내 자신의 권속이 얼마나 수가 많든 간에 저들을 막아낼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녀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평생을 모조품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다. 진혈이라고는 한 방울도 남지 않은 흡혈귀는 지저에서 그저 보기 드문 관상품에 지나지 않았고, 그녀는 주인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경매대에 올리고 다운 잼에 몸을 팔아야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열등감이 있었다. 그랬기에 성공 확률보다 실패 확률이 더 높은 의식을 치러서라도 진혈을 얻으려 했다.
그리고 비록 완전하지 않지만 진혈을 얻는 데 성공했다.
목숨을 건 시도였고,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다. 성공의 대가로 그녀는 모조 흡혈귀라는 한계를 초월할 수 있었다.
실로 눈물겨운 노력. 하지만 그러한 그녀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저들은 허물 수 없는 종의 한계가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의 저들은 둘 다 우열을 가릴 수가 없는 적을 맞닥뜨렸어요.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조금쯤은 머리를 굴리는 게 낫지 않겠어요?”
오기 어린 음성이 마치 투정을 부리는 듯했다. 그는 대답 대신 작게 웃어 보였다. 피가 튀고 비명이 난무하는 전장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상큼한 미소였다.
“왜? 억울한가? 태어날 때부터 강자로 태어나 제 명운마저도 오시하는 저들에게 화가 나는가?”
안젤라는 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켜보아라. 저들의 오만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두 눈 뜨고 똑똑히 지켜보거라.”
김진우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리하면 보게 될 것이다.”
그의 음성은 부드러웠지만 결코 온화하지 않았고, 강한 힘이 있었다.
“냄새나는 토굴에서 자란 들개가 산중지왕을 어떻게 물어뜯는지, 보게 되리라.”
***
타루스들이 밀고 들어온 자리에는 붉게 물든 하얀 털만 무성했고, 우르수스들이 치고 나간 자리에는 부러진 황소의 뿔만이 남았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비등비등한 전투.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하얀 백곰 무리가 황소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쭉정이들만 내보낸 모양이군.”
작은 승리는 전부 내어주고 가장 큰 승리 하나만을 챙긴다. 그것이 김진우가 제안한 필승의 전략이었고 우르수스들은 받아들였다.
결국 이 자리에 선 백곰들은 우르수스 일족 중에서도 조금은 쳐지는 자들일 것이다.
어차피 질 전투에 아까운 정예들을 내보낼 이유는 없었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끄어어어어어.”
그러한 내막을 모르는 타루스들은 승리를 코앞에 두고 더욱 기세를 북돋았다. 대번에 전선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사나운 황소들이 날뛰어댔다.
“어서 약속한 지원군을 투입해달랍니다.”
좀도둑으로 살아가다 블랙 머천트에게 거둬져 그 비호 아래 자란 임프 소녀가 또 어디서 이런 지독한 전장을 겪어보았을까. 흉물스러운 살점과 선혈이 엉겨 붙은 뿔을 들이민 타루스의 전령을 보며 그녀는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해보였다.
하지만 임프 소녀는 그 와중에도 제 역할을 잊지 않고 용케도 타루스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벌써?”
김진우는 평소답지 않게 우물쭈물거렸다. 그 모습이 꼭 흉험한 전장의 광경에 겁이라도 집어먹은 것 같아, 타루스의 사자가 무심코 깔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차피 자신들만으로도 승리는 이룰 수 있으나, 동맹의 의리는 확인해 보아야 하지 않겠냐고.”
곁에 선 그가 기세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이자 임프 소녀가 덩달아 더욱 위축된 목소리로 말했다.
“끄응.”
김진우는 고민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맹우(盟友)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네요.”
전장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탓인지, 타루스의 사자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꽤나 고압적이었다.
어쩌면 사티로스를 상대로 얻은 승리가 여러 가지 행운이 중첩된 요행의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김진우가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군. 병력을 출진시키겠다 말해라.”
그는 끝까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주춤거리며 타루스의 사자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괘, 괜찮으시겠어요?”
임프 소녀가 드물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뭐가 말이지?”
“아…….”
그 아무렇지도 않은 대답에 임프 소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겁을 집어먹고 잔뜩 움츠리고 있었던 김진우가 너무나 냉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탓이다.
“전투를 준비하라!”
그의 말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고대의 영웅급 소환수들이 화색을 띄었다. 흉험한 전장을 보면서도 주눅 들지 않은 소환수들이 사납게 으르렁대며 투기를 끌어올렸다.
그의 명만 떨어지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장에라도 전장의 한가운데로 뛰어들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린 명령은 그들의 기대와는 영 동떨어진 것이었다.
“열심히 싸울 필요는 없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말에 모리건이 얼빠진 얼굴을 해보였다.
“네?”
“들은 대로다. 남의 잔치에 괜히 부산을 떨 필요는 없겠지.”
점입가경, 그는 한술 더 떠 황당한 요구를 했다.
“가급적이면 몸을 사려라. 할 수 있다면 힘에 부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번 전투에 한해서 잠시 물러나는 것도 허가하겠다. 단, 전장을 완전히 벗어나서는 않는 한 말이다.”
전승의 사령관이란 타이틀이 있으니 완전히 몸을 빼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그랬다간 그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들어준 막강한 타이틀 효과가 사라지고 말 테니까.
하지만 그것만 아니면 전장에서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우르수스들의 패배는 예견된 것. 그 약속된 승리마저 타루스들이 알아서 쟁취해낼 것이다. 그와 수하들은 적당히 싸우는 시늉만 하며 곁다리로나마 승리를 얻으면 그만이었다.
“그게 무슨…….”
“들은 대로다. 지금부터 나와 그대들은 전장에 뛰어들어 싸우는 ‘척’을 할 것이다.”
***
“끄응.”
모리건은 영 맥이 풀렸다. 수도 없는 전장을 전전했지만 지금처럼 의욕이 나지 않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주인이 황당한 주문을 한 것이다.
목덜미를 환하게 드러낸 백곰을 보면서도 그녀는 선뜻 손을 내뻗지 못했다. 일정 이상 힘을 보이지 말 것을 몇 번이나 당부한 주인에 몸이 굳은 탓이다.
“콰오!”
성난 백곰이 방금 저승길 문턱에 들어갔다 나온 줄도 모르고 사납게 포효했다. 모리건은 그 모습을 메마른 눈으로 바라보다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끄어어어어!”
그 사이에 언제 다가선 것인지 어영부영 움직여대는 그녀를 밀치고 타루스 한 마리가 사납게 전방을 향해 뛰쳐나갔다.
“이 새끼가…….”
순간 중심을 잃은 그녀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금방이라도 발작할 것처럼 날개를 펼쳐 들었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도로 접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전장은 신성한 곳이다. 삶과 죽음이 명멸하는 찬란한 순간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거룩한 시간이다. 그런 전장을 주인이 모독하고 있었다.
어영부영 싸워도 되는 전장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오만하게 내려다볼 정도로 하찮은 전장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주인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미치겠군.”
저 멀리서 날뛰어대는 주인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들에게 대충 싸울 것을 주문한 주제에 정작 본인은 꽤나 화려하게 날뛰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주인은 금세 타루스들에게 선봉을 양보하고 물러나 숨을 몰아쉬었다.
가증스러운 모습, 원한다면 시간이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자리에 모인 백곰 전체를 상대할 수도 있는 주인이 보이는 약한 모습에 그녀는 차라리 기가 찼다.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그녀는 주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포기했다.
음흉하고 꾀 많은 주인이 또 무슨 일인가를 꾸미고 있었다. 전략과 전술에는 나름 능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었지만, 주인의 생각만큼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기야, 병력을 부리고 허점을 찌르는 그녀의 명석함과 주인의 음흉함은 종류가 달랐고 결과 역시 달랐다.
기껏해야 승리만을 바라는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탐욕스럽고 집요했다.
그리고 늘 많은 것을 원했고 많은 것을 얻어왔다. 그런 그이니만큼 이번 전쟁에서도 따로 바라는 것이 있으리라.
“음.”
생각에 잠긴 사이에 어느새 전열에서 뒤쳐져 버린 그녀가 다시 못마땅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조금쯤은 날뛰어도 되겠지.”
어지간한 심층의 귀족들조차도 눈 아래로 보는 검은 흉조, 모리건이 날개를 펼쳐들었다.
***
“쯧, 성질하고는.”
김진우는 애초부터 자존심 강한 고대의 영웅급 소환수들이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 전투가 자신들에게 그다지 의미 있는 전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역시나 예상대로 모리건과 헤임달을 비롯한 고대의 영웅급 소환수들이 슬며시 제 본신의 힘을 꺼내 들 기미를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곳곳에서 검은 깃털이 날리고 새벽닭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과연 강대했던 옛 군주가 총애하던 전사들답게 그들은 공작급 미궁의 소환수들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위용을 보였다.
비록 그의 눈치를 살피느라 드러내놓고 힘을 발휘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잠깐 사이에 무시 못 할 전과를 올리기에 충분했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겠지.” 대미궁을 깔보고 낮추어 보아 방심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타루스들이 꽤나 쓸 만한 동맹의 전력을 확인하고, 고무되어 더욱더 우르수스들을 몰아붙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그들이 승리에 도취되는 만큼, 원하는 것을 얻기가 수월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