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50)
던전 견문록-250화(250/319)
# 250
던전 견문록
제 251 화
더 이상의 비명도 소란도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구역질이 날 것 같은 피 내음뿐이었다. 결국 타루스들의 맹공을 견디지 못한 우르수스들이 전멸한 것이다.
아그작, 아그작.
승리의 포효는 없었다. 흥분에 찬 고함을 대신하여 울려 퍼진 것은 고깃 조각을 씹고 뼈를 부수는 소리뿐, 타루스들은 조용히 자신들만의 승리의 의식을 치렀다.
김진우는 그 흉물스러운 광경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지저에서 자라 온갖 군상을 다 봐왔다고 자부하는 그가 보기에도 타루스들의 식사 장면은 결코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때마침 의식에 참가하지 않은 타루스의 사자가 나타나 말을 걸어왔다.
전투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것인지, 비록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씩씩거리며 거칠게 지껄여대는 사자의 태도가 꽤나 고압적이었다.
그것이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탓인지, 그도 아니면 타루스들의 본모습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껏 대미궁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제법 공손한 태도를 보였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라 김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그는 애써 지친 얼굴을 연기해 보이며 타루스 사자의 말을 경청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지금은 운 좋게 사티로스들을 꺾은, 이용해 먹기 좋은 호구 역할을 해야 할 때였으니까.
“우웩.”
그런데 통역을 해주어야 할 임프 소녀는 고개를 처박고 뱃속의 음식물을 게워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타루스 사자가 한참을 떠들어대다가 그 사실을 뒤늦게 눈치채고는 험악한 표정을 해보였다.
“그워어어어.”
당장에라도 임프 소녀를 밟아 죽일 것처럼 한 발을 높게 들어 올린 타루스가 뒤늦게 화를 삭히고는 으르렁거렸다.
대체 뭐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인지 정신없이 속을 게워내던 임프 소녀가 입가에 묻은 토사물을 닦아내지도 못한 채 황급히 통역을 시작했다.
“으으, 먼저 이번 승리에 대한 ‘약간의’ 조력에 감사하답니다.”
숙적을 상대로 거둔 압승에 기고만장해진 타루스의 태도는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나름대로 예의를 갖추어 얘기하고는 있으나, 그 안에 담긴 깔보는 태도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 전투에서 대미궁의 조력이 그다지 인상 깊지 않았던 모양인지, 단단히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진우는 자신과 수하들의 조력을 한껏 폄하하며 거들먹거리는 타루스 사자를 보면서도 불평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사티로스들은 한나절도 채 버티지 못했을 거라고…….”
“과연 믿음직스럽군. 오늘의 모습을 보니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겠다 전해라.”
심지어 그는 자신과 대미궁이 뤼양을 상대로 얻은 승리마저도 그저 요행에 지나지 않다 평가절하 하는 타루스의 말에 장단을 맞추어주기까지 했다.
임프 소녀가 정신없는 와중에도 뜨악한 시선을 보내오기는 했지만, 그는 아예 뻔뻔해지기로 작정한 것인지 표정에 변화 하나 없었다.
그 뒤로도 타루스의 사자는 한참이나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해댔다. 덕분에 용건을 듣는 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압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아 약속했던 보상을 전부 줄 수는 없답니다.”
역시나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같을 수는 없었다. 타루스의 사자는 그리 미안한 기색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약속했던 추가 보상을 대폭 줄여 버렸다.
“하지만 다음 전투에서 오늘보다 더욱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몇 배는 많은 보상을 약속하겠다고 하네요.”
한 번 어긴 약속인데 두 번이라고 어려울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천연덕스럽게 늘어놓는 타루스를 보면서도 김진우는 그 어떤 항변도 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약자의 모습을 연기한 것이다.
타루스의 사자는 그 모습을 몹시도 흡족해 했으며, 협박인지 협상인지 모를 대화를 주고받다가 혼자 결론을 내고는 사라져 버렸다.
“음.”
뒤늦게 다가온 안젤라가 자신의 주인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괜찮으세요?”
“뭐가?”
“주인님 성격에 공작 본인도 아닌 일개 사자 따위가 저리 시건방을 떠는데, 속이 좋을 리가 없잖아요.”
아무래도 그가 화를 꾹 눌러 참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염려와는 달리 그는 조금도 화가 나 있지 않았다.
“그럴 리가. 나는 오히려 저들이 더욱더 오만하게 나오기를 바랐다.”
김진우는 방금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일개 사자 따위가 보상의 가감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저들이 그새 자신들의 주인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새로운 지침을 받아 왔을 가능성도 없었다.
결국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유는 빤했다. 타루스들은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떠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얼 위해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저들이 우르수스의 평과는 달리 꽤나 약삭빠른 자들이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궁금하군,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그 방약무인한 태도를 보면 어떤 식으로 결론을 내렸는지 짐작이 갔지만, 그는 방심하지 않았다.
***
판이 더욱 커졌다.
패배한 우르수스들은 더욱 많은 병력을 이끌고 나왔고, 타루스 역시 그에 맞춰 병력의 수를 늘렸다. 그리고 다시 전투가 벌어졌고, 우르수스들은 또 한 번 패배했다.
승리는 했지만 처음의 전투와는 달리 이번에는 꽤나 치열한 접전이었다. 덕분에 전투가 끝이 났을 때, 타루스의 사자는 전처럼 시끄럽게 떠들어대기보다는 강압적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병력을 투입해 줄 것을 요청했을 뿐이다.
물론 이번에도 약속했던 보상은 치러지지 않았다.
“이젠 완전히 나를 수하 다루듯 하는군.”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그는 더욱더 그들이 자신과 수하들을 하찮게 여기기를 바랐다.
사티로스들을 상대로 얻은 승리를 행운에 기댄 기적이라 폄하하고, 얕잡아보기를 간절히 원했다.
“다음 전투에서는 좀 다치기라도 해야 하나.”
그의 너스레에 모리건을 비롯한 소환수들이 황당한 얼굴을 해보였다.
***
다시 크고 작은 몇 번의 전투가 이어졌고, 타루스들은 그만큼의 승리를 얻어냈다.
당연하게도 타루스들은 날이 갈수록 기고만장해져 완전히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처음에 약속했던 전장을 벗어나 우르수스들을 추격하는 데 한 점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고, 대미궁의 인근까지 전장을 확대하기도 했다.
타루스의 사자 역시 완전히 태도를 달리했다.
어느 정도 그를 경계하고 조심하는 시늉이라도 보이던 초반과는 달리, 나중에 가서는 자신의 수하라도 대하듯 함부로 굴었다.
“공작 본인도 아닌 놈이!”
모리건은 당연히 화를 냈고, 다른 소환수들 역시 분노를 참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하기야 주인의 영광만이 자신의 모든 것인 그들에게 있어 타루스의 홀대는 수치였고 굴욕이었을 것이다.
“이제 멀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김진우는 차갑게 웃으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던 모리건과 헤임달마저도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싸늘한 웃음이었다.
애초에 의도한 상황이라고는 하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설쳐대는 꼴을 계속 보는 것은 고욕이었다.
날이 갈수록 안하무인이 되어가는 타루스들의 행태에 이미 작정하고 장단을 맞추어 주었던 그조차도 슬슬 인내심이 한계에 달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한들 연이은 패배에 수만의 동족을 잃은 우르수스들만 할까.
“이제 판을 더 키워봐야겠소.”
그를 은밀히 찾아온 우르수스의 사자는 화를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정도쯤 되면 전면전을 생각할 만도 한데, 의심 많은 황소 놈들이 영 움직일 생각을 않더군.”
“그건 상관없소. 이쪽에서 병력의 규모를 키우면 저쪽도 그에 맞출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 어떤 협상의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는 단호한 대답에 김진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1만. 딱 1만을 더 투입하겠소. 그리고 더 이상의 추가 투입은 없소.”
이미 입은 병력의 피해만 해도 2만 5천에 달했다.
직접 제 눈으로 지켜보지 않았다면 감히 감조차 잡히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였다. 그런데도 우르수스들은 1만의 병력을 더 희생시킬 여력이 있다 말했다.
고작 몇 천의 병력, 그것도 백곰과 황소들에 비하면 턱없이 질 낮은 소환수들이 전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질릴 만한 숫자였다.
“그 뒤로는 그대의 역할이요. 우리 일족이 피를 흘리는 동안 언제까지고 불로소득을 바라고만 있을 생각은 아닐 거라 믿소.”
이제껏 당신의 계획대로 했으니, 전투가 끝이 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타루스들을 부추겨 전면전을 결심하게 만들라며 우르수스의 사자는 거듭 당부했다.
“아직 진짜배기들이 나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너무 성급한 건 아닌가 모르겠군. 괜히 조바심 내다가는 이제껏 치른 그대 일족의 희생마저 무의미해질 수가 있어.”
그의 우려에도 백곰은 단호하기만 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하겠소.”
“방법이 있는 모양이군?”
“우리가 정예를 내보내면 저쪽도 가만있지는 않을 거요.”
정예 병력의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저리 강수를 두는 것을 보면 저들도 슬슬 피해가 누적되는 것이 부담스러워지는 모양이다.
“좋아. 그 다음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김진우의 호언장담에 그제야 우르수스는 만족한 얼굴로 돌아갔다.
***
“생각해 보면 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번 계획이 너무 주인님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이상하지 않아요?”
우르수스의 사자가 돌아간 뒤 안젤라가 미심쩍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녀는 지나치게 그에게 의존해야 하는 계획을 그 큰 피해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우르수스들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지금까지 입은 피해야 어떻게든 복구할 수 있다지만, 정예 병력이 피해를 입어서야 비등비등했던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게 된다.
혹시라도 그가 배신하고 정말로 타루스의 편에 붙어 자신들을 도모한다면 그들로서는 위기를 자초한 꼴이 되고 만다.
조금만 생각하면 의심할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의 계획을 따르기로 한 것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던 것이리라.
“글쎄.”
김진우는 모르는 척 의뭉을 떨었지만, 무언가를 아는 눈치였다. 안젤라는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고 그가 이유를 말해주기를 바랐다.
“내 계획에서 어떤 부분이 저들의 구미에 맞았던 게지.”
“그게 무슨…….”
“연전연승, 타루스들이 방심해서 전면전을 펼친다. 혹은 그들이 방심하지 않더라도 승기를 잡았을 때 여세를 몰아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둘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안젤라는 대답 대신 가만히 그의 설명을 기다렸다.
“어떻게 되든 간에 마지막 전장만큼은 정해져 있다는 거야.”
안젤라는 여전히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김진우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즐겁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모르겠어?”
“네. 전혀요.”
안젤라는 선선히 자신의 생각이 공작들의 수 싸움에 미치지 못함을 인정하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도 더는 그녀를 기다리게 할 생각이 없는지 곧장 대꾸해 주었다.
“우르수스들은 애초부터 내 협력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거야. 그들이 바랐던 것은 단지.”
김진우는 오른 주먹을 천천히 가슴께로 끌어당기다가 반대편 손바닥으로 감싸 잡아 보였다.
“타루스들이 스스로 사지로 들어서는 것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