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52)
던전 견문록-252화(252/319)
# 252
던전 견문록
제 253 화
“생긴 것과 다르게 예민한 놈일세.”
김진우는 조금씩 가까워지는 공작을 보며 혀를 찼다.
찰나의 순간 새어 나간 기운을 저리 느끼는 것을 보니 둔한 생김새와는 달리 제법 감각이 예민한 모양이었다.
쾅. 쾅.
지축이 진동한다. 덩치가 큰 만큼 한 걸음 한 걸음이 남다르다. 엇 하는 사이에 바로 거대한 허벅지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고개를 쭉 빼고 올려다보니 누런 섬광이 번뜩이는 눈동자 두 개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라지게도 크구만.”
이제까지 운 좋게 뤼양을 꺾은 것 마냥 연기를 해오느라 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번에는 그도 조금은 정말로 질려 버리고 말았다.
통로를 떠받들 듯 거대하기만 한 근육질 육체가 주는 압박감은 전에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단지 크다는 느낌보다 거대한 기세가 느껴졌다.
마치 위에서 천근 돌덩이가 찍어 누르는 듯한 기분. 뤼양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지막지한 존재감이다.
이게 진짜 공작의 기세.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허리를 빳빳이 펴고 있었다.
우우우우우.
공작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 사소한 행동 하나에 온 사방의 공기가 소스라쳤다.
“통역.”
완전히 기가 눌려 고개조차 들지 못하던 임프 소녀는 그의 말에도 좀처럼 제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작은 한숨과 함께 슬며시 기운을 일으켰다. 애써 갈무리했던 기운이 슬쩍 흘러나와 주변을 잠식했다.
공간 자체를 압도하는 공작의 폭금한 기세와는 다르다. 소리 없이 주변을 먹어치우는 기운은 보다 농밀하고 어두웠다.
오만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공작의 눈에 잠시지만 이채가 스쳐갔다.
“아…….”
창백하게 질려 있던 임프 소녀가 겨우 억눌린 숨을 토해냈다.
“통역.”
김진우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다그쳤다. 간신히 공작의 기세를 벗어난 임프 소녀가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든 얼굴로 쫓기듯 말했다.
“만나고 싶었다, 전승의 사령관이여.”
그는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이제껏 그래왔듯이 운 좋은 기회주의자를 연기할지,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거 어느 정도의 기세를 드러낼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거야 원. 만나는 놈마다 만나고 싶었다 말하니 민망할 지경이군.”
내면의 폭급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한 쌍의 누런빛 눈동자는 같잖은 연기가 통할 정도로 어수룩해 보이지 않았다.
“어쨌건 반갑다. 맹목적인 전사들의 왕, 타루스들의 지배자여.”
그는 이제껏 타루스들에게 보여왔던 비굴한 기회주의자의 탈을 벗고, 더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공작을 마주했다.
***
공작과의 대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김진우가 얻은 소득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는 공작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정말 재미있지 않아?”
그는 정말 즐거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한 얼굴로 입을 놀려댔다. 공작과의 대화를 제대로 듣지 못한 소환수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흉한 우르수스들이 생각하는 바야 뻔하지. 보나마나 함정을 파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을 터, 단지 그대가 혼란을 틈타 얻기를 원하는 것이 의문일 뿐이다.”
아둔한 생김새와는 달리 타루스들의 왕은 제법 눈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우르수스들은 그대에게 줄 수 없을 것이다. 승자는 내가 될 테니까.”
게다가 그는 오만했다. 공작은 우르수스들의 함정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분쇄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아울러 수상한 동맹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여유까지 보일 정도였다.
“승리자 곁에서 함께 영광을 누릴 것인지, 패자와 함께 독배를 들 것인지 선택하는 것은 오직 그대의 결정에 달려있겠지. 다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그대가 져야 할 것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노란 눈동자를 떠올린 김진우는 다시 한 번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쨌건 재미있게 됐어.”
공작은 꿈에도 모르리라. 그가 바라는 것은 고작 최후에 나눠 가질 전리품이 아니라 승리 그 자체였으니까.
그는 전승의 사령관이기 이전에 탐욕의 군주였다.
***
공작이 합류한 타루스들의 진격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그들은 최소한의 정찰대만을 유지한 채 하나로 뭉쳐 이동했고, 수만이나 되는 대군의 이동에 전 지저가 이목을 집중했다.
“많이도 몰려왔네요.”
감각이 예민한 안젤라는 어둠에 몸을 숨긴 세작들의 기척이 영 거슬리는지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했다.
“공작 둘이 명운을 건 전투다. 이목이 쏠리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지.”
김진우는 적당히 그녀를 달래주며 저 앞에서 보무도 당당하게 군을 이끄는 타루스들의 왕을 바라보았다.
“이미 군세도 모을 만큼 모은 거 같은데.”
우르수스들이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마당에 굳이 서두를 것도 없다지만, 이렇게 이목이 집중되어서야 전력이 노출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염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타루스들의 진격은 지독스러울 정도로 느렸다.
그 느긋한 모습이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보여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해라. 생각해내라.”
스스로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그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공작 둘, 그리고 하이로드 하나가 끼어든 이번 전쟁은 절대로 작은 전쟁이 아니다. 9층을 넘어 심층의 지배자들마저 관심을 보일 정도였다.
이번 전쟁으로 9층의 형세가 판가름 난다. 승자는 막대한 전리품을 얻고 9층 전체를 아우르는 강자로 급부상할 게 분명했다. 단 한 번의 전쟁으로 전 층에서도 손에 꼽는 막강한 세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승자의 영광이 찬란한 만큼, 패자의 그늘이 깊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시작을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제는 총력을 넘어 사력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김진우는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서편의 지배자 사티로스, 북쪽의 지배자 타루스, 남쪽의 지배자 우르수스. 그리고 중앙의 대미궁. 이중 사티로스들은 이미 패망하여 대미궁에 편입되었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9층의 지배자들 전체가 이번 전쟁에 참전을 한 것이다.
단 하나, 동쪽 미궁의 지배자를 제외하고.
***
만약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공작의 자신감이 허세가 아니라 진짜였다면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확실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지저에서 징조가 드러났을 때 움직이면 늦게 마련이다. 그는 그 사실을 더없이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은밀하게 안젤라를 보내 우르수스에게 자신의 우려를 전달해주는 한 편, 미미르에게 정보를 요청했다.
또한 탐식의 덩어리들과 언더 엘프 순찰자들의 탐색 작업에 더욱 더 공을 들였다.
불과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우려가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망할 놈. 애초에 주공이 이쪽이 아니었어.”
릭샤샤와 미미르가 동편에서 접근중인 대군의 존재를 확인해 주었다. 그런데 그 군대의 방향이라는 게 기묘하기만 했다.
“저들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이 너무 애매합니다. 지금 이대로라면 저들의 목표가 남쪽의 우르수스들인지 중앙의 대미궁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모리건이 더없이 심각한 얼굴로 우려를 표했다. 9층의 중앙과 남쪽을 모호하게 걸친 적의 진격로가 위협적이었다.
“끄응.”
방심한 적은 없었다. 일이 언제든 틀어질 수 있다는 가정 하에 모든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언제든 발을 뺄 수 있도록 만반을 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러했듯이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하기야, 처음 밀약을 맺을 당시에 보였던 성의 정도만 보였어도 동쪽의 미궁을 끌어들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테지.”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다 보니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것을 놓치고 말았다. 언제나 곁에서 자신을 보조해 주었던 도미니크의 빈자리가 새삼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지나간 실수를 붙들고 자책하는 대신 빠르게 다음 수를 궁리했다.
“모리건, 너와 헤임달은 소환수들을 이끌고 대미궁으로 돌아가라. 최악의 경우 내가 돌아갈 때까지 그대들이 시간을 벌어야 할 것이다.”
본격적인 전투를 앞서고 동맹의 주력이 빠지는 것을 두고 볼 타루스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무리를 해서라도 모리건을 비롯한 영웅급 소환수들을 전부 대미궁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최악의 경우, 타루스들의 포위 공격을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김진우는 설령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몸을 빼낼 자신이 있었다. 다만 그 대가로 바쳐야 할 전승의 타이틀이 뼈아플 뿐이었다.
“물러서려면 지금밖에 없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이라면 주인님의 명예는 지켜질 겁니다.”
“아니, 타루스들의 왕은 만만한 자가 아니야. 그는 뤼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짜 강자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진창에 발이 빠진 것은 타루스와 우르수스뿐만이 아니었다.
“포탈을 열 수도 없고, 몸을 빼낼 수도 없어. 낌새를 보이는 순간 저들은 우르수스들을 공격하기 전에 나를 먼저 처리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러했듯 저들은 동맹을 만신창이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그래야 허튼 마음을 품을 여력조차 남지 않을 테니까.
“여긴 안젤라와 흡혈귀들만으로 어떻게든 상황에 맞춰보겠다. 그러니 그대들은 돌아가서 혹시 모를 공격을 대비하는 데 최선을 다하도록.”
“부디 몸조심하시기를.”
결국 모리건을 비롯한 영웅급 소환수들은 전부 돌아갔다. 남은 것은 안젤라를 따라 이곳에 온 흡혈귀들뿐이었다.
그들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무거운 얼굴을 해보였다. 그들은 어느 하나 만만히 볼 수 없는 대군의 틈바구니 속에서 짐짓 앞날을 걱정하는 듯했다.
가장 급 낮은 타루스 병졸 하나를 두고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모조 흡혈귀들에게 지금의 전장은 지나치게 가혹했다.
그들은 동요했고 진혈의 여왕이 자리를 비운 탓에 그 동요를 고스란히 내보였다.
“까마귀와 전사들이 보이지 않는데, 어딜 간 것이냐고 하네요.”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어 미궁으로 돌려보냈다고 해.”
이미 공작과 대면하며 어느 정도 진면목을 보인 김진우이기에 더는 사자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우르수스들의 미궁이니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당장 그들을 불러들이라고…….”
역시나 예상대로 타루스들은 동쪽에서 접근중인 군대의 움직임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소득이라면 소득, 하지만 그는 기쁜 마음보다 불편한 내심을 그대로 내비췄다.
“이곳에 2천의 군대와 함께 그들의 주인인 내가 남았다. 수하 하나의 움직임마저도 그대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건가?”
날 선 그의 대꾸에 임프 소녀가 진땀을 흘리며 통역했다. 은근히 기세를 흘리며 압박하니 타루스의 사자가 돌변한 그의 태도에 입만 어버버거리다 물러났다.
사자는 갑작스레 돌변한 그의 태도에 기가 질려 도망치듯 돌아갔지만, 타루스들의 항의는 끝나지 않았다. 사자가 돌아간 직후 공작이 직접 찾아온 것이다.
“결전을 앞두고 주력을 돌려보낸 저의를 알 수 없다고…….”
사나운 공작의 기세에 임프 소녀는 완전 사색이 되었다.
“같지도 않은 가짜 흡혈귀들뿐이라면 동맹의 자격이 없다 말하고 있어요.”
공작의 말은 나름대로 합리적이었다. 2천에 달하는 흡혈귀들이 있다지만, 그들은 전력으로 구분하기조차 민망한 존재들이었다.
결국 김진우는 숨겨왔던 존재감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으로 공작의 불만을 잠재웠다.
“저들이 있든 없든 전력은 변하지 않아. 어차피 이쪽의 전력의 9할은 내가 차지하고 있거든.”
심층의 당당한 지배자를 앞에 두고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광오했지만, 공작은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다소 놀란 듯한 얼굴로 경계의 눈빛을 던져왔을 뿐이었다. 어쨌건 간에 그는 공작을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고,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주인님!”
이어 안젤라가 돌아왔다. 안젤라는 이미 우르수스들이 동편에서 진군중인 대군의 존재를 알고 있었노라며, 양다리를 걸친 건 주인님만이 아니라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난장판을 만들어야겠어.”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졌지만, 아직 그가 준비한 수는 끝이 나지 않았다. 그는 가능하면 다음을 위해 남겨두려고 했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지금이 그대의 명예를 되찾을 시간이다.”
그의 말에 이제껏 흡혈귀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거구 하나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깊게 눌러쓴 후드 아래로 드러난 금빛 비늘이 번쩍 빛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