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53)
던전 견문록-253화(253/319)
# 253
던전 견문록
제 254 화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인가.”
후드를 젖히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금빛 드라칸, 오르테아가였다.
찬탈자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용제를 만났을 때, 그 다리 역할을 하며 지난 과오를 용서받은 이 겁쟁이 드라칸은 한 발 더 나아가 영광스러운 명예를 찾겠다며 공공연히 떠들어댄 바 있었다.
그런 오르테아가를 김진우가 놀릴 리가 없었다.
그는 지체 없이 이 골칫덩이를 전장으로 끌고 왔고, 내내 써먹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전장에 도착하고 보니 타루스들과 우르수스들의 사나움이 예상 이상인지라 용제라는 뒷배경을 두고 있는 철부지 드라칸을 쉽사리 투입할 수가 없었다.
혹시 그 신변에 문제라도 생겼다간 용제라는 강력한 우군을 적으로 돌리게 될 테니까.
그 덕에 결과적으로는 오르테아가의 존재는 타루스들에게 노출되지 않을 수 있었다.
흡혈귀 사이에 내내 처박혀 있었던 오르테아가라면 설령 지금 대열을 이탈한다 한들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말만 하십시오. 내 반드시 명예로운 모습을 보이고 말 테니까.”
지난 과오를 덮기 위해서인지 필요 이상으로 기세등등하게 떠들어대는 오르테아가를 보며 김진우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렇게 수고해 줄 필요까지는 없고, 그냥 심부름 하나만 해주면 돼.”
“분명 명예를 회복할 기회라고…….”
오르테아가는 실망한 얼굴로 금세 어깨를 늘어뜨렸다.
“네가 뭘 생각했든 간에 그보다는 중요한 임무니까 벌써부터 실망할 필요는 없어.”
실망만큼 회복도 빠른 오르테아가는 금방 또 기대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용제에게 전할 말이 있어.”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의욕 충만한 드라칸의 기대와는 한참은 동떨어진 것이었다.
“안젤라, 이야기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줘.”
김진우의 눈짓에 안젤라가 새까만 어둠의 장막을 펼쳐 대화가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원천봉쇄했다.
“찬탈자는 발이 묶여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니, 거사를 일으킴에 있어 망설이지 말라 전해.”
미리 용제와 얘기가 된 것인지 앞뒤 다 자른 말이라 오르테아가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굳이 반문하지 않았다.
그저 이 대수롭지 않은 전령 노릇을 통해 자신의 명예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나,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니니, 최대한 서두르라는 말 또한 빠트리지 말고 전하도록.”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전해 보이겠습니다.”
호언장담하는 오르테아가의 태도가 호된 꼴을 보기 전의 모습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 반편이 드라칸이 철이 들기를 바라는 용제의 뜻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듯했다.
“속는 셈 치고 믿어보도록 하지.”
그 뒤로 몇 가지인가 더 당부를 남긴 김진우는 조용히 오르테아가를 배웅했다.
안젤라가 손을 쓴 덕분에 흡혈귀 몇이 오르테아가의 곁에 붙었으니, 어지간히 주의 깊게 그들을 관찰하지 않는 이상 드라칸의 이탈을 눈치챌 이는 없으리라.
그렇게 용제에게 전령을 보낸 그는 다소 여유를 찾은 얼굴로 타루스들의 왕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개싸움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받아주마.”
그는 아예 작정하고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
어느 순간이 되자 타루스들은 진격 속도를 올렸다. 그간 꾸물거렸던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들은 저돌적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동편에서 진군 중이던 대군의 발걸음은 눈에 띌 정도로 느려졌다.
“이놈도 음흉하긴 매한가지군.”
뒤늦게 끼어든 제3의 공작이 대미궁과 우르수스들의 미궁을 두고 저울질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이번 전쟁을 통해 9층을 발아래 두기를 원하는 것은 마찬가지. 음흉한 괴물들의 수 싸움에 김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동맹이 사이좋게 전리품을 나눠 갖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전쟁에 참가한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승리를 나누기를 바라지 않았다.
하기야 당장 자신부터가 전리품을 통해 급속도로 성장할 다른 공작을 견제하고 있으니, 그들이라고 해서 똑같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이제 카드는 전부 돌렸고, 남은 것은 상대의 패를 확인하는 것뿐인가.”
모두가 최고라 생각한 카드를 뽑아 들고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진짜 승자가 누가 될지는 각자의 패를 비교해 보고 난 이후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네놈도 골치깨나 아프겠구나.”
멀리 보이는 거대한 타루스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콧김을 내뿜는 것을 보며 김진우는 작게 비웃음을 날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그는 이내 심각한 얼굴을 해보였다.
본의 아니게 9층에 존재하는 미궁 전체가 전쟁통에 휘말리고 말았다. 덕분에 9층 전체의 패권이라는 판돈이 걸리는 지경에 오게 되었다.
만약 이번 전쟁에 패한다면 다음은 없다. 최소한 두 개 이상의 공작급 미궁을 흡수할 승자 앞에서 재기의 기회를 얻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부, 아니면 전무.
언제나 그의 숨통을 조여 왔던 지저의 율법이 바짝 따라붙어 탐욕스럽게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이 끔찍한 괴물은 승자의 그늘 아래 숨어 군침을 삼키다 때가 되면 이를 드러내고 패자의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말마 하나, 더운 피 한 방울마저도 게걸스럽게 집어삼켰을 때, 그제야 괴물은 겨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물러나리라.
그게 지저였고, 그가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주인님?”
폭풍 전야와도 같은 분위기에 목이라도 졸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안젤라가 그를 보고는 의아한 얼굴을 해보였다.
“아니, 조금 웃기지 않아?”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김진우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아리송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근데 아무도 자신이 당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게 웃기잖아.”
그저 말뿐이 아니라 진정으로 즐거운지 그는 키득거리며 웃어대기까지 했다.
“근데 웃긴 건 나도 마찬가지라는 거야.”
한참을 웃어대던 그가 멀리 보이는 거대 타루스를 보며 낮게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도저히 패할 것 같지 않거든.”
이미 오르테아가라는 아껴둔 패를 꺼내 들었지만 밑천을 전부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가 결국 승부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것이다.
“저도 주인님이 패할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저들은 끝내 주인님 앞에 무릎 꿇고 살려 달라 애원하게 될 거예요.”
안젤라는 자신의 주인만큼이나 확신에 차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 근거 없는 확신에 그가 재미있다는 얼굴을 해 보이니 그녀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는 아직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걸요.”
***
“망할놈들, 주인님께선 사지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네놈들은 팔자 좋게 늘어져 있구나!”
대미궁에 도착한 모리건은 곧장 이종족들을 소집해 트집을 잡았다.
그녀는 일개 소환수에 불과한 자신의 기세에도 꿈뻑 기가 눌려 어깨를 떠는 이종족의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종족이라도 쓸 곳이 있었다. 비록 저들만으로 대미궁을 지켜낼 수는 없을지라도,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시간을 버는 정도는 어느 정도 가능했다. 아니, 가능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그렇게 해낼 작정이었다.
그것이 전장에서 내몰린 까마귀의 자존심이었고, 긍지였다.
“얼마가 죽든 주인님께서 오실 시간만 벌면 돼.”
그녀를 비롯한 고대의 영웅급 소환수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었다.
주인님의 자비에 기생하는 이종족들 따위야 얼마가 죽든 알바 아니었고, 죽음으로나마 잠시 적의 발을 붙잡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보람 찬 일이 아니겠는가.
“음?”
그렇게 한참을 이종족들을 이리 내몰고 저리 내모느라 정신이 없던 모리건은 문득 한기를 느끼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서리의 가호를 받지 못한 자신인지라 이따금씩 느끼던 대미궁의 서늘함이 오늘따라 유독 심한 것처럼 느껴졌다.
“전장의 까마귀도 다 됐군. 전장을 날뛰던 까마귀가 어느새 작은 종달새가 됐어.”
“어디 종달새가 얼마나 사나운지 겪어 봐야 피눈물을 흘리려나.”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몸 쓰는 것뿐인 죽음의 기사, 발자크가 무료했는지 이죽거렸다. 그녀는 사납게 눈을 치뜨고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사양한다. 주인과 함께 전장에 서지 못한 건 그대나 나나 마찬가지, 괜스레 우리끼리 투닥거릴 필요는 없겠지.”
원체 자존심이라고는 없는 단순한 발자크인지라 금세 꼬리를 말고는 슬며시 발을 뺐다.
“아무리 대미궁이 서늘하다고 한들 오늘처럼 한기가 돌았던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그거야 주인이 없으니 그대의 마음이 허한 게 아니겠는가.”
“시답잖은 소리를 계속할 거면, 주둥이보다는 몸으로 나누는 게 좋지 않아? 입담도 시원찮은 그대에게는 그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
“끄응, 농담이 통하지 않는 녀석이로다.”
당장에라도 검은 날개를 뽑아 들고 달려들 것처럼 살벌한 태도, 발자크는 이번에도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
“모리건의 말이 맞다. 뭔가가 이상하다.”
곁에서 그 시답잖은 언쟁을 지켜보고 있던 새벽닭이 불쑥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지금의 한기는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는 한기에 이제는 몇몇 소환수들이 몸을 떨 지경이 되었다. 이쯤 되자 머리를 쓰는 곳이라고는 박치기밖에 모르는 발자크도 이상을 느끼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인님에게 알려야 할 것 같은데.”
“주인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임무는 미궁의 사수다. 이곳을 벗어나는 건 주인님도 바라지 않는 일이리라.”
헤임달의 대꾸에 발자크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한 발 물러났다.
도움도 안 되는 죽음의 기사가 입을 다물자 모리건과 헤임달은 주변을 살피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를 썼다.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한기가 심해지는군.”
하얀 날개를 쭉 내밀고 허공을 더듬던 헤임달의 한마디에 모리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설마?”
“뭔가 짐작 가는 것이라도 있는 것인가?”
새벽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모리건이 대뜸 소리치며 미궁의 중심을 향해 내달렸다.
“나가들!”
그제야 대미궁에 남아 있는 진짜 주민들을 떠올린 소환수들이 그녀를 따라 미궁의 중심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지금 같은 때에!”
모리건은 자신의 주인이 나가들을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이변이 영 불안하기만 했다.
그저 잠이 들었던 나가들이 다시 깨어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지금의 한기는 결코 일개 소환수들이 깨어나며 불러 일으킬만한 성질이 아니었다.
“망할 난쟁이 놈, 만약 나가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사지를 뜯어버릴 테다.”
해룡의 심장을 두고 연구를 진행했던 큰 머리 난쟁이를 떠올린 모리건이 이를 갈아붙였다.
“이런…….”
마침내 수많은 나가들이 잠이 들었던 오너 룸에 도착한 모리건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이음새 하나 보이지 않던, 완전무결했던 나가의 알들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그 모습은 하나같이 누군가의 우악스러운 손길이라도 닿은 것처럼 위태롭기만 해 모리건은 기겁하고 말았다.
“안 돼!”
그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주인님이 유달리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알을 찾고 있었다.
부디 지금의 이변이 불길한 징조가 아니기를 수도 없이 되뇌던 그녀는 마침내 주인이 총애하던 나가 여인의 알이 있던 자리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아…….”
그런데 그렇게 찾아낸 알의 모습이라는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반으로 쪼개진 알의 반절은 바닥에 박혀 있었고 깨어져 나간 껍데기의 파편은 흉물스럽게 주변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비열한 사냥꾼이 내용물만 쏙 빼먹고 내버린 알껍데기와 같아 모리건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