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54)
던전 견문록-254화(254/319)
# 254
던전 견문록
제 255 화
89. 결전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몇 번이나 확인해 보아도 흉물스럽게 잔해만 남은 자리는 도미니크의 것이 분명했다.
“감히 어떤 놈이!”
그녀는 진정으로 분노했고 당장에라도 침입자를 찾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처럼 벌개진 눈으로 사방을 쏘아보았다.
“잠깐. 진정해라, 검은 흉조여.”
그런 그녀를 헤임달이 조용히 진정시켰다.
“이곳의 방비는 결코 허술하지 않다.”
전쟁으로 인해 주력이 빠져나갔다고는 하나, 대미궁의 방비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대미궁은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마물이며, 삿된 마음을 품은 침입자의 작은 악의 따위는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폭급한 괴물이다.
거기에 더해 주인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언더 엘프 순찰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망을 펼치고 있다.
그런 대미궁을, 그것도 최심부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 아무도 모르게 침입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알을 깬 게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알을 깨고 나선 거라면?”
헤임달의 추리는 상당히 그럴싸했고, 그 덕에 모리건은 들끓던 분노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끄응. 그래, 네 말이 맞다 쳐.”
모리건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지?”
깨어진 알의 잔해만이 남은 오너 룸, 도미니크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모리건을 비롯한 소환수들이 사라진 도미니크의 행방을 찾아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무렵, 김진우는 이제 막 결전을 앞에 두고 있었다.
“저게 우르수스들의 미궁인가.”
거미 공작의 미궁에서 태어나 살아왔지만, 미궁의 외관을 감상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자유를 얻었던 그날조차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소희의 손에 이끌려 미궁을 벗어나야 했으니, 이렇듯 지근거리에서 공작의 미궁을 제대로 감상한 것은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주한 공작급 미궁의 위용은 무지막지했다.
다이달로스의 손이 닿으며 그나마 모양새를 갖추긴 했지만, 스스로 성장하여 경계를 넓혀가는 대미궁의 외양은 사실상 볼품이 없었다.
그에 비하면 우르수스들의 미궁은 차라리 예술품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대단하군.”
덩치 큰 우르수스 하이 대여섯이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입구는 별다른 장식은 없었지만 그 하나만으로도 웅장함 그 자체였고, 그 너머의 통로는 얼어붙어 투명한 벽이 빛을 반사하여 현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수정을 품은 듯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그 기운만큼은 서리의 칭호를 얻은 대미궁이 무색할 정도로 싸늘하고 차가웠다.
과연 공작이라는 이름값에 어울리는 위용이었다.
“뤼양 놈은 진짜 명함도 못 내밀 반편이었군.”
공작들의 저력을 실감할수록 새삼 뤼양이 얼마나 허울뿐인 공작이었는지를 느꼈다.
우오오오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갑작스러운 포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런 그의 눈에 함성을 지르며 기세를 북돋는 타루스들이 보였다.
“설마 아무리 타루스들이라도 이대로 숨도 돌리지 않고 공격을 시작하지는 않겠죠?”
잠깐 사이에 도열을 마친 타루스 오그레들이 발을 구르는 것을 본 안젤라가 질린 얼굴로 물었다.
다소 느긋한 걸음이었다고는 하나, 쉬지 않고 달려온 거리가 결코 적지 않다.
그런 상태에서 무슨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적진으로 돌격하는 것은 악수 중 악수였다.
하지만 타루스들을 지배하는 공작의 생각은 그녀와 달랐던 모양이다.
조금씩 고조되어 날을 세우는 타루스들의 군기는 그저 허세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날카로웠다.
“그 설마가 맞는 모양이군.”
김진우는 눈에 보일 듯 선명하게 형태를 갖춰가는 군기가 우르수스의 미궁을 향하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그는 조금이나마 타루스들이 시간을 끌기를 바랐다. 공격을 시작하더라도 최소한 동편 군대의 동향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나서 진군을 시작하기를 바랐다.
“릭샤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지?”
“동편의 군대는 이곳에서 하루거리가 채 되지 않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더는 움직이지 않고 있나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써는 적의 예봉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나이다.”
하지만 음흉한 타루스의 동맹군은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들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타루스들에게 일러 공작과의 만남을 주선토록 하라.”
그의 말에 임프 소녀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타루스들에게 향했다.
***
공작은 만남을 거절하지 않았다. 김진우는 동편 미궁의 움직임을 언급하며 공격 시기를 늦출 것을 제안했지만 공작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쯧, 길길이 날뛰기에 뭔가 어그러진 줄 알았더니…….”
제3의 공작의 움직임이 다소 애매해 저쪽의 계획이 틀어진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마저도 예상 범위 내였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상쩍은 군대를 지척에 두고 타루스들이 저리 공격을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결국 마지막이 되어 봐야 그 꿍꿍이를 알겠군.”
타루스들의 왕이 동편의 공작이라는 패를 준비했다면 이쪽은 용제라는 카드를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에 용제는 지저에서도 드물게 강력한 패가 분명했다.
거짓과 위선, 기만과 배신이 판치는 지저에서 유독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드라칸 특유의 페널티를 갖고도 용제가 여태껏 살아남았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저는 그 반편이 드라칸이 영 못 미더운데 말이죠.”
용제의 능력이야 의심할 나위가 없다지만, 정작 전령을 맡은 오르테아가 못 미더운지 안젤라는 영 불안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염려와는 다르게 김진우는 꽤나 느긋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걱정 마.”
그 기묘한 확신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니 그가 씨익 웃어 보였다.
“오르테아가의 고자질만큼은 지저 제일이다.”
스스로 명예를 회복할 생각은 않고 제 혈족의 권위에 기대려고만 하는 반푼이지만, 아비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그 능력을 빌리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으니 전령으로 삼기에 그보다 적합한 이가 없을 정도였다.
“어떤 면에서는 대단하군요.”
그의 얼토당토않은 말에 안젤라가 허탈한 웃음을 내보였다.
그렇게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전투 준비를 마쳤는지 타루스의 사자가 찾아와 결전이 임박했음을 알려주었다.
쿠웅.
때를 맞추어 타루스 오그레들이 일제히 발을 구르며 전진을 시작했다.
숙적과의 결전을 앞에 둔 탓일까. 타루스들의 기세는 그 어느 때보다 흉흉했다.
“그워어어어어!”
요란스럽게 전투 화장을 한 타루스 오그레들이 직전의 전투에서 희생된 우르수스 하이들의 사체를 미궁의 입구에 내던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전투는 시작도 안 했건만 벌써부터 피 내음이 짙게 퍼져 갔다.
“전사한 우르수스 하이들을 모욕하고 있어요.”
임프 소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멀리서 들려오는 타루스들의 고함 소리를 통역해 주었다.
“도발하는 건가.”
일족의 긍지 높은 전사들이 모욕당했음에도 우르수스들은 여전히 미궁 너머에 몸을 숨긴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타루스들의 만행에 무신경했던 것은 아니다.
고요한 미궁의 안쪽에서부터 치솟은 살기가 꽤나 먼 곳까지 전해져 왔다.
피부가 저릿저릿한 느낌에 어깨를 털어낸 그는 기고만장해 떠들어대는 타루스들을 보며 혀를 찼다.
“얄팍한 수를 쓰는군.”
아무래도 타루스들은 미궁 안쪽보다는 미궁 밖을 전장으로 삼고 싶은 모양이다.
하기야 방어하는 쪽의 어마어마한 어드벤티지를 생각하면 무슨 방법이건 간에 우르루스들을 끌어내는 게 이득이었다.
하지만 통할 리가 없었다.
무려 1만에 달하는 정예 전사를 희생시키면서까지 타루스들을 끌어들인 우르수스다. 그런 그들이 이런 얄팍한 도발에 흔들릴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타루스들도 잘 알고 있는지 아무런 반응조차 없는 미궁의 동태에도 실망하지 않았다. 중구난방으로 요동치던 기세를 한 방향으로 가다듬은 선봉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
타루스의 선봉이 미궁의 입구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김진우는 안젤라의 음성에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린 언제 움직일까요?”
“최대한 늦게 끼어들도록 하지. 어차피 처음에 들어간 놈들은 다 죽는다고 봐야 하니까.”
일만의 정예와 맞바꾼 기회, 도대체 우르수스들이 어떤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 함정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나고 나서 진입하는 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는 방법이었다.
슬쩍 타루스들의 왕을 보니 선봉에 신경 쓰느라 그를 비롯한 흡혈귀들이 무얼 하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군.”
대관절 정예 전사 일만을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준비한 그 대단한 함정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직접 체험해 볼 생각은 없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벌써 절반이 넘는 타루스들이 미궁 안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르수스들은 침묵을 지켰다.
처음에는 요란스럽게 포효하며 땅을 울려대던 타루스들도 어느 순간이 되자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타루스들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머리가 들어서기를 기다리는 건가.”
김진우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선 타루스들의 왕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 어떤 타루스보다 거대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공작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멈추지 않는 전사들의 행렬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 어떻게 할 테냐. 네가 움직이지 않는 이상, 이번 전투는 시작하지 않는다.”
그는 우직한 생김새와는 달리 약삭빠른 타루스들의 왕이 어떻게 나올지 짐짓 기대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주인이시여.”
그때 릭샤샤가 바싹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동편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나이다.”
“방향은?”
김진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남쪽, 바로 이곳으로 향하고 있나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으로 대미궁이 적습에 노출될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전투보다 내심 대미궁을 신경 쓰고 있던 입장에서는 다행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안심할 수도 없었다. 대미궁은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정작 본인은 아직도 전장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상대는 그가 이제껏 상대해 본 적 없는 강자들이었다.
무려 셋이나 되는 공작이, 오랜 세월 동안 지배자로 군림해 온 끔찍한 괴물이 바로 그의 상대였다.
“주인님, 머리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릭샤샤의 보고를 받던 김진우가 안젤라의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 털 빛 붉은 타루스 오그레 친위대를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한 거대한 타루스의 모습이 보였다.
“친위대의 뒤를 따라 이동한다.”
우르수스들이 노리는 것은 틀림없이 타루스들의 지배자였다. 그러므로 당연히 가장 위험한 전장은 타루스의 왕이 있는 곳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저 거대한 타루스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흉험한 전장 속에서도 가장 끔찍한 위험이 도사린 곳, 그곳이야말로 그의 만찬장이었다.
***
김진우가 타루스들을 따라 우르수스들의 미궁에 들어선 그때, 먼 곳에서부터 그의 흔적을 더듬어 이동하는 그림자가 있었다.
샤샤샥.
흔들림 없이 느긋한 어깨에 비해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속도가 기이할 정도로 빨랐다. 그림자의 이동은 은밀하면서도 신속했고, 또한 쉼이 없었다.
“하악, 하악.”
꽤나 먼 거리를 이동한 듯 이따금씩 거친 숨을 내뱉었지만, 그림자는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무언가를 쫓는 것 같기도, 반대로 쫓기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가요.”
잠시 숨을 고른 그림자가 다시 속도를 올려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