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56)
던전 견문록-256화(256/319)
# 256
던전 견문록
제 257 화
90. 붉은 성
치열한 전투로 고조된 악의와 투기 사이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가장 먼저 낌새를 알아차린 것은 김진우였다.
그는 고조된 군기 사이로 불쑥 고개를 들이민 무지막지한 기운의 파동을 느꼈고, 이내 그것이 우르수스들이 준비한 함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꼈을 때는 이미 너무 늦고 난 후였으니까.
“피해!”
폭발은 그야말로 찰나였고, 그는 다급한 경고와 함께 억눌렀던 하이로드의 힘을 개방시키는 게 고작이었다.
콰앙!
섬광, 굉음, 그리고 충격.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열기에 온 세상이 하얗게 바랬다.
***
용제는 사실 이번 원정이 내키지 않았다. 강대한 공작에게도 층을 벗어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었고, 9층에는 자신 못지않은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한 용족의 후예들마저도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그의 시선이 삼천의 드라칸 사이에서도 유달리 금빛 번쩍이는 드라칸을 쫓았다.
몇 남지 않은 금룡의 마지막 후예이자, 일만 드라칸의 정점에 설 왕자, 자신의 아들이 그곳에 있었다.
“으음.”
드물게 보이는 무거운 한숨, 자랑스러운 후예를 보는 그의 심경은 복잡하기만 했다.
희석된 피의 증거, 기상과 기백은 온데간데없고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그럴싸한 외양뿐인 반편이, 그것이 자신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 반편이 드라칸이야말로 이 모든 일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오르테아가 아니었다면, 과묵한 그가 용언에 얽매이는 일 또한 없었으리라.
하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수천의 드라칸을 이끌 수 있는 것은 금룡의 후예뿐이었고, 비록 반편이일지언정 오르테아가는 분명 금룡의 피를 이은 귀한 존재였다.
설령 이 결정으로 인해 많은 일족이 희생될지언정 드라칸을 하나로 규합할 수 있는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일족의 힘은 강대했지만, 지저의 사나움은 강대한 용의 후손이라고 해서 얕볼 수 없었다.
“용기병이 모두 도열을 마쳤습니다.”
블랙 머천트가 급하게 마련해 준 포탈을 넘어선 드라칸들이 도열을 마치고 보고했다.
“전 용기병 진군, 방향은 북쪽이다.”
용제의 나직한 한마디에 일천의 드라칸들이 일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차라라락.
갑작스레 비늘이 바짝 일어섰다. 용제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오오오오오.
얼마나 먼 곳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아득한 어딘가에서 느껴진 강렬한 기운의 파동에 저도 모르게 몸이 반응한 것이다.
“이게 무슨…….”
***
“아아.”
눈에 불을 켜고 나가의 알들을 지키고 있던 모리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머리통을 떼어 바닥에 굴려대며 무료함을 참아내던 발자크도, 억센 부리로 날개깃을 고르던 헤임달도 모두 그녀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주인님과의 연결이 끊어졌어…….”
오직 주인만을 위해 살아간다고 해도 좋을 소환수들, 그런 그들이 주인과의 교감을 잃은 것이다.
“혹시 지상에 올라가신 건…….”
발자크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지만 모리건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달라.”
주인과 텔레파시를 주고받는 능력은 없다. 왕의 대리자처럼 그 의중을 파악해낼 수단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더라도 주인의 존재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교감이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주인이 지상에 올라 연결이 희미해졌을 때조차 느껴지던 가슴 한 구석의 충만감이 사라진 것이다.
세상이 무너진 듯한, 몸의 일부가 뭉텅 잘려져 나가 텅 비어버린 듯한 끔찍한 기분. 모리건은 언제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위대한 군주이자 자신의 주인이었던 외눈박이 군주를 잃었을 때, 지금과 똑같은 감각을 느꼈었다.
“아, 안 돼. 두 번 다시는…….”
당당함을 넘어 평소 오만하기까지 했던 모리건은 끔찍한 상실감에 몸서리쳤다.
“침착해, 모리건.”
그나마 발자크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머리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주인님이 잘못됐다면 미궁이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잖아?”
그러고 보니 군주의 소멸과 함께 활동을 멈춰야 할 미궁이 건재했다.
***
“주인님! 주인님!”
김진우는 꿈을 꾸듯 몽롱한 감각을 뚫고 들어오는 새된 비명에 겨우 반응할 수 있었다.
“아아, 안젤라?”
“주인님, 괜찮으세요?”
눈을 몇 번이나 끔뻑여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가뜩이나 꿈속을 헤매는 듯한 부유감에 정신이 없는데 보이는 것마저 없으니 지독스러울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그런 어둠뿐인 세상에서 꿀빛 머리에 창백한 얼굴의 안젤라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어디지?”
정신을 잃었던 것도 아닌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여긴 이면층이에요.”
“이면층?”
상층, 저층, 심층만 구별 할 줄 알았지 이면층이라는 단어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그에게 안젤라가 차분히 설명했다.
“층과 층 사이에 존재하는 음의 경계. 진혈을 지닌 자만이 드나들 수 있는 이면의 세상이죠.”
옛 지저를 다스리던 군주들이 처음부터 열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그 강대함을 인정받아 뒤늦게 하이로드의 자리에 오른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진혈의 흡혈귀, 어둠의 지배자였다.
“진혈의 군주는 아무 것도 남기지 못했다고…….”
“정확하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게 아니라, 아무도 알지 못했던 거죠.”
그녀는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너무나도 여유 있어 보였다. 게다가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혈의 군주는 파편이라도 흩뿌린 다른 하이로드와는 다르게 파편은커녕 흔적조차 지저에 남기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진혈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 점이 이상해 물으니 그녀가 곧장 대꾸해 왔다.
“그냥 저절로 알게 됐어요.”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권능을 얻는 것은 찰나였고, 얻게 된 순간 싫어도 알게 되게 마련이니까.
“제가 또 뭘 알게 됐는지 알려드릴까요?”
안젤라는 짐짓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들썩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피가 솟구치고 살점이 튀는 전장에 있었던 것이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제가 말씀드렸죠? 이곳은 진혈을 지닌 존재만이 들어설 수 있다고.”
그녀는 노래하듯 자신이 피의 계약을 유지한 채로 진혈을 얻었기에 완벽하지 않은 각성을 이룬 대신, 주인인 그가 이면의 층에 들어설 수 있었노라 말했다.
“말하자면 고대 이후로 이곳에 들어선 사람은 주인님과 저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설마 그 말은…….”
그가 얼떨떨한 말투로 말끝을 흐리니 안젤라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맞아요. 이곳은 어느 누구도 찾지 못했던.”
그녀의 하얀 손끝이 저 멀리 어딘가를 가리켰다.
“왕의 무덤이자, 잊혀진 하이로드의 미궁이에요.”
그녀의 손끝이 닿자 어둠뿐인 세상이 변화했다.
[과거 하이로드들이 지저를 다스리던 시절, 흡혈귀는 옛 군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였습니다. 어둠을 다스리는 진혈의 능력은 강대한 군주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진혈을 따르는 수많은 권속과 피조물은 하이로드들의 군대만큼이나 막강했습니다.] [하이로드들은 이 강대한 어둠의 지배자를 마침내 군주로 인정하고 지저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끔찍한 적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이로드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실체조차 드러나지 않는 어둠의 영지였습니다. 실제하면서 실제하지 않는,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어둠의 본거지는 강대한 군주들이라고 해도 늘 그림자를 되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눈앞에서 점멸하는 메시지 창 너머로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가 드러났다.
[이면층, 층과 층의 경계에 위치한 붉은 성을 발견했습니다.] [붉은 성은 과거 하이로드들마저도 꺼려 했던 강대한 흡혈귀 군주가 지배하던 영지입니다.] [어느 누구도 찾지 못했던, 그 누구도 들어서지 못했던, 진혈의 힘의 근원에 들어선 당신은 행운아입니다.]안젤라는 과장스럽게 허리를 꺾어 보이며 그에게 말했다.
“붉은 성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주인님.”
실용성을 중시한 미궁들은 장엄하고 단단한 맛은 있을지언정 투박하고 단조로웠던 것에 반해, 붉은 성은 호화로움 그 자체였다.
약동하듯 생명력이 넘치는 조각상들은 정교하고 아름다웠고, 벽마다 내걸린 그림은 기괴했지만 기품이 있었다. 보보마다 밟히는 카펫의 감촉도 더할 나위가 없었다.
“빨리 가요, 주인님.”
안젤라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는 김진우를 재촉했다.
“어딜 가자는 거지?”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팔짱을 끼고 다그치는 그녀의 태도가 하도 막무가내라 그렇게 물으니,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런 큰 선물을 받았는데 확인해 보지 않는 건 이상하잖아요.”
안젤라는 잔뜩 들떠 있었다.
오랜 시간을 투자해 모은 권속이 전멸했다. 그들의 소멸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강렬한 폭발에서 살아남는 것은 무리였다.
이미 머리가 알고 있었고, 몸이 느끼고 있었다.
권속이 늘어날수록 힘이 강해지는 진혈의 흡혈귀에게는 뼈아픈 타격이었다. 그런 상실감을 그녀는 새롭게 발견한 붉은 성을 통해 만회하고자 하는 듯했다.
“자, 가요.”
“끄응.”
아무런 단서도 없었던 또 다른 하이로드의 유산을 찾았으니, 그 역시 가슴이 뛰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냥 좋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장에 있었던 자신이다. 비록 이면층에 들어서는 것으로 우르수스들이 준비한 함정을 피했다고는 하나, 단지 살아남았다는 것에 감사하기에는 그는 욕심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이대로 이면층에서 노닥거리다간 그토록 공을 들였던 전쟁의 전리품을 엉뚱한 놈이 채가고 만다.
비단 전리품이 아니더라도 9층의 공작들은 언젠가 그가 꺾어야 할 적이었으니, 누가 되었든 승리를 독식한 승자가 비약적으로 강해지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장 안젤라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진혈의 군주가 남긴 유산은 매력적이었다.
비록 다른 하이로드들과는 다르게 피로 전승되는 유산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을지언정, 그 언저리에 놓인 유물 몇 개를 챙기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이득일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쪽은 아직 한창 싸우는 중이니까요.”
그의 고민을 눈치챈 것인지 안젤라가 웃으며 말했다.
“저쪽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거야?”
“자세한 건 모르지만, 난폭하고 강대한 생명력이 명멸하는 것은 알 수 있어요.”
그녀의 말에 김진우는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아직은 시간이 남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어차피 지금 돌아가 봐야 만신창이가 된 타루스들과 복수심에 불타는 우르수스들 사이에서 힘만 빠질 뿐이었다.
그는 결정을 내렸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안젤라는 신이 나 그를 이끌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김진우는 화려하게 치장된 복도를 지나 붉은 성의 심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래도록 주인도 없이 방치되었던 붉은 성은 새로운 주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다.]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붉은 핵이 벌컥거리며 그와 그녀를 맞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