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57)
던전 견문록-257화(257/319)
# 257
던전 견문록
제 258 화
두근. 두근.
찬탈자조차 찾지 못했던 고대의 유산이 오랜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붉은 성을 지배하는 핵, 피의 근원이 공명합니다.] [각인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의도치 않았던 행운. 우르수스가 준비한 함정에 빠져 낭패를 보는가 싶었더니 이런 요행수가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김진우는 마구 꿈틀거리는 탐욕의 권능을 제어하며 서서히 핵과 정신을 공명시켰다.
“아…….”
하지만 마구 뛰어대던 심장은 금세 멎어버렸다. 그는 온몸의 기력이 다 빠져나간 듯한 지독한 상실감에 저도 모르게 신음하고 말았다.
[각인 작업에 실패했습니다.] [자격이 부족합니다.] [붉은 성을 지배할 수 있는 합당한 지배자는 오직 진혈을 이은 존재뿐입니다. 안타깝게도 당신은 진혈의 흡혈귀를 수하로 두었지만, 스스로 진혈을 지니지는 못했습니다.]일이 지나치게 잘 풀린다 싶었더니, 역시나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그는 고조되었던 기운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바람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아아…….”
원한다면 흡혈귀 군주의 유산에 담긴 기운을 먹어치울 수도 있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산해진미를 눈앞에 두고 내쫓기기라도 한 것처럼 요동을 치는 탐욕의 권능을 풀어놓기만 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끄응.”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충동을 참아냈다. 그저 기운만 집어삼키기에는 이면층에 위치한 붉은 성의 존재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군주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는 요새는 그 자체로 가치가 무궁무진했다.
이런 보물을 기운만 취하고 폐기하는 것은 실로 멍청한 짓이었다.
[각인 작업을 할 수 없습니다. 피의 근원이 당신을 거부했습니다.]혹시 몰라 다시 한 번 각인을 시도했지만, 피의 근원은 여전히 콧대가 높았다.
김진우는 고민했다. 그는 이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가급적이면 통째로 집어삼키고 싶었다. 맛과 향, 풍미. 그 어느 것 하나 놓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핵은 몇 번이고 그를 거부했고, 설상가상으로 메시지는 경고했다.
[이면층에 도달한 당신은 현재 전장을 벗어난 것도, 벗어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해서 이면의 세계에 머물 경우 완전히 전장에서 이탈하고 맙니다.] [전장에서 이탈할 경우, 전승의 타이틀이 사라집니다.] [타이틀이 사라지기까지 앞으로 29분 48초 남았습니다.]“이런 망할.”
예기치 못하게 시간 제한이 생겨버렸다. 그는 급하게 안젤라에게 물었다.
“다시 이면 세계에 들어올 방법이 있어?”
“음, 힘들 것 같아요. 경황 중에 우연히 맞닿았을 뿐, 저는 이곳에 어떻게 오는지 알지 못해요.”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 역시나였다. 끔찍한 폭발의 한가운데서 생명이 경각에 달하지 않았다면 다시 오지 않았을 행운이었다.
“나중에 다시 들르는 건 무리겠군.”
오늘 이 자리에서 고대의 유산을 취하지 못하면,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었다. 고민을 거듭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서둘러 전장에 복귀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전승의 영광된 기록 사이로 ‘후퇴’라는 이름의 불명예가 기록될지도 모릅니다.] [타이틀이 사라지기까지 앞으로 18분 22초 남았습니다.]자꾸만 줄어가는 시간을 보며 그는 더욱 더 생각에 집중했다.
***
끔찍한 폭발이 휩쓸고 간 우르수스들의 미궁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하지만 그 무지막지한 화염과 충격마저도 전쟁을 끝마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워어어어어!”
불꽃이 채 사그라들지 않은 폐허 속에서 상처 입은 타루스들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우르수스 하이들을 맞아 싸웠다. 뿔이 꺾이고 화염과 폭발에 휩쓸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을지언정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투지만으로 이겨내기에는 상황이 결코 좋지 않았다.
비록 전멸은 피했다지만 단 한 번의 폭발로 절반에 가까운 전력을 잃었다.
용맹했던 만큼 중심에 깊게 들어섰던 타루스 오그레들의 피해는 극심했고, 이제까지 내내 웅크린 채 힘을 비축하고 있었던 우르수스들의 분노를 상대하기에는 힘이 달렸다.
설상가상으로 공작 스스로도 예상치 못하게 힘을 소모하고 말았다. 원통한 일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나서지 않았다면 타루스들은 폭발에 휩쓸려 전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놈들도! 많은 수의 병력이 폭발에 휩쓸렸습니다!”
뿔 하나가 그대로 녹아버린 친위대장이 부르짖었다.
아직은 자신들이 우위라고, 우르수스 하이가 일만이나 희생된 상대편도 그다지 사정이 좋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친위대장은 거듭 고했다.
과연 용맹한 타루스 오그레 중 제일가는 전사다운 발언이었고 투지였다. 공작 역시 친위대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물러서지 않는다. 오늘 이곳에서 백곰들을 끝장낸다.”
“우오오오오오!”
주인의 여전한 정복욕에 고무된 타루스들이 일제히 포효했다.
“으음.”
사기가 올라 일시적으로나마 기울었던 전장의 균형이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던 공작의 표정은 결코 좋지 않았다.
전승의 사령관은 폭발에 휩쓸린 것인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전승이란 이름이 있었기에 적의 본진 안에서도 불리한 싸움을 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전승의 사령관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이제까지 체감하지 못했던 적의 증폭 효과가 무겁게 아군을 짓눌러왔다.
지금이야 악에 받쳐 비슷하게 싸우는 시늉이라도 한다지만, 시간이 갈수록 적들은 힘이 회복될 것이고 아군은 지쳐갈 것이다.
그야말로 위기였다. 게다가 문제는 그 하나가 아니었다. 동맹으로 끌어들였던 동편 미궁의 전력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동맹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동맹이 자신들 이상으로 큰 피해를 입었기를 바라고 있었다.
힘의 저울추가 완전히 기울어 버린 동맹은 경우에 따라 적보다 더 위험한 관계가 되기 십상이었으니까.
가능하다면 비슷한 수준의 타격을 입었다면 더할 나위도 없으련만, 그건 그다지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르수스들이 미치지 않은 이상에야 제 본거지를 통째로 날려버릴 생각은 하지 않았을 터, 그렇다면 폭발의 범위는 타루스들의 진입로 인근에 한정되었을 것이다.
결국 만신창이가 된 것은 자신과 타루스들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지.”
전황은 불리했지만 그는 추호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사나운 맹수들은 피투성이가 된 짐승을 가만두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그와 타루스들이 상처 입은 짐승 쪽이었다.
숙적을 꺾고 우르수스들의 핵을 빼앗지 못한다면 내일은 없다. 그는 전의를 다졌다.
하지만 전황은 공작의 의지와는 별개로 점점 불리해지고 있었다. 지친 타루스들은 이제 한계를 보이고 있었고, 우르수스들은 시간이 갈수록 미궁의 증폭 효과에 회복이 되고 있었다.
점점 벌어지는 힘의 격차, 쐐기라도 박듯 마침내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나타났다.
“꼴이 말이 아니군. 맹우(猛牛)들의 왕이여.”
어슬렁거리며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 백곰이 조롱기 가득한 음성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토록이나 아끼던 우르수스 하이 군단을 잃은 그대가 할 말 같지는 않구나.”
공작은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들의 희생을 제물삼아 숙적의 피를 제단에 올리게 되었으니, 일만 우르수스 하이들의 죽음도 헛되지는 않도다.”
느긋한 말투와는 달리 우르수스들의 왕은 쿵쾅거리며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엄선된 백곰 친위대들이 지친 타루스들을 짓밟으며 길을 열었다.
백곰들의 왕은 아무래도 힘을 소진한 공작이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오랜 숙적이여, 오늘이 그대의 마지막이다.”
우르수스들의 왕이 친위대를 밀치고 나오더니 발을 굴렀다. 이제까지 고상을 떨던 것과는 달리 과격하기만 한 돌격, 타루스들이 속절없이 밀려나며 앞이 뻥 뚫리고 말았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
공작의 거대한 뿔 사이로 뇌전의 기운이 맺혔다. 그 끔찍한 폭발조차 밀어낼 정도로 파괴적인 벼락이 응축되고 응축되다 전방을 향해 쏘아졌다.
우르수스들의 왕도 지지 않았다. 억센 주둥이 사이로 백광이 모인다 싶더니, 그대로 쭉 뻗어 나왔다.
벼락과 냉기, 지저에 다시없을 순수한 에너지가 서로를 향해 짓쳐들어 갔다.
“피해! 휘말려 든다!”
타루스들은 강대한 기운의 충돌을 대비해 온 사방으로 흩어졌다. 지금만큼은 눈앞의 백곰들도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 역시 공작들이 내지른 기운을 피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으니까.
“음…….”
폭발에 대비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온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어?”
예상했던 폭발과 굉음 대신 그들의 귀에 들려온 것은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누군가의 얼빠진 목소리였을 뿐이다.
***
시간 제한에 걸린 김진우는 결국 이면층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사납게 울부짖는 벼락과 소리 없이 짓쳐드는 냉기였다.
“어?”
미처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그는 힘을 해방시켰다. 억눌러왔던 하이로드의 강대한 기운이 금세 사방으로 뻗쳐 나갔고, 그 사이에 몸을 일으킨 포식의 권능이 탐욕스럽게 아가리를 벌렸다.
사납게 몰아치던 두 갈래 기운이 순식간에 탐욕의 권능에 휘말려 들어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후우.”
상당한 에너지가 담겨 있었는지 그는 이면층에서 소모되었던 기력이 순식간에 복구되는 것을 느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눈에 얼빠진 얼굴을 한 두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갑작스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기운에 넋이 나간 듯했다.
“아주 신나서 날뛰어댔구만.”
폐허가 된 미궁, 그리고 온 사방에 낭자한 피를 보며 김진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그대가 어떻게!”
백광 뒤에 숨어서 달려오던 거대한 우르수스 한 마리가 뒤늦게 그를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네놈이 백곰들의 우두머리군.”
어지간히 덩치 큰 우르수스 하이들마저도 눈 아래로 볼 정도로 거대한 백곰, 척 보기에도 강대한 기운에 그가 눈을 번뜩였다.
“역시 지저에서 누구를 믿는다는 건 멍청한 짓이야. 꼴을 보니 그 폭발이 노리고 있었던 건 타루스들만이 아니었던 것 같네.”
살기등등한 노란 눈동자를 번뜩이는 거대 백곰, 미미르가 말했던 온건하고 신의 있는 존재는 이곳에 없었다.
“어쨌건 다행이네. 혹시나 네가 보낸 사자와는 다르게 우리 말이 통하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거든. 꼭 말해주고 싶었던 게 있었서 말이지.”
김진우는 더없이 기쁜 얼굴로 웃어보였다.
“반갑다, 이 개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