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58)
던전 견문록-258화(258/319)
# 258
던전 견문록
제 259 화
91. 악룡의 현신
서로 다른 꿍꿍이를 숨기고 전쟁에 임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백곰 쪽이 조금 더 괘씸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갑작스레 전력을 보강하여 패배를 안겨주려 했던 것이 한 번, 무지막지한 폭발로 자신을 처리하려고 했던 것이 한 번이었다.
그렇게 두 번이나 자신의 뒤통수를 치려 했던 상대가 이뻐 보일 리가 없었다.
우르수스는 노골적인 적의에 차라리 체념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대는 공생을 모르는 무자비한 정복자이자 패배를 모르는 폭군, 훗날을 도모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자라네.”
스스로를 되돌아보건데 백곰 공작의 말이 영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사정이 있었다 한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평화롭게 일이 마무리될 가능성은 전무했다.
“뭐, 지나간 일을 따지는 것도 의미 없지.”
그는 다소 뻔뻔할 정도로 백곰의 말을 인정했다.
“지금은 앞으로의 일이 중요하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진우의 존재감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헛!”
백곰 공작이 숨을 들이켜며 온몸에 힘을 주었다. 당장에라도 쏟아져 나올 듯 주둥이 근처에서 백광이 어른거리고, 억센 털이 칼날처럼 일어났다.
스스로 한 짓이 있으니 당연하게 자신을 공격할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그가 향한 곳은 엉뚱한 방향이었으니, 말이 통하지 않는 탓에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타루스들이었다.
***
공작은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전승의 사령관을 보며 긴장했다.
비록 동맹을 맺었다고는 하지만 저울추가 기울 대로 기운 전장에서 신의를 찾을 수는 없었던 탓이다.
그런데 전승의 사령관이 백곰들을 향해 보이는 적의가 왠지 심상치 않았다.
비록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승의 사령관이 노골적으로 적의를 보이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공작은 그 험악한 분위기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장 우르수스들의 왕은 이쪽을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보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힘을 숨기고 있었던 음흉한 동맹이 찝찝하기는 했지만, 힘을 회복할 시간을 벌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당연히 백곰들을 먼저 상대할 거라 생각했던 전승의 사령관이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엇?”
허를 찔렸지만, 공작의 자리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공작은 풀어졌던 근육을 순식간에 조이며 적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쾅!
양 뿔 사이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새파란 벼락이 튄다 싶더니, 금세 온몸을 감싸는 뇌전의 갑주가 되었다.
***
근육질의 거체가 번쩍거리는 뇌갑으로 둘러싸이는 것을 본 김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름대로 기습을 시도한 것인데 역시나 통하지 않았다. 공작은 순식간에 임전태세를 맞췄고 뇌전의 갑주 어디에도 허점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걸음을 늦추지도 방향을 틀지도 않았다.
분명 눈앞의 거대 황소는 강력한 상대다. 오랜 시간 동안 심층의 지배자로 군림해 오며 축적한 힘은 결코 가짜가 아니었으며, 어지간한 백작들 따위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기세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가장 약자였다.
우르수스의 함정에 빠져 이미 한 번 크게 힘을 소진했으며, 전황이 열세에 놓인 탓에 전력을 다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그는 당연하게도 힘이 빠진 상대를 먼저 처리할 생각이었고, 그게 공작에게는 불행이었다.
“헙!”
김진우는 달리던 자세 그대로 마창을 겨눈 채 팽팽히 당겼다가 그대로 내쏘았다.
꺄아아아아아아.
목표를 빗나가는 법이 없는 고대의 병기가 공기를 찢어발기며 포효했다.
쾅!
전력을 다한 투창에 공작이 한 발 물러섰다.
꺄아아아아아아!
뇌전으로 만들어진 갑주에 튕겨 나왔던 마창이 그의 손에 빨려들 듯 회수되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창을 내질렀다.
쾅!
이번에는 공작이 두 걸음을 물러섰다.
쾅! 쾅! 쾅!
점점 창을 내지르는 속도가 빨라진다. 공작은 이제 숫제 뒷걸음치듯 계속해서 밀려나고 있었다.
“잔챙이들은 비켜라!”
압도적인 존재감에 벌벌 떨면서도 주인의 위기에 앞으로 나섰던 타루스 친위대가 마창의 기세에 휘말려 갈기갈기 찢겨졌다.
순식간에 피보라가 솟구치고 붉은 안개가 사방을 에워쌌다.
“그워어어어!”
하지만 공작에게는 그 잠깐의 틈으로 충분했던 모양이다. 연신 밀려나던 공작이 다시 앞으로 나서며 머리를 숙였다. 거대한 뿔 사이에 맺힌 전격의 기운이 폭발했다.
김진우는 마창을 쥔 반대편 손을 뻗어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뇌격을 남김없이 흡수했다.
팔뚝 끝이 저릿저릿해질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었지만, 수백 가닥 벼락 중 그의 권능을 뚫어낸 것은 단 한 가닥도 없었다.
쾅!
마창이 다시 날았다. 이번에는 공작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렇게 물러서서는 답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차라리 마주 달려오는 것을 택했다.
김진우는 뇌전에 동화되다시피 한 공작을 향해 다시 한 번 창을 내지르며, 힐끗 등 뒤의 백곰을 보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것도 잠시, 거대한 백곰은 금세 간사하게 눈을 굴리며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용할지 궁리하고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 백곰이 어부지리를 노리고 끼어들기 전에 저 성난 황소를 제압해야 했다.
김진우는 더욱더 힘을 끌어올렸다.
[고유 능력, 서리 전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인근 300미터 영역에 강력한 냉기가 생성됩니다. 적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질긴 가죽이 부서지기 쉽게 되었습니다.] [서리 갑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냉기의 갑옷을 두른 당신은 이제 어지간한 공격에는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서리 칼날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냉기로 이루어진 수백 가닥의 칼날이 적의 심장을 향해 쏘아집니다.]순식간에 퍼져 나가는 냉기. 기대 이상의 효과였다. 아무래도 냉기 속성을 지닌 우르수스들의 미궁에서 사용한 탓에 효과가 증폭된 모양이다.
작은 행운에 감사하며 그는 다시 하나의 권능을 꺼내 들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힘이었다.
[가장 존귀하고 강대한 나가, 나가라자(용왕-龍王)가 현신했습니다.] [고대 이후로 완전히 사라졌던 용의 힘이 다시금 지저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연약한 피부 위로 단단한 비늘이, 관절마다 날카로운 돌기가 돋아났다.
지저의 괴수들에 비하면 가녀리기만 했던 어깨가 떡 하고 벌어지고 팔과 다리가 길어졌다.
겨우 타루스들의 허벅지에 가 있던 눈높이가 그들을 눈 아래로 볼 정도로 불쑥 자라 있었다.
나가라자의 힘을 이끌어 낸 김진우는 흡사 드라칸과도 같았다.
기다란 주둥이가 없다 뿐이지 외양만 봐서는 얼추 드라칸의 먼 친척 뻘이라고 우겨도 될 지경이었다.
투둑.
그렇게 모습이 변한 그였지만, 변화는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그간 흡수해 온 기운들이 한데 어우러져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호법의 힘을 지닌 용왕이 불순한 기운에 잠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지저의 신비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입니다]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김진우는 비장의 한 수라고 뽑아든 용왕의 힘이 마구잡이로 폭주하는 것을 느끼고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푸르게 돋았던 비늘 사이로 검은 얼룩이 생겨나더니, 엇 하는 사이에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죄악의 마군이 지녔던 온갖 상서롭지 못한 것들의 원념이.] [탐욕의 군주가 지닌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욕망이.] [요정 군주가 지녔던 진지하지 못한 요사스러움이.] [외눈박이 군주가 지녔던 진리에 대한 집착이.] [이제껏 흡수했던 모든 힘이 하나로 어우러져 공명하기 시작합니다. 이 변화의 끝이 무엇일지는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선택권은 없습니다. 용왕의 힘이 현신된 순간, 모든 기운은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이 변화의 끝이 당신에게 이롭기를 기도하십시오.]갑작스러운 그의 변화에도 맹목적으로 달려들던 거대한 황소는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반룡반인(班龍班人)을 보고는 더욱 더 속도를 올렸다.
“이놈! 네놈을 먼저 꺾고 저 간악한 백곰을 처리할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 소리,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알량한 승리감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등 뒤에서 백광이 터져 나오며 무지막지한 기세가 짓쳐들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대와의 승부를 미루겠노라!”
상황을 지켜보던 우르수스의 왕이 계산 끝에 누가 더 위협적인 상대인지를 깨달은 듯했다.
앞뒤로 가해지는 공격에 김진우는 분노했고 공명하던 기운들이 그 격렬한 감정의 폭풍에 휘말려 이리저리 밀려나다 마침내 자리를 잡았다.
[하나로 어우러질 것 같았던 기운은 끝내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권능의 여운이 일족의 수호자, 용왕의 청정을 완전히 깨는 것만큼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장 고귀한 나가, 나가 일족의 호법, 용왕의 용태(龍態)가 악룡(惡龍)이 되었습니다.]***
주인과의 교감은 돌아왔지만, 여전히 감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모리건을 비롯한 소환수들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쩍.
그렇게 잔뜩 날이 서 있던 소환수들의 신경에 거슬리는 소음이 잡혔다.
쩌저적.
고개를 돌린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이리저리 상처 입고 볼품없이 변해 있던 나가의 알이 일제히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아.”
갈라진 틈을 비집고 툭, 하고 푸른 팔뚝이 튀어나왔다.
“나가들이!”
***
악룡의 현신, 끔찍한 재앙의 도래에 가장 먼저 희생된 것은 타루스들의 왕이었다.
기세 좋게 뇌전으로 화해 달려들 때만 해도 승리를 자신했던 그는 악룡의 코앞에 도달해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물러서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전력을 다해야 했다.
잠깐이라도 멈추었다간 그대로 잡아먹힐 것 같은 위기감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불길한 괴물의 현신에 위기감을 느낀 백곰들의 왕이 사납게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 이른 안심이었던 모양이다.
“컥!”
난생 처음 느껴보는 끔찍한 통증, 공작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뇌전의 기운으로 전승의 사령관을 짓밟았는데, 왜 자신이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가슴께가 뭉텅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통증에 그는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음?”
뭔가가 이상했다. 분명 자신은 뇌전의 갑주로 온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몸뚱아리는 누런 가죽을 내민 채 완전히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거머리의 그것처럼 흉물스럽게 생긴 물체가, 우람한 흉근을 찢고 파고드는 모습이 보였다.
“끄악!”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기력, 공작은 한층 더 깊게 머리를 파묻는 악룡의 머리통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