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60)
던전 견문록-260화(260/319)
# 260
던전 견문록
제 261 화
92. 나가 여왕
뜨겁게 불타던 심장이 차갑게 식었을 때, 김진우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상황을 인식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귀처럼 사냥감을 찾아 헤매던 괴수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난 후였다.
그는 정신이 들자마자 자신의 내부를 관조했다.
끔찍할 정도로 강렬했던 허기와 갈증이 화인처럼 남은 심장은 아직도 욱신거렸다.
“잠깐, 잠식됐던 것인가.”
대미궁에 의해 정신이 잠식되었던 적이 있었지만, 한 번 겪어보았다고 해서 이번 경험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의지에 무언가가 개입한다는 건 그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아니. 이번엔 잡아먹혔던 게로군.”
게다가 조금씩 허점을 파고들어 어느 순간 악의에 흠뻑 젖어들어야 했던 지난 경험과는 달리 이번에는 노골적이고 위협적이었다.
실제로 그는 굶주린 짐승처럼 맹목적으로 움직였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던 그는 이제껏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메시지 창이 껌벅거리는 것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나가라자(용왕)는 가장 고귀한 나가입니다. 안으로는 만팔천이백삼십 나가들의 생사여탈을 손에 쥔 강력한 호법룡이자, 밖으로는 외적으로부터 나가들을 지키는 수호룡입니다.] [원래대로라면 그런 나가라자가 악의에 오염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가라자이기 이전에 탐욕의 군주입니다. 만족을 모르는 탐욕을 지닌 당신에게, 어쩌면 명경지수의 마음을 지닌 용왕은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가장 푸르렀어야 할 용왕의 비늘은 검게 물들었고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은 무너지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끝없는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는 악룡의 광폭함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웅혼하지만 방어적이었던 청룡의 형을 잃고, 대신하여 사납고 공격적인 악룡의 형을 얻었습니다.] [나가라자의 용태가 악룡으로 고정되었습니다.]역시나 짐작했던 대로였다. 악룡이라는 불길한 단어를 작게 되뇌던 그는 내부를 관조하던 의식이 어느 순간 확장되어 외부를 향하는 것을 느꼈다.
“주인님!”
울먹임이 가득 담긴 음성, 악의에 오염되었던 그 순간에도 몇 번이나 영혼에 닿았던 목소리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울먹임은 다르다. 지금의 울먹임에 담긴 것은 절망이 아닌 환희와 안도감이었으니까.
“도미니크.”
그는 죽음을 감수하고 악룡 앞에 몸을 던졌던 바보스러운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고마워. 덕분에 또 한 번 죽다 살았어.”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주인님. 저는 정말 주인님이 제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줄 알고…….”
말조차 끝맺지 못하고 다시 흐느끼는 사랑스러운 나가 아가씨, 그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와락 그녀를 안아 버렸다.
“들렸어. 몇 번이고 도미니크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어. 단지 껍데기가 너무 단단해 바로 나오지 못했을 뿐이야.”
축 늘어져 있었던 도미니크의 팔이 그의 허리를 감았다.
“아…….”
그런 그의 눈에 다시 한 번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알을 깨고 나온 왕의 대리자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오직 주인만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던 왕의 대리자는 언제나 당신의 곁에 서기를 원했고, 바깥과 단절되어 사고마저 멈추었던 변태의 순간에서조차 그녀는 소망하고 또 소망했습니다.] [그 덕분에 그녀는 다른 나가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원한 것은 진화와 성장이 아닌, 오직 당신의 곁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본신의 전투 능력은 크게 상승하지 않았지만, 특수 능력과 고유 능력이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헌신과 봉사,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제 염려를 넘어 주인과 사고를 공유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그녀는 아무리 멀리 떨어지더라도 당신과 교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정관의 위엄, 그녀는 대미궁의 가장 사소한 것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주인을 위해 티끌만 한 대미궁의 손상도 두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왕의 대리자, 그녀의 권한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당신의 위엄이 손상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나가들은 왕의 대리자에게 경의를 표할 것입니다.]메시지를 빠짐없이 읽던 김진우는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변화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이니, 그는 이내 이어진 메시지에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이제 당신 이후로 가장 고귀한 나가가 되었습니다.] [도미니크가 왕의 대리자에서 나가 여왕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녀가 나가 여왕의 고유 능력을 얻었습니다.] [고유능력, ‘반려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가장 고귀한 나가의 피를 계승할 수 있는 씨앗을 잉태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고유 능력, ‘왕의 전령’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충성스러운 군대를 당신의 곁으로 소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유 능력, ‘내조’를 얻었습니다. 그녀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힘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증폭될 것입니다.]***
도미니크는 주인의 무사함에 기뻐했고, 환희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환희와 기쁨 대신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참람하게도 ‘여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자신의 성장에 혹시라도 주인의 심기가 상할까봐 걱정이 된 것이다.
절로 힘이 빠져, 주인의 허리를 감았던 손이 툭, 하고 떨어졌다.
“아…….”
그런 그녀를 주인이 밀쳐냈다.
그녀는 절망했다. 주인의 기분이 역시 상했던 모양이라고, 한낱 시녀에 불과했던 자신이 여왕의 자리를 꿰찼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그녀는 자책했고 후회했다.
분에 넘치는 열망이 이런 사달을 일으킨 것이다.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 분수 모르는 자신의 뺨이라도 쳐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도미니크.”
주인의 눈길이 자신을 향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주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궜다.
“죄, 죄송해요. 저는 단지…….”
사죄 또한 주제를 모르는 행동이리라. 하지만 그녀는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주인에게 사과했다.
몇 번이고 죄송하다고, 주제를 몰랐다고 울먹이며 사죄했다.
“아.”
정신없이 사과하던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쥐는 주인의 손길이 생각보다 부드럽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온화하게 웃어 보이는 주인의 얼굴이 보였다.
두근, 두근.
점점 가까워지는 얼굴, 그녀는 저도 모르게 기대하는 얼굴이 되어 입을 오므렸다.
마구잡이로 뛰어대는 심장 소리가 주인에게 닿지 않기를 바라며, 그녀는 얼빠진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닿을 듯 가까워진 숨결, 하지만 안타깝게도 뜨거운 숨은 금세 멀어지고 말았다. 아쉬움에 슬쩍 눈을 올려 뜨며 주인의 눈치를 살핀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발견했다.
“주인님?”
주인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저 먼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
“쉿! 가만!”
도미니크는 갑작스레 무거워진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다.
***
공기가 달라졌다. 주인 잃은 미궁 특유의 고요함은 여전했지만, 김진우는 방금 전과 지금의 침묵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유 역시 알고 있었다.
“미궁이 소멸했군.”
비활성화된 미궁이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기 위한 잠에 빠져든다면, 소멸된 미궁은 완전히 생기를 잃고 침묵한다.
그리고 지금 불라베스의 미궁은 명백하게 후자의 상황이었다.
“이런 망할 놈을 봤나.”
김진우는 이를 갈았다. 자신이 두 공작을 상대하는 사이에 핵을 탈취한 약삭빠른 작자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동편 미궁의 지배자, 알리토스가 끌어들인 제3의 공작이 움직인 것이다.
“주인님. 이건…….”
“아무래도 엉뚱한 놈이 선물 꾸러미를 연 모양이다.”
김진우는 냉랭한 얼굴을 해보였다. 갖은 공을 들여 불을 피우고 뜸을 들여놨더니 막상 밥솥의 뚜껑을 연 것은 엉뚱한 놈이다.
욕심 많은 그가 화가 나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다.
역시나 그는 사나운 얼굴로 멀어져 가는 기운 한 가닥을 잡아내고는 내달릴 준비를 했다.
“주인님!”
그런 그를 도미니크가 불러 세웠다.
“시간이 없다. 도미니크.”
날 선 표정으로 그리 말하니, 충성스러운 나가 여왕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가 손가락 사이로 힐끗 아래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주인님, 옷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던 그가 자신의 행색을 살피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거대한 악룡이 되어 미궁을 설쳐댔던 그는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지만, 악룡의 거체를 견디지 못하고 찢겨졌던 갑주와 옷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즉,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망할…….”
공작급 미궁의 핵을 탈취당하느냐 마느냐의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알몸으로 날뛰어댈 수는 없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뒤져 전사한 흡혈귀 하나의 옷을 벗겨냈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에 엉망진창으로 찢어진 옷이었지만 가까스로 치부를 가릴 수는 있었다.
“이제 가자.”
결의를 다잡은 자신의 음성이 오늘따라 어색하게만 들리는 건 왜인지, 김진우는 괜스레 필요 이상으로 냉기를 풍기며 나아갔다.
***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핵을 탈취한 얌통머리 없는 공작의 뒤를 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탐욕의 권능은 늘 배가 고팠고 사냥감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는 그 게걸스러운 식탐을 따라 달리는 것만으로도 공작을 추적할 수 있었다.
“음?”
그런데 한참을 달리던 그는 문득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저쪽도 공작의 자리를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면, 이쪽에서 일어났던 소란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두 공작을 집어삼킨 정체불명의 적. 바보가 아니라면 꽁지가 빠져라 달아났을 것이다.
그런 공작의 기운이 어느 순간 더는 나아가지를 않고 있었다. 게다가 어디서 전투라도 벌이는 것인지 수시로 명멸하는 생명의 기척이 소란스럽기만 했다.
“아…….”
김진우는 그 사이로 느껴지는 이질적이면서도 친근한 기운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안젤라군.”
이면층에 남겨두었던 진혈의 흡혈귀가 드디어 행동에 나선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저 멀리서 음습한 죽음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
“끔찍하군.”
생기가 빨려 원형조차 알아볼 수 없는 시체는 처참했다. 탐욕의 권능이 지나간 자리가 흔적조차 남지 않은 폐허라면, 진혈의 흡혈귀가 휩쓸고 간 자리는 그야말로 죽음 그 자체였다.
“이게 안젤라의 힘인가요?”
“아, 이면층의 일은 전해지지 않은 것인가.”
도미니크가 황급히 이곳까지 달려온 것은 그녀의 염원과 헌신이 실체화되어 특수한 교감을 이루었던 탓이다.
그녀는 자신의 주인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고, 새롭게 얻은 고유 능력을 통해 그를 돕고자 했다.
뜻하지 않게 악룡이 된 주인을 도울 수 있었지만, 완전히 지저와 단절된 이면층에서 벌어진 일만큼은 그녀도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진혈의 흡혈귀가 벌인 참상에 순수하게 감탄을 표하는 도미니크를 보며 김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진혈의 힘이 아니야.”
그는 그녀에게 이면층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