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61)
던전 견문록-261화(261/319)
# 261
던전 견문록
제 262 화
“아니요, 저는 받을 수 없어요.”
말과는 달리 붉은 성의 심장을 바라보는 안젤라의 눈에는 열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제 주인을 제치고 근원을 차지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그녀는 몇 번이나 거부했다.
“피의 근원을 이을 수 있는 건 진혈을 계승한 자뿐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나는 인간이지.”
“그럴 바에 차라리 주인님께 진혈을 나누어 드리겠어요.”
생각지도 못한 방법, 하지만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그게 가능한 것인지를 떠나 그녀의 말은 그다지 반가운 말이 아니었다.
“나더러 흡혈귀가 되라는 건가?”
정곡을 찔린 것인지 안젤라는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방금 전과는 달리 입을 꾹 다물었다.
김진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혀를 찼다.
파수꾼이 아닐까 의심했던 적도 있었으나, 하이로드의 권능마저도 주인에게 양보하는 그녀의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 앙큼스러운 흡혈귀는 아직도 음습한 욕망을 버리지 못했으니 마침내 제 주인을 동족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모양이다.
지금에 와서는 방심한 틈을 노려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지 않는 게 고마울 판국이었다.
“나는 흡혈귀가 될 생각이 없어.”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아니, 근원을 얻는 것은 너다.”
반론의 여지조차 두지 않는 단호한 음성에 안젤라가 금세 풀 죽은 얼굴을 해보였다.
이쯤 되면 하이로드의 권능에 대한 갈망조차 참아낼 정도의 집착이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근원을 취해라.”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근원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싸워라.”
결국 안젤라는 한숨을 내쉬며 다가섰다.
“주인님, 그거 아세요?”
그녀의 눈동자 너머로 복잡한 감정이 스쳐갔다.
“이 근원이라는 거, 정말 미치도록 매력적이에요. 당장에라도 이걸 먹어치우고 싶어서 미치겠어요.”
자신의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벌컥대는 근원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갈망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결코 손을 뻗어 그것을 취하지는 않았다.
“근데 말이에요.”
김진우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이 미치도록 매력적인 근원보다, 전 주인님이 몇 배는 더 매력적이에요.”
무슨 소린가 했더니,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다.
“포기해, 난 절대로 흡혈귀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
시간이 없다. 서둘러 전장에 복귀하지 않으면 이제껏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무너지고 만다.
“혹시라도 계약이 풀리면 속상한데.”
진혈을 얻는 과정에서조차 지켜낸 피의 계약이지만, 하이로드의 권능을 얻고 나서도 그 효력이 유지된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는 황당하게도 영광된 순간에도 그 보잘 것 없는 족쇄를 더 신경 쓰고 있는 듯 보였다.
“아이참, 진짜. 주인님 때문이잖아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투정, 김진우는 더 그녀를 보채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진한 체념의 감정을 엿보았던 탓이다.
“나 주인님한테 완전 길들여졌나 봐요.”
그녀는 뜬금없이 신경질을 부렸다.
“몰라요. 계약이 풀렸다고 해도 저 버리시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마침내 제 고집을 꺾고 근원에 성큼 다가섰다.
“그때는 정말 콱, 주인님을 물어버릴 테니까.”
진지하지 못한 흡혈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앞이 번쩍이며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지저에 새로운 하이로드가 탄생했습니다.]***
“아…….”
이면층에서의 이야기를 전부 전해 들은 도미니크는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애매모호한 소리를 내뱉었다.
“주인님, 이 모든 게 과연 우연일까요?”
도미니크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했다. 하지만 김진우는 놀라지 않았다. 그 역시 같은 의문을 지니고 있었던 탓이다.
왜 자신의 주변에 유달리 하이로드의 파편이 모여들까. 권능을 쫓아 눈이 벌게져 헤매던 심층의 백작들은 그렇게 공을 들이고도 인연이 되지 않아 모조 대미궁만을 얻었을 뿐이다.
그런 그들에 반해 자신은 어떤가. 지금까지 찾은 과거의 파편만 해도 무려 다섯이었다.
외눈박이, 요정, 진혈, 광휘. 이중 그가 노력해서 닿은 것은 없었다. 전부 처음부터 주변에 존재했거나 누군가가 억지로 연을 이어준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상황이 공교로움을 눈치채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진혈의 화신 역시 예언을 들먹이지 않았던가.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도 만족할 줄 모르는 무저갱이 그대 안에 도사리고 있구나.’
‘아아, 내가 어찌하여 그 끔찍할 정도로 긴 세월 동안 영혼이 흩어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었는지, 이제야 기억이 나노라.’
‘눈 하나와 바꾼 예언, 빛으로 만든 약속, 십만 요정들의 머리카락으로 땋은 인연의 실. 모두 하나를 가리키고 있으니.’
‘나 또한 그 약속의 증거가 되기를 기꺼이 자처하겠노라.’
‘나 가장 붉은 피로 증언하리니.’
‘예언은 이루어질 것이다.’
도대체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자신의 성장이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앞서 각성한 세 하이로드를 제외한 거의 모든 파편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 들었을 리가 없었다.
김진우는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두 공작의 힘을 흡수하고 다소 들떴던 기분이, 나가의 귀환으로 가슴 한구석을 채운 안도감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최소한 셋, 또는 넷의 하이로드가 주인님을 통해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게 아닐까요? 아니,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르죠.”
문제는 그 뭔가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모골이 송연한 그녀의 말에 그는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결코 길지 않았다.
“결국 새로 탄생한 하이로드들은 전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는 건가.”
또 다시 누군가가 멱살을 잡고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바꾸려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웃었다.
비록 자신의 성장 이면에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었다 한들, 몸속에 품은 권능은 자신의 것이었으니까.
“일단은 저 아래층에 계신 오지랖 넓은 분을 만나 봐야 되겠군.”
얄궂게도 이면에 도사린 음모를 깨달았음에도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
시체를 따라 걷기를 한참, 어느 순간이 되자 짙은 안개가 깔리지 않은 구역이 없었다. 죽음의 기운이 짙게 녹아든 안개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뻔한 일이었다.
“이게 그녀가 새로 얻은 힘인가.”
김진우는 작게 감탄을 토했다. 곁에 선 도미니크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무지막지하군.”
사기(死氣), 사자들의 왕이라 불렸던 발리셔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농도 짙은 기운이 안개 속에서 넘실거렸다.
“음?”
핏물을 뭉쳐 만들어놓은 듯한 안개가 일순간 좌우로 쩍 갈라졌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드러나는 광경은 이제까지 보았던 참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끔찍한 것이었다.
시체, 시체, 시체.
사방에 시체가 가득하다. 통로를 가득 메운 시체 탓에 기껏 열린 안개의 길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사자를 애도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깜찍한 짓을 하는군.”
김진우는 웃었다. 당돌한 흡혈귀가 아무래도 초대장을 준비한 모양이다.
“음.”
산 자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까무러칠 정도로 거북한 기운. 하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었다.
안젤라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안내라도 하듯 안개가 걷혀졌으니 그저 길을 따라 걸으면 그만이었다.
“여기가 우리 자리인 모양이다.”
오는 내내 단 한 번도 막힘이 없던 길이 붉은 안개에 막혀 있다. 김진우는 어렴풋이 안젤라가 이번 전투에 그가 개입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뜻대로 나서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던 탓이다.
모든 하이로드들이 진혈의 군주를 꺼려 했던 것은 분명 실체를 찾을 수 없는 붉은 성 하나 때문은 아니었으리라. 그는 진혈의 군주가 지닌 진짜 힘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안개 너머에서 기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기가 짙어진다. 그리고 그에 저항하듯 폭급한 야성이 솟구친다. 하지만 야성은 이내 죽음의 기운에 삼켜지고 금세 구슬픈 비명을 내지른다.
김진우는 직감적으로 결판이 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끝났군.”
안개가 걷혔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붉은 안개가 흩어지다 마침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드러난 저 너머에 안젤라가 활짝 웃고 있었다.
***
김진우는 처참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살아 꿈틀대는 고깃덩이를 보며 황당한 얼굴을 해보였다.
“이게 선물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안젤라가 선물이라도 내놓은 물건은 사지가 잘려나간 흉물스러운 육신이었던 것이다.
“네, 저래 뵈도 공작인걸요.”
안젤라는 뻔뻔스럽게도 머리라도 쓰다듬어달라는 것인지 슬며시 그에게 붙어왔다.
“끄응.”
김진우는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놀랄 일이었다. 한낱 모조 흡혈귀에 불과했던 그녀가 무려 심층의 공작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로 만들었다. 그것도 만전의 준비를 마치고 전장에 뛰어든 공작을 대패시키고 생포한 것이다.
심지어 생글거리는 안젤라의 얼굴에는 격전의 피로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발갛게 홍조를 띈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혈색 좋은 모습이었다.
“제가 취한 것은 생기. 주인님께서 필요로 하는 힘은 고스란히 남겨두었어요.”
그녀는 마치 시식 코너에서 신상품을 홍보하는 판매 요원이라도 된 것처럼 경망스럽게 그를 부추겼다.
차라리 악룡의 상태였다면 좋았을 것을.
흉물스러운 몰골을 보니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하지만 선물이 선물이니만큼 마냥 거절할 수도 없었다.
꼴이 어찌 되었든 간에 공작은 공작이었으니까.
결국 그는 버르적거리는 공작의 힘을 모조리 흡수했다. 비록 악룡으로 변했을 때처럼 심장을 취하고 존재 자체를 먹어치운 것은 아니지만, 겁 없이 전쟁에 끼어들었던 동편 공작의 힘을 흡수하기에는 충분했다.
“어라?”
느긋하게 자신의 주인이 식사를 하게 내버려두었던 안젤라가 도미니크를 보고는 새삼 놀란 얼굴을 해보였다.
“어쩐 일이야, 나가 아가씨가. 지금쯤이면 알 속에서 코- 자고 있을 때 아닌가?”
그 말투가 마치 자신이 주인과 함께 사지에서 고생하는 동안, 넌 무얼 했냐는 듯해 도미니크가 분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건 깨어난 건 축하해. 근데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크게 변한 건 없어 보이네.”
도미니크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경망된 태도는 전과 다름없건만 하이로드 특유의 존재감이 더해지니 전처럼 편하게 대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김진우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분명 안젤라의 성장은 기꺼운 일이다. 하지만 미묘하게 기가 눌린 도미니크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알쏭달쏭해진 것이다.
보다 못한 그가 적당히 중재할 생각으로 막 나서려던 참에 도미니크가 입을 열었다.
“그러는 그쪽은 잠깐 안 본 사이에 많이 변했네요.”
“보시다시피 몸에 좋은 걸 좀 먹었거든.”
안젤라는 으스대듯 기고만장한 얼굴이었지만, 그 표정이 구겨지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걸 말한 게 아닌데. 그쪽, 지금 주인님하고 계약 해지된 상태잖아요.”
아킬레스건이었다. 우려했던 대로 안젤라는 붉은 성과 권능을 계승하며 그토록이나 지키려 했던 피의 계약이 끊어지고 말았다. 기분이 좋을 턱이 없었다.
그녀는 말문이 막혔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렸다.
“그걸 어떻게…….”
“글쎄요, 어떻게 알았을까나.”
헌신과 봉사의 능력이 상승하며 얻은 사고의 교감, 이제 상황은 역전되었다.
“계약도 무효고, 이제는 완전 남이네요.”
하지만 안젤라도 지지 않았다. 그녀는 금세 표정을 수습하고는 색기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글쎄, 남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특별하지. 네가 자고 있는 사이에 우린 조금 더 깊고 어른스러운 관계가 됐거든.”
묘하게 자신감 어린 말에 도미니크가 안젤라의 말을 곱씹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 주인님?”
갑작스레 벌겋게 상기된 그녀의 신색이 마치 몹시 부끄러운 뭔가를 떠올린 것 같다. 날 선 태도로 기싸움을 하던 그녀가 방금 전과는 달리 충격받은 얼굴로 허둥지둥 댔다.
아무래도 주인과의 교감 능력이 과거의 민망한 어느 날 되짚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