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62)
던전 견문록-262화(262/319)
# 262
던전 견문록
제 263 화
탈취당했던 미궁의 핵을 찾았고, 덤으로 동편 미궁의 지배자도 처리했다. 그렇지만 일이 전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직 수거하지 못한 미궁의 핵이 두 개나 있었고, 오르테아가의 전언을 듣고 9층에 진출한 용제와 만나 봐야 했다.
“음, 이렇게 일이 흘러갈 줄 알았다면, 차라리 용제라는 패를 아껴둘 걸 그랬나.”
힘이 달릴 것을 예상해 용제를 동원했다. 일이 잘못되더라도 용제가 빈집털이를 하면 최소한 알리토스만큼은 제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탓이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어요. 일이 까딱 잘못됐으면 주인님은 최소한 공작 둘, 어쩌면 셋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을지도 모르니까요.”
도미니크의 말에 김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로 오르테아가라는 카드를 다시 쓸 수 없게 되었지만,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딱 필요한 만큼만 전력을 동원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이번 전쟁은 많은 변수가 작용했다.
“얼굴도 똑바로 못 보면서 말은 잘 하네.”
안젤라의 비아냥 가득한 음성에 진지하기만 했던 도미니크의 표정이 와락 무너졌다. 그녀는 전에 없이 빨개진 얼굴로 안절부절 못했는데, 주인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해 어색하게 시선을 돌려댔다.
“음.”
그는 태연한 척했지만, 저도 모르게 저 순진한 나가 여인을 저리 당황하게 만든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그걸 그렇게… 으, 그렇게까지라니…….”
도미니크는 이제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재빨리 머리를 비운 그가 상황을 수습해 보려고 했지만, 안젤라가 그렇게 두지를 않았다.
“그렇게만 했을까? 또 이런 것도, 저런 것도.”
“안젤라!”
놀리는 기색이 역력한 그 음성에 김진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게 후딱 해치워버리시지. 왜 꾸물거리다 순서를 꼬아놔요, 꼬아놓기를. 이게 다 주인님 때문이라고요.”
찔끔 놀란 그녀였지만, 끝까지 지지 않고 항변했다. 도대체 무슨 순서가 꼬였다는 것인지. 아무래도 지상에서 지낸 시간 동안 보았던 아침 드라마가 그녀에게 좋지 못한 영향이라도 끼친 게 분명했다.
가뜩이나 말 안 듣던 안젤라가 이제 계약의 굴레마저 벗어나 동등한 하이로드가 되었으니 앞날이 훤하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주인의 내심을 짐작이라도 한 것일까. 안젤라는 도리어 겁을 집어먹었다.
“계약이 풀렸다고, 함부로 굴지 않을게요. 절대로 그러지 않을 테니, 주인님. 저 버리시면 안 돼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김진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뒤늦게 안젤라의 눈동자에 떠오른 두려움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진혈의 군주가 된 그녀는 주인과의 끈이 끊어졌다는 사실에 전전긍긍해 하고 있었다.
그녀는 갑작스레 자신에게 던져진 자유에 해방감보다는 두려움을 느끼는지,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타인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이 가엾은 흡혈귀는 아무래도 홀로 서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린 모양이다.
심장이 쿡쿡 찌르는 듯한 느낌이다.
김진우라고 왜 저 심정을 모르겠는가. 그 역시 거미 공작에 의해 갑작스레 자유를 얻었을 때,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환호하는 대신 두려움에 휩싸였었다.
혹독한 감독관의 채찍질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완전한 목표의 상실, 아마도 소희라는 여인이 없었다면 그는 기어코 도굴꾼으로 지저에 남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축으로 태어나 짐승처럼 부려진 그는 노예 근성이란 말조차 모를 정도로 결여된 것 투성이었으니까.
“날 떠날 건가?”
“그럴 리가요. 주인님이 버리지 않는 한, 아니, 버리시더라도 떠나지 않아요.”
버림받을까봐 부들부들 떠는 주제에 말은 잘한다. 제 딴에는 비장하게 말한다는 것이 그의 눈에는 한없이 연약해 보였다. 그는 드물게 부드러운 얼굴로 안젤라를 달래주었다.
“네가 날 배신하지 않는 한, 나는 널 버리지 않아. 나는 내 것을 쉽게 놓는 성격이 아니니까.”
“주인님!”
안젤라가 와락 안겨왔다.
“저는 주인님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아요. 온 지저가 주인님께 등을 돌려도 저만큼은 절대로 주인님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때 아닌 고백에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그는 가슴이 뭉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열렬한 구애가 어디 있겠는가. 비록 집착이 유난스럽고 음험한 흡혈귀지만 지고지순한 충성과 애정만큼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래, 그러니 그렇게 안달내지 않아도 돼.”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머릿결을 쓸어주었다.
“음.”
탄성도 신음도 아닌 묘한 소리, 김진우는 그제야 도미니크의 복잡미묘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안젤라를 떼어냈다.
주인의 품을 벗어나기 싫은 것인지 다소 앙탈을 부린 안젤라였지만 이내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한 발 물러났다.
“언니.”
그녀가 도미니크에게 다가가 던진 말이었다.
“언니?”
“순서가 뭐가 중요해요. 어차피 한 주인님을 모실 건데.”
점입가경, 도대체 어떤 드라마를 보았던 것일까. 김진우는 시청 지도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주인님,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죠?”
현명한 도미니크도 지금만큼은 상황 파악이 안 됐는지 얼떨떨한 얼굴을 해보였다. 하기야 먼저 나고 늦게 나고 따위 아무래도 좋은 지저에서 그녀가 언니라는 말을 어디서 들어보았겠는가.
“끄응.”
진혈의 군주, 하이로드의 자존심마저 내팽개치고 도미니크에게 친한 척을 하는 안젤라의 모습에 그가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짐짓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은 김진우의 입꼬리는 웃고 있었다. 제 나름대로 문제를 만들지 않겠다는 안젤라의 의지가 필사적으로 보여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주인을 잃고 새로운 주인을 맞아들일 준비를 마친 두 미궁의 핵을 수거하는 것은 안젤라의 몫이 되었다. 그녀는 이면층을 넘나드는 것만으로도 한참이나 떨어진 두 미궁을 순식간에 다녀왔다.
“하나는 건졌지만, 하나는 이미 늦었어요.”
안젤라가 건넨 미궁의 핵은 동편에 위치했던 미궁의 것뿐이었다.
“음, 용제가 조금 더 빨랐던 모양이군.”
김진우는 수거하지 못한 미궁의 핵 하나가 어디에 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엉뚱한 놈이 챙겼군.”
속이 쓰렸지만, 그는 도미니크의 말대로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용제의 위치를 알 수 있나? 아니다, 용제라면 분명 나를 찾아올 테지. 이대로 돌아간다.”
명예를 소중히 하는 용제라면 분명 대미궁을 찾을 것이다. 무려 공작급 미궁의 핵이 걸린 문제였지만 김진우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용제가 자신을 찾을 이유는 비단 미궁의 핵 하나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가자.”
대미궁으로 귀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김진우는 안젤라의 협조를 받아 붉은 성을 다시 한 번 찾았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이면층에서 대미궁으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
“왕이시여!”
“주인님!”
자신을 반기는 소환수들을 보며 그는 비로소 이 전쟁이 끝이 났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
[해룡의 심장을 얻기 전의 나가들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완전하지 않았으며 일족의 힘을 꺼내 쓰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한 신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나가들이 알에서 깨어나며 본래의 모습을 완벽하게 찾았습니다.] [나가 일족이 나가-진(Naga-眞) 일족이 되었습니다.]기다란 꼬리는 여전했지만 그 위로 돋아난 비늘은 이제 뱀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청룡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사자의 갈기를 닮은 머리는 억세고 한층 더 용맹해 보였고, 강인한 어깨 아래 돋아난 네 개의 팔은 각기 창과 방패, 그리고 두 자루의 칼을 움켜쥐고 있었다.
[까마득한 옛날 심층의 호수 속에서 살아가던 푸른 용의 비늘에서 태어난 이 일족은 비록 용의 힘을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용의 전지전능함을 닮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깊은 지혜와 강인한 신체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나가-진 일족은 기존의 나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입니다.]“왕의 고난에 함께 맞서지 못한 종들을 벌하여주소서!”
자신들의 불충을 사죄하는 퀀투스의 음성이 전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쉭쉭거리는 날 선 바람 소리와도 같은 음성이 지금은 마치 천둥처럼 우렁차기만 했다.
[나가 친위대(정예) 용사 퀀투스가 나가-진 친위대장(영웅)이 되었습니다.] [이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전사는 언제나 주인을 지키는 검과 방패가 되기를 소망해 왔습니다.] [나가-진이 되며 친위대장 퀀투스는 한 쌍의 팔을 더 얻었고 그 결과, 왕을 수호할 방패뿐 아니라 적의 심장을 관통할 창과 사지를 잘라낼 날카로운 검을 갖게 되었습니다.] [퀀투스는 그 자체로 왕을 수호하는 요새이자 적을 관통하는 창이 되었습니다.] [나가-진 친위대장은 왕과 그 일족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험난함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친위대장 퀀투스가 특수 능력 ‘불굴’과 ‘무쌍’을 얻었습니다.] [친위대장 퀀투스는 그 어떤 강적을 맞이하더라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심층의 강대한 지배자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김진우는 끝없이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해룡의 심장을 통해 새롭게 거듭난 나가-진 일족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맹해진 것이다.
그가 보아왔던 군대 중 가장 강력했던 우르수스 하이 군단과 타루스 오그레 군단에 못지않은 위용이었다.
[나가 마법사들이 전원 나가-진 마도사(영웅)가 되었습니다.] [마도사들은 공격 마법뿐 아니라 온갖 잡다한 마법에 능통한 존재들입니다.] [나가-진 마도사들이 ‘서리의 집대성’을 얻었습니다. 서리와 한기 속성에 관한한 그들이 모르는 주문은 없습니다.] [수많은 냉기 마법을 얻은 마도사들이지만 그들의 탐구욕과 호기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주문과 무언가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때로는 그 탐구욕과 호기심이 화를 불러올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연구는 일족에게 커다란 도움이 될 것입니다.]이건 별로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가뜩이나 골치 아픈 나가 마법사들의 호기심과 탐구욕이 여전하다니 벌써부터 머리꼭지가 서늘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도 순수하게 기뻐했다.
공격 일변도였던 마법사들이 이제 다방면에 두루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크나큰 이득이었으니까.
[나가 용기사들이 나가-진 용기병(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타던 호법룡들은 교룡의 피 속에서 태어난 존재지만, 이제는 보다 용에 가까운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가-진 일족이 근원으로 삼았던 푸른 용의 외양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습니다.] [이 용맹한 기수들은 전보다 더 위협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전투에 돌입하면 호법룡과 완벽한 일체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용과 기수가 하나 된 이 강력한 기병들의 돌파력은 무시무시합니다. 그들의 돌파를 막아낼 수 있는 존재는 지저에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그 뒤로도 계속해서 메시지가 이어졌다.
[나가 사제가 나가-진 대사제(영웅)가 되었습니다.] [나가 궁수가 나가-진 저격수(영웅)가 되었습니다.] [나가 병사가 나가-진 수호병(영웅)이 되었습니다.]얻은 능력도 변화도 제각각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모두가 영웅급 소환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해룡의 심장은 지저에 드물게 강대한 힘을 지닌 귀물이었지만, 모든 나가-진들이 영웅급에 오른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아무래도 다이달로스의 연구가 이러한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불러들인 것 같았다.
김진우는 저 멀리 빼꼼 보이는 커다란 머리통을 힐끗 보고는 이내 나가들에게 웃어주었다.
“잘 돌아왔다. 나의 병사들이여.”
***
기다렸던 용제 대신 먼저 대미궁을 찾은 것은 미미르였다. 이 귀 밝은 임프는 그새 전쟁의 결과를 알아낸 것인지 온갖 선물과 함께 대미궁에 찾아왔다.
“축하드립니다, 군주님. 지저에 다시 없을 대승이었습니다.”
손을 싹싹 비벼대는 미미르의 모습을 보며 김진우는 웃어보였다. 그런데 어쩐지 그의 미소가 서늘하기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대에게 물어볼 게 있었지.”
눈치 빠른 임프답게 그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알아차린 미미르가 눈알을 굴려댔다.
“뭐를 말씀이십니까?”
“끝까지 모른 척할 셈인가?”
김진우는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이제는 숫제 으르렁거리는 듯한 그의 음성에 미미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우르수스들이 준비한 불꽃놀이, 네놈의 짓이 아니던가?”
우르수스들이 준비한 화염지옥이 어찌나 뜨겁던지 수천의 흡혈귀들이 녹아내렸고, 하마터면 그 역시 부상을 당할 뻔했다.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요.”
“백곰들에게 위험스러운 폭죽을 구해준 게 네놈 아니더냐!”
냉기를 부리던 백곰들이 불러일으킨 거대한 폭발, 김진우는 그 화염의 잔재에서 지상의 기운을 찾아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