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64)
던전 견문록-264화(264/319)
# 264
던전 견문록
제 265 화
식은땀이 났다. 이토록 지저의 공기가 무겁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김진우는 처음으로 도미니크와 독대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음.”
괜스레 헛기침을 해보아도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도미니크의 표정이 수시로 변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도리질을 치는가 하면, 금세 또 다부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양 뺨을 감싸 잡고 고개를 푹 숙여 보이기도 했다.
그랬던 그녀가 어느 순간이 되자 더 이상 불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평온한 안색이 되자 이번에는 김진우가 불안해지고 말았다.
아직도 시선을 맞추지 못해 힐끗거리고는 있지만 이따금씩 스쳐가는 도미니크의 눈빛이 어쩐지 필요 이상으로 비장했던 탓이다.
거기에 나가 특유의 서늘함이 더해지니 그는 포식자를 눈앞에 둔 초식동물처럼 솜털이 바짝 섰다.
“도미니크?”
왠지 모르게 어깨를 움츠린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니, 고개를 도리질 쳤다.
“네, 주인님.”
순식간에 가라앉은 눈빛, 그는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나가 여왕은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존재입니다. 그녀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헤쳐 나갈 방법을 모색했고, 마침내 그 방법을 찾아냈습니다.]안심하기에는 너무 일렀던 모양이다. 도미니크는 포기한 게 아니었다. 눈앞에서 번쩍거리는 메시지 너머로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여왕은 우유부단한 주인의 결단을 돕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녀는 현명한 나가답게 모든 일은 처음이 어려울 뿐, 두 번째는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김진우는 번뜩이는 나가 특유의 눈동자를 보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반려의 자격을 지닌 여왕이 작정하고 능력을 발동시켰습니다.] [왕을 향한 ‘구애’ 능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가 사내의 애간장을 녹입니다. 순결하면서도 더없이 색정적인 몸짓에 버텨낼 사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있더라도 당신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랜 시간을 곁에서 지켜보며 어느 누구보다 왕의 취향을 잘 헤아리는 그녀의 유혹은 당신을 위한 특별한 구애 행위입니다.]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말캉한 느낌이 와 닿았다.
[하이로드의 강대한 정신력이 이 치명적인 유혹에 저항합니다.] [저항에 성공했습니다. 여왕의 구애는 더 이상 당신을 흔들 수 없습니다.]눈이 번쩍 뜨이며 정신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 너머로 거부당할까 겁에 질려 몸을 떠는 여인의 수줍음을 보았던 탓이다.
[저항에 성공한 당신은 원한다면 여왕의 구애를 완전히 중지시킬 수 있습니다.]김진우는 눈앞의 메시지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지저의 시스템이란 놈도 어지간히 낭만이 없는 놈이다. 이렇게 가련하게 몸을 떠는 여인을 앞에 두고 매몰차게 내치라 등을 떠밀고 있으니까.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젓는 것으로 눈앞의 메시지를 털어버렸다. 그리곤 도미니크를 안아주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고 탐스러운 입술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짜릿한 쾌감과 아찔한 감촉이 그의 머리를 관통했다.
흡혈귀와의 입맞춤은 야만적이고 퇴폐적이었다. 혀와 혀가 오가는 황홀한 경험은 아찔할 정도의 쾌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는 존재가 무너지는 듯한 위협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단순히 입을 맞추었을 뿐인데도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따스함이 더없이 나른하고 기분이 좋았다.
쾌락보다는 충만함이 컸다. 그는 진정으로 감동했고 덕분에 마지막 망설임마저 완전히 지울 수 있었다.
황홀한 입맞춤에 살짝 눈이 풀린 도미니크가 보채듯 허리를 감아왔다. 차가운 비늘의 감촉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그 찰랑거리는 비늘을 어루만졌다. 어디를 어떻게 만진 것인지 그녀가 턱을 바짝 들어 올리며 허리를 감싼 꼬리에 힘을 주었다.
“음? 꼬리?”
순간적으로 김진우는 지금 이 순간 있어서는 안 될 무언가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나가의 여왕이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는 것은 가장 깊은 밤뿐이었고, 지금은 안타깝게도 밤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 얄밉게 살랑거리는 나가의 꼬리가 보였다.
***
“끄응.”
그토록이나 불이 붙지 않던 장작에 한 번 붙으니 쉽사리 꺼질 생각을 안 한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꺼야 했다. 김진우는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꼬리를 보며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도미니크는 그 사이 또 교감을 시도한 것인지 그가 갑작스레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를 짐작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죄송해요, 주인님. 갑자기 안젤라가 나타나서 등을 떠미는 바람에…….”
그녀답지 않은 궁색한 변명, 그는 애써 대범한 척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하려 했다.
“바, 밤에 다시 올까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이 딱 그런 경우였다.
방금 전의 미묘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대화를 나누는 김진우와 도미니크의 얼굴은 더없이 심각하기만 했다.
“지저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미미르의 말은 거짓같이 들리지 않는군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그의 질문에 그녀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소수의 몇을 제외한 지저의 존재들은 이미 자연적으로 종을 번식하는 법을 잊고 말았어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지저의 존재가 아닌 김진우의 입장에서는 소환수란 핵을 통해 소환해낼 수 있는 존재일 뿐이었다.
당연하게도 종의 번식이니 존속이니 따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화제가 툭, 하고 불거져 나왔는데 끝까지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전쟁은 끝이 없고, 수많은 이들이 그 속에서 소멸되고 있죠. 그중에는 자연적으로 번식할 수 있는 소수의 몇과 핵을 통해서라도 일족을 번영시킬 수 있는 주인들도 있어요.”
김진우는 그제서야 도미니크가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미궁의 소멸은 즉, 종족 하나의 멸족을 뜻한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많은 미궁이 전쟁에 휘말려 사라질 테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언젠가는 지저는 텅 비게 될 것이다.
“그럼 위시 스톤이?”
“짐작이 맞다면 위시 스톤은 일족의 창생멸사(蒼生滅死)를 관장하는, 특별한 힘을 지닌 무언가일 거예요.”
도미니크의 말은 꽤나 합리적이었다.
“혹시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비슷한 힘을 지닌 무언가를 열 열쇠겠군.”
“지저가 멸망한다면 저는 다른 이유가 아닌 자멸밖에 떠오르지 않아요. 지저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공존을 모르는 짐승들이니까요.”
그녀는 거듭 지저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음을 강조했다.
“끙, 그럼 내가 멸망을 앞당긴 건가.”
수천의 폭도를 처리하며 수도 없이 많은 미궁을 멸망시켰고, 바로 최근에도 공작급에 해당되는 미궁을 세 개나 무너뜨렸다.
만약 지저의 멸망이 코앞에 닥쳐 있다면 자신이야말로 멸망을 가속시키는 주범 중 하나인 것이다.
“자멸, 자멸이라…….”
고작 하나의 층을 지배하에 두었을 뿐인 그에게 지저의 멸망이란 와 닿지 않을 정도로 크고 먼 이야기였다.
아니, 솔직한 말로 그는 지저가 멸망하든 말든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과 나가들만 무사하다면 지저 따위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과연 저 약삭빠른 미미르가 지저의 멸망을 막는다는 대의 하나에 저리 몰두할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소한 그가 겪어본 미미르는 그렇게 헌신적이지도, 그릇이 크지도 않았다.
“만약 예상대로 위시 스톤이란 게 지저의 창생멸사를 손에 쥔 물건이라면, 그 안에 담긴 힘은 실로 범상치 않겠지. 놈은 어쩌면 그 힘을 노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고.”
음흉한 임프를 떠올린 그는 최악의 경우마저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저의 멸망을 막으려는 미미르의 눈에는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 아마도 죽일 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리라. 가만히 두어도 죽어가는 지저를 계속해서 병 들어가게 하는 주범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아니겠는가.
미미르가 대의를 위하는 마음이 눈곱만큼이라도 있다면, 결국 언젠가는 그에게 이를 드러낼 것이다.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탐욕의 군주는 지저 어느 누구보다 지저다운 존재, 공존을 모르는 무자비한 지배자였으니까.
“결국 끝까지 함께할 수 없는 건 확실하군.”
더 이상 미미르와 블랙 머천트의 정보력에 기대 고대와의 접점을 찾지 않게 되느냐, 그도 아니면 미미르가 먼저 원하는 것을 찾느냐, 결국 누구의 이용 가치가 먼저 떨어지는지가 문제였다.
“일단 위시 스톤에 대한 건 접어둔다. 께름칙하기는 하지만 당장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문제는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지저의 멸망과 미미르의 시커먼 꿍꿍이가 아니야.”
도미니크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결국 중요한 건 힘이다. 보물을 얻는 건 행운의 여신의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보물을 지키는 건 결국 자신의 힘이니까.”
그 보물이 위시 스톤이든, 지저든, 그도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간에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힘이었다.
“우서와 릭샤샤를 불러라.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는 당장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와 도미니크의 거사가 미루어진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
김진우가 가장 먼저 한 것은 9층 전체를 온전히 자신의 손안에 두는 것이었다.
각기 동서남북을 지배하던 공작이 쓰러진 지금, 더 이상 그에게 대항할 만한 존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9층 전체를 훤히 꿰뚫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우서의 몸을 3분지 2나 뜯어내 탐욕의 덩어리들을 사방으로 뿌렸고, 릭샤샤를 비롯한 언더 엘프들을 다그쳐 정보망을 복구하는 데 열을 올렸다.
더는 거치적거리는 공작도 없고, 심지어 야생 크리쳐마저 사라진 9층에서 그의 발목을 붙잡을 것은 없었다.
작업은 순조로웠고 그는 어렵지 않게 9층 전체를 자신의 감시 하에 두게 되었다.
그렇게 밖으로는 정탐에 열을 올리는 사이, 내부적으로는 전리품을 이용해 지속적인 미궁의 강화 작업을 해나갔다. 세 공작을 처치하고 얻은 천문학적인 전리품과 미미르가 공물로 보내온 무지막지한 보물들은 계속해서 대미궁의 강화, 보수 작업에 사용되었다.
나가들의 수가 1만에 가깝게 늘었고, 놀랍게도 그렇게 소환된 나가들은 전부 영웅급이었다.
그야말로 지저의 어느 누구와 맞붙어도 밀리지 않을 전력, 그는 슬슬 팽창된 힘을 다시 외부로 돌릴 궁리를 했다.
“식사를 하려면 밥솥에 밥이 다 익었는지부터 확인해야겠지.”
김진우는 언젠가 보았던 백작들의 모조품 대미궁을 떠올리고는 순찰자들을 심층으로 파견했다.
만약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아직까지 미궁에 각인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이쯤에서 슬슬 수거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시기를 더 두고 볼 수도 있었으나,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지저에서 괜스레 남 좋은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속된 말로 아끼다 뭐 된다, 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는 순찰자들의 보고에 따라 언제든 11층으로 나설 채비를 마쳤다. 하지만 기다렸던 순찰자들은 귀환하지 않았고 그 대신 엉뚱한 이가 미궁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