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67)
던전 견문록-267화(267/319)
# 267
던전 견문록
제 268 화
94. 2차 복원.
거센 진동과 충격, 수시로 들려대는 기괴한 바람 소리, 김진우는 마치 1차 복원의 그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같았다. 단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그와 대미궁이 방비를 마쳤다는 것이었다.
“도미니크!”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나타난 도미니크가 보고했다.
“현재까지 자잘한 피해는 있지만, 눈에 띄게 위험한 부분은 없어요! 어쩌면 큰 피해 없이 버틸 수도 있을지 몰라요!”
거센 진동에 몇 번이나 쓰러질 뻔하면서도 그녀는 끝끝내 보고를 마쳤다.
“과연 다이달로스를 닦달한 보람이 있었군.”
몇 차례에 걸쳐 보강된 대미궁의 기둥과 벽들은 거센 진동에도 쉬이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생각보다 괜찮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지저란 방심을 먹고 자라는 괴물. 언제 어떤 식으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 바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이심전심, 나가 여왕으로 성장하며 주인의 생각을 공유하게 된 도미니크는 입안의 혀처럼 기민하게 움직였다.
도미니크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홀로 남은 그는 거센 진동에 몸살을 앓는 미궁을 둘러보며 작게 되뇌었다.
“손 놓고 당하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해.”
첫 번째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호되게 당했지만, 똑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이날을 위해 준비한 모든 것들이 대미궁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주고 있었다.
[대미궁이 스스로 냉기를 내뿜어 두터운 얼음 장벽을 치고 있습니다. 이 단단한 얼음 기둥과 벽은 강한 진동에도 미궁이 쉽사리 무너지지 않도록 버텨줄 것입니다.] [대미궁의 요소요소에 준비된 대피소로 소환수들이 대피를 시작했습니다. 현재까지 17%의 병력이 대피를 완료했습니다.] [하지만 철저한 대비에도 불과하고 피해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외곽부 시설의 내구도가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끔찍한 재앙은 그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외곽부의 방어를 포기하고 기운을 집중해 중요 시설을 보호하라.”
결국 그는 꾸준히 누적되는 피해 상황을 지켜보다 외곽부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의 지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미궁이 울부짖었고 외곽부의 시설들이 파괴되었다는 메시지가 잇따라 떠올랐다.
속이 쓰렸지만 아직까지는 충분히 감내 가능한 피해 범위였기에 그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나도 슬슬 움직여야겠군.”
마음 같아서는 오너 룸에 앉아 대미궁의 상황을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다. 혹시 모를 핵의 파손을 대비해 대미궁은 이곳을 완전히 얼릴 것이고, 겨우 나가 하나가 통과할 정도로 얼어버린 통로 역시 폐쇄될 것이다.
쩌저적.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넓은 오너룸이 꽁꽁 얼어붙었다. 푸른 빙벽 너머로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는 세 개의 핵을 바라보던 김진우는 이내 약속된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주인님!”
미리 대피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미니크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분명 교감을 통해 자신의 무사함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인지 그녀는 이제야 겨우 마음을 놓은 기색이었다.
그런데 그 기색이 좀 과도한 기분이라 주변을 살펴본 김진우는 뒤늦게 대피소에 감도는 묘한 분위기를 알아챘다.
오른쪽으로는 아나톨리우스를 비롯한 귀족 출신들이 있고, 반대편에는 모리건과 기존 미궁의 소환수들이 있었다. 바짝 굳은 면면이 어떻게 보아도 절대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상황 파악은 어렵지 않았다.
이전까지야 힘이 달려 굽히고 있었던 귀족 출신들이 아나톨리우스라는 구심점을 만나 따로 파벌을 형성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패를 가르듯 나누어져 각을 세울 이유가 없었다.
“어이가 없군.”
지금의 지진은 절대로 평범한 지진이 아니었다. 전 층에 걸쳐 수많은 미궁을 괴멸시켰던 재앙이 다시 한 번 일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빙벽으로 보강된 대미궁이 잘 버텨주고 있다지만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 싸움을 하고 있다니 차라리 황당할 지경이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가?”
나직한 한마디에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있던 모리건을 비롯한 소환수들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황급히 기세를 갈무리하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고도 그의 언짢은 기색이 가시지 않자 납작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아나톨리우스의 뒤편에 서서 눈치를 보고 있던 귀족 출신들 역시 대미궁의 소환수들을 따라 몸을 낮췄다.
오직 철혈의 거인만이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얼떨떨한 기색을 보였을 뿐이다.
“아나톨리우스.”
김진우가 바싹 메마른 음성으로 철혈의 백작을 불렀다.
“착각하지 마라. 그대는 더 이상 지저의 존귀한 백작도, 미궁의 주인도 아니다.”
윽박을 지른 것도, 협박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나직하게 현실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어쩐지 그의 음성에는 스산한 무언가가 있었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던 아나톨리우스마저도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숙이고 말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아무래도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너무 선선히 수하로 받아주었던 탓일까. 그도 아니면 한때 심층의 지배자 중 하나였던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있는 것일까. 아나톨리우스는 여전히 기세를 완전히 갈무리하지 않았다.
이쯤에서 한 번 위치를 각인시켜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주인님.”
그가 막 손을 쓰려는 찰나, 어둠 속에서 안젤라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처우는 저한테 맡겨주세요.”
그녀는 대뜸 자신에게 아나톨리우스의 처리를 맡겨달라며 졸라댔다.
“네가 그에게 신세를 진 건 알고 있지만, 지금은 사소한 은원을 들먹일 때가 아니야.”
그의 말에 안젤라가 눈가를 휘어 올렸다.
“주인님은 아직도 흡혈귀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시는군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했더니, 안젤라가 허공에서 푹, 하고 꺼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그녀가 나타난 것은 아나톨리우스의 뒤였다.
“우리 일족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계약뿐이에요.”
“음.”
이면층을 얻은 뒤로는 아예 기척을 잡기 힘들어진 안젤라의 신출귀몰함에 그가 탄성을 내뱉었다.
“계약 상대자 외에는.”
아나톨리우스는 뒤늦게 자신의 배후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전부 먹이일 뿐인 걸요.”
하지만 그보다 안젤라가 빨랐다. 그녀는 가차 없이 아나톨리우스의 목에 송곳니를 박아넣고는 섬뜩하게 웃었다.
“끄어어어.”
아나톨리우스는 그 커다란 덩치가 어울리지 않게 무기력했다. 이빨이 닿는 순간 저항하는 것을 포기하고 신음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털썩.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아나톨리우스가 보기 흉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죽이진 않았어요. 주인님께서 따로 쓸 데가 있으실 것 같아서요.”
안젤라는 천연덕스럽게 입가에 흐르는 아나톨리우스의 철혈을 닦아냈다. 펄펄 끓어오르는 거인의 피조차도 진혈의 흡혈귀에게는 입가심에 불과한 모양이다.
“철혈의 아나톨리우스. 머리가 나쁜 건 아니니 아마 이제 깨달았을 거예요.”
그녀는 쓰러진 철혈의 거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말했다.
“과거에 당신이 어떤 존재였고, 얼마나 대단했는지 따위는 잊도록 해요. 그건 이제 아무 의미 없어요.”
안젤라는 뻔뻔하게도 연민의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나한테 감사하도록 해요. 주인님이 나섰다면 장담컨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을 거예요.”
김진우는 그녀의 돌발 행동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나름대로 합당한 처사였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한때 자신의 비호 아래서 겨우 살아남았던 흡혈귀에게 제압당하는 것 이상으로 관계의 재정립을 실감할 방법은 없을 테니까.
“주인님, 이제 흩어진 나가들을 모아야 할 때예요.”
도미니크가 타이밍 좋게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쯧.”
혀를 차는 것으로 아나톨리우스의 비루한 꼴을 일별한 김진우는 잠시나마 기고만장해 있었던 귀족 출신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정신 나간 짓을 한 것인지 깨닫고 사정없이 몸을 떨고 있었다.
“가치 없다.”
그의 한마디가 귀족들의 쓸모없음을 조롱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들을 징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지 애매하기만 했다.
“나가들을 불러라!”
김진우가 명령을 내리는 순간 도미니크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왕께서 이곳에 있으시매, 충성스러운 전사들은 응당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되리라!”
[나가 여왕의 고유 능력, ‘왕의 전령’이 발동되었습니다.] [여왕의 전언을 들은 모든 나가가 이 자리에 소환됩니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공에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고, 그 안에서 나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포탈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의 공간의 문을 보며 김진우는 작게 감탄을 토했다.
잘만 이용하면 쓸모가 많은 능력, 여왕의 진면목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꾸역꾸역 포탈을 넘어오는 나가들을 보며 김진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피소를 조금 더 넓게 지을 걸 그랬나.”
해룡의 알을 통해 한층 성장한 나가들은 지나치게 거대했다. 그런 나가들이 끝도없이 구멍을 통해 넘어오자 넓었던 대피소의 공간이 금세 빽빽하게 차고 말았다.
고오오오오오오.
그 사이에 진동이 더욱 심해진다. 이제까지의 진동이 1차 복원 때와 비슷했다면 지금은 또 차원이 달랐다.
갈수록 거세어지는 진동과 충격, 그리고 지저가 울부짖는 듯한 바람 소리에 김진우가 허공을 바라보았다.
[현재까지 78%의 병력이 대피를 완료했습니다.] [현재까지 84%의 병력이 대피를 완료했습니다.] [현재까지 96%의 병력이 대피를 완료했습니다.] [현재까지 100%의 병력이 대피를 완료했습니다.]다행스럽게도 너무 늦지 않게 전 병력이 대미궁에 마련된 대피소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그는 짧게 명령했다.
“미궁을 닫는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 안쪽에서부터 냉기가 터져 나왔고, 그렇게 흘러나온 서리의 기운이 대미궁 전체를 완전히 얼려 버렸다.
대미궁은 그렇게 꽁꽁 얼어붙은 채 지진을 버텨냈다.
***
시간이 꽤나 지났음에도 진동은 잦아들기는 커녕 가라앉을 생각을 않았다.
1차 복원 때만 해도 수많은 미궁이 지진에 휘말려 파괴되었고, 백작급 이상의 미궁까지 전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었다.
그런데 지금의 지진은 그때보다 몇 배는 거세고 오래 지속됐으니 과연 지저에 남아나는 미궁이 있을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미궁이 소멸되면 그 기운은 어떻게 되지?”
“지저로 환원되겠죠. 비록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안젤라의 시큰둥한 대답에 김진우는 눈이 번쩍 뜨였다.
“어쩌면 말이다.”
그는 방벽 너머 먼 어딘가를 바라보듯 눈을 가늘게 떴다.
찬탈자가 귀족의 인장으로 쪼개 지저 곳곳으로 흩어놓았던 고대 군주들의 권능은 수많은 미궁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고 귀족들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고 이 지진으로 인해 수많은 원천과 근원이 지저로 환수될 것이다.
“복원의 의미는 층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뿐만이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적자생존의 법칙을 넘어선 강제적인 도태. 그것이 복원의 참 목적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