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68)
던전 견문록-268화(268/319)
# 268
던전 견문록
제 269 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지저의 용트림이 끝이 났다. 대미궁을 쥐어짜듯 흔들어대던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고,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도 더는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이제 겨우 끝난 건가?”
어지간한 일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김진우조차도 질릴 정도로 길고도 끔찍했던 시간이었다.
“일단 방벽은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지. 바깥을 살피는 건 안젤라, 네가 해줘야겠다. 할 수 있겠지?”
“어려울 것도 없죠.”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언제든 이면층에 위치한 붉은 성으로 몸을 피하면 그만인 안젤라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도 주의하도록 해. 지저란 만만한 놈이 아니니까.”
아무리 하이로드의 힘이 대단하다고 한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버텨 온 지저라는 괴물에 비할 수는 없다. 그는 몇 번이나 안젤라에게 당부의 말을 해주었다.
“알겠어요.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이곳으로 돌아오도록 할게요.”
안젤라는 그의 염려가 기분이 좋은지 상황에 맞지 않게 활짝 웃어 보이며 떠나갔다.
“괜찮을까요?”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바라보던 도미니크의 낯빛이 어두웠다. 아무래도 주인의 염려가 전염된 모양이었다.
“어지간하면 별 일 없을 거야. 고대의 군주들도 어쩌지 못한 게 진혈의 군주니까.”
하지만 오늘따라 불길함이 영 가시지를 않았다. 너무도 오랜 시간을 좁은 공간에 웅크리고 있었던 탓인지 어깨가 괜스레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혹시 모르니 나가들을 준비시켜.”
과연 이대로 끝인 것일까. 2차 복원이란 그저 1차 복원 때보다 지진의 지속 시간이 길 뿐인 걸까. 확신할 수도, 속단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언제든 떨치고 나갈 수 있게 마창을 꽉 움켜잡았다.
“주인님!”
그렇게 초조하게 얼마를 기다렸을까. 안젤라가 허공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밖의 상황은 어떻지?”
거두절미하고 묻는데, 낯빛 창백한 흡혈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직접적인 위험은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그녀는 대미궁의 방어 태세를 풀 것을 제안했다.
“좋아, 대미궁. 이제 방벽을 내려도 좋다.”
그의 명령에 대미궁이 고오오, 울며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겨 버렸다.
[끔찍한 재앙에도 버텨낸 대미궁의 얼음 성벽은 그야말로 철옹성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꽁꽁 얼어붙은 냉기는 쉽사리 녹지 않습니다.] [대미궁의 해동(解冬)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통로와 입구가 완전히 녹기까지 최소한 나흘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 예상됩니다.] [강한 열기가 있다면 해동에 필요한 시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안타깝게도 얼음 성벽을 둘러 막강한 방어력과 내구력을 얻은 대미궁은 재앙이 끝나자 오히려 그와 나가들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가 되었다.
“나가들은 몰라도 다른 이종족들이 큰일이군.”
만약을 대비해 이런저런 방비를 해두긴 했지만, 꽁꽁 얼어붙은 미궁 안에 갇히게 될 거란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벌써 3일이란 시간을 살을 에는 냉기 속에서 버텨야 했던 이종족들이 과연 얼마나 버텨 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일단은 그들이 버티기를 바라야겠군.”
안젤라와 붉은 성을 이용하면 대미궁의 이곳저곳에 위치한 대피소를 둘러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당장 바깥 상황부터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도미니크, 내가 없는 동안 나가의 지휘를 부탁한다.”
“맡겨 주세요, 주인님.”
도미니크는 가슴께를 탕탕 쳐보였다.
“다녀오도록 하지.”
그의 말에 안젤라가 손을 꼭 붙잡아왔다.
“뭐하는 거지?”
“주인이 생긴 붉은 성은 이제 저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게 됐어요. 전처럼 쉽게 생각하면 큰일 날 수도 있어요. 이 손을 놓으면 주인님은 경계의 미아가 될지도 몰라요.”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더니,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설명에 그가 그런가,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도미니크가 불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젤라, 혹시라도 그 손 놓치면 제가 가만두지 않아요.”
무려 하이로드씩이나 되는 안젤라를 향해 도미니크가 눈을 치켜떴다.
“명심할 테니 너무 걱정마지 말아요, 언니.”
주인의 운명이 제 손에 달렸다는 것이 기쁜 듯, 이 짓궂은 흡혈귀는 보란 듯이 도미니크 앞에서 꼭 잡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걱정 마. 그녀라면 믿을 수 있어.”
그간 여러 일을 겪으며 전에 없이 신뢰를 쌓은 안젤라를 바라보는 김진우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안젤라가 괜스레 상기된 얼굴로 툴툴거렸다.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제가 꼭 되먹지 않은 생각이라도 한 것 같잖아요.”
그는 그저 웃어보였을 뿐이다.
“그럼 다녀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
그 어떤 때도 끊어지지 않았던 주인과의 교감, 이면층을 향할 때만이 유일하게 소환수들이 주인을 느낄 수 없을 때였다.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군.”
모리건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불평했다.
“후우, 설마 그 앙큼스러운 흡혈귀가 괜한 수작을 부리지는 않겠지.”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주인과의 교감이 끊긴지라 한층 예민해진 도미니크가 날카롭게 말하니, 모리건의 눈썹이 솟구쳤다가 다시 원래의 자리를 찾았다.
“내가 없을 때, 도미니크가 곧 나라고 생각하도록. 그녀의 그 어떤 말에도 순응하라.”
주인의 말을 뒤늦게 떠올린 탓이었다. 납득은 했지만 한 번 예민해진 기분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나가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아나톨리우스를 발견하고는 괜스레 눈빛을 빛냈다.
가뜩이나 진혈의 흡혈귀에게 생명력을 갈취당해 지쳐 있던 철혈의 거인은 이유 모를 적대감이 가득 들어찬 시선 수백 쌍이 자신을 향하자 움찔, 몸을 떨었다.
***
이면층에 들어선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마치 핏물에 잠긴 것처럼 붉게 변해버린 시야가 섬뜩하기만 했다.
“아무리 주인님이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곳에서는 소용없어요. 그러니 절대로 이 손을 놓으시면 안 돼요.”
실제로 핏물에 잠긴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잘대는 안젤라의 음성이 또렷하기만 했다.
하지만 기묘한 부유감은 가시지 않았고, 그는 마치 피로 채워진 바다를 유영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독스러울 정도로 비현실적인 감각에 김진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음, 어디 보자.”
그런 그를 내버려둔 채, 안젤라가 벽 한켠에 위치한 거울 앞에 섰다.
“대충 이쯤으로 나가보면 되겠네.”
놀랍게도 그녀가 들여다보는 거울 너머로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그것이 워낙에 뿌옇고 흐릿해 형체를 정확하게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안젤라는 그 너머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했다.
“끄응.”
이래서 고대의 군주들이 그토록이나 진혈의 군주를 꺼려했던 모양이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층과 층의 경계에 숨어 짙게 깔린 그림자 너머를 엿보고, 원한다면 언제든 그 어둠 너머로 스며들 수 있는 진혈의 군주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불청객이었을 것이다.
“걱정 마세요. 제 모든 것은 오직 주인님을 위해서 존재하니까요.”
그의 꺼림칙한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안젤라가 아양을 떨어댔다.
“아니, 그보다.”
김진우는 그런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으로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 안젤라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부정하지는 않는 것을 보니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으리라.
“끄응.”
사고가 연결되고 교감이 강제된 나가 여왕에 이어, 일거수일투족을 숨어서 지켜보는 진혈의 군주까지. 아무래도 지저에서 사생활을 보장받기는 그른 듯했다.
“그럼 넘어가 볼게요.”
안젤라가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그는 찝찝함을 안고 붉은 성을 다시 나서야 했다.
수면을 통과하듯 기묘한 감각이 온몸을 관통했다. 그 낯선 감각을 털어낼 틈조차 없었다. 김진우는 눈앞에 드러난 광경을 보고는 눈을 부릅떴다.
“이게 지금…….”
“믿을 수 있으시겠어요?”
괜히 그에게 직접 눈으로 모든 것을 확인하라 말했던 게 아니었다. 그의 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흉물스러운 종유석 따위가 덕지덕지 매달려 있던 천장은 아무리 힘껏 뛰어올라도 닿지 않을 만큼 높게 치솟아 있었고, 이리저리 엉켜 있던 통로는 사방이 뻥 뚫려 커다란 공터가 되어 있었다.
마치 지상의 야경을 옮겨놓은 듯한 모습, 하지만 그보다 더욱 그를 놀라게 만든 것은 대미궁의 경계를 짓이기고 솟아난 낯선 구조물이었다.
거대한 성에서 성문만을 따로 빼둔다면 이런 모습일까. 묵직한 외형이 화려하다기보다는 장엄하기만 했다.
“이건…….”
홀린 듯이 다가서 성문에 손을 올린 그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고대에도 가장 강대했던 외눈박이 군주, 보탄의 성, 발홀(Valhǫll)로 통하는 입구를 발견했습니다.] [발홀은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한 전장의 망자, 에인헤리(Einheri)들이 거하던 요새이기도 합니다. 비록 오랜 시간이 흘러 망자들의 영혼은 흩어지고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지만, 운이 좋다면 그들 중 하나와 마주치게 될지도 모릅니다.]한 발 늦게 떠오른 메시지를 미처 다 읽어내기도 전에 손에 움켜쥐고 있던 마창이 마구 몸을 떨었다.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마침내 지저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 전설의 요새는 당신의 몸에 녹아든 외눈박이 군주의 기운을 느끼고 있습니다.] [발홀을 여는 유일한 열쇠, 궁니르를 사용하시겠습니까?]창대가 흐물흐물해진다 싶더니, 마창이 이리저리 비틀려 열쇠가 되었다. 김진우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투박한 나무 열쇠와 눈앞에 솟아난 성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언젠가 미미르가 말했던 외눈박이 군주의 성을 찾은 듯했다.
“주인님은 그게 뭔지 알고 계신 모양이네요.”
안젤라는 그가 변해버린 지저의 모습보다 저 투박한 성문에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노라며, 의아한 얼굴을 해보였다.
“발홀로 통하는 문.”
김진우가 겨우 대답을 해주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진혈의 군주에게 붉은 성이 있었다면, 보탄에게는 이 요새가 있었지.”
그가 설명을 마저 해주자 그녀는 그제야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이게 외눈박이 군주의 요새?”
“과거에는 그의 것이었고.”
김진우가 성문에 파인 홈 사이로 궁니르를 꽂아 넣었다.
[외눈박이 군주의 성, 에인헤리들의 요새, 발홀이 고대 이후로 처음으로 빗장을 풀었습니다.]반짝거리는 메시지가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지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