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69)
던전 견문록-269화(269/319)
# 269
던전 견문록
제 270 화
95. 발홀
콰아아아아아.
굉음과 함께 불쑥 성벽이 솟아올랐다. 대체 어떻게 쌓아올린 것인지 틈 하나 보이지 않는 거대한 금빛 장벽 사이사이로 다시 첨탑이 솟구치고 그 뒤로 웅장한 건축물이 들어섰다.
성벽과 첨탑은 온갖 거대 괴수가 날뛰어대는 지저에서도 쉽사리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솟아 있었고, 그 너머로 살짝 드러난 성 역시 성벽과 꼭 닮은 황금빛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넘어, 마침내 외눈박이 군주의 성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강대했던 옛 군주들의 성은 저마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무른 금을 쌓아 만든 성벽의 경이로운 견고함은 불가사의 그 자체였습니다.] [가장 끔찍했던 황혼의 전쟁에서도 부서지지 않았던 발홀의 성벽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주인 없이 오래도록 방치되어 빛이 바랜 요새는 다행스럽게도 제 스스로 찬란함을 되찾을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어 있던 주인의 자리가 다시 채워지지 않는다면 발홀은 언제까지고 먼지 구덩이에 둘러싸여 제 빛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마치 세월에 삭고, 바람에 쓸려나간 폐허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되찾은 듯 경이로운 광경에 김진우는 순수하게 감탄하고 말았다.
초라할 정도로 덩그러니 홀로 존재했던 성문은 어느새 거대한 성의 일부가 되어 있었고, 그는 거성의 압도적인 위엄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끼릭, 끼릭.
그가 이 압도적인 건축물의 외양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렸다.
[발홀의 성문이 완전히 열렸습니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유산이 있을지, 그도 아니면 예상치 못한 위협이 당신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외눈박이 군주가 준비한 시험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발홀에 입성하시겠습니까?] [한 번 들어서면, 발홀의 주인이 되지 않는 한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 당신은 텅 빈 성을 홀로 지키는 망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발홀에 입성하시겠습니까?]홀린 듯이 성문 너머로 발을 내딛으려던 김진우가 메시지를 보는 순간, 그대로 발을 빼냈다.
[발홀에 입성하시겠습니까?]마치 재촉이라도 하듯 다시 한 번 물어오는 메시지, 그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과거 위대한 열 군주가 지저를 지배하던 그 시절에도 가장 강대했다 평가받는 외눈박이 군주가 다스리던 성이다. 그 강력함이야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울부짖는 마창, 궁니르를 얻자고 얼마나 고생을 해야 했던가. 마창의 기억과 한을 마주하여 기나긴 악몽에 시달렸던 그는 강력한 고대의 유산을 물려받는 대가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더없이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지금은 막 복원이 일어난 상태이다. 해야 할 일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외눈박이 군주의 시험을 받아들이는 건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었다.
그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발홀, 황금빛 번쩍이는 찬란한 요새, 그 장엄한 모습 뒤로 어쩐지 꺼림칙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보물 창고 속 번쩍이는 금은보화 더미 아래 그늘진 곳에서 독사 한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아쉬움이 남은 얼굴로 발홀을 바라보면서도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보류하도록 하지.”
[발홀은 당신과 외눈박이 군주의 이름이 함께하는 한, 열쇠가 당신의 손을 떠나지 않는 한, 언제까지고 이 자리에서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메시지가 끝나기 무섭게 높게 솟구쳤던 첨탑과 성벽이 푹, 꺼지고 번쩍이는 성의 금빛 광채가 자취를 감췄다. 다시 남은 것은 덩그러니 홀로 남은 성문뿐이었다.
“주인님, 어째서 문을 넘지 않으셨죠?”
“외눈박이 군주는 절대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야. 그는 단 하나의 유산도 거저 주는 법이 없는 지독스러운 수전노거든.”
잠시 발홀의 입구를 바라보던 그는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
다행스럽게도 대미궁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비록 외곽부를 포기해야 했지만, 그 대가로 중심부는 조금의 피해도 입지 않을 수가 있었다.
게다가 천만다행으로 이종족들의 피해 역시 크지 않았다. 대피 과정에서 몇몇 발 느린 이들이 동결에 휘말렸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대미궁에 적을 두고 새롭게 서리의 칭호를 얻은 덕분이었다.
“아드드. 그, 그럼 언제까지 이렇게 버텨야 합니까?”
하지만 모든 존재가 서리의 칭호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냉기로 반쯤 얼어붙어 퍼석퍼석해진 점액질 몸을 비틀며 요란을 떨어대는 우서가 그러했고, 말락수스를 비롯한 이종족의 왕들이 그러했다.
“길어야 나흘이다.”
우서가 슬러시처럼 알갱이 진 몸뚱어리를 펄쩍 뛰어 보였다.
“용기사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당겨질 수도 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티도록.”
실제로 수많은 호법룡들이 화염을 토해내며 얼어붙은 통로를 뚫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빙벽이 쉬이 녹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효과를 보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의 격려에 서리 칭호를 받지 못한 우서와 각 종족들의 왕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종족들의 피해를 확인한 김진우는 모리건과 헤임달을 찾았다.
“혹시 발홀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나?”
외눈박이 군주를 주인으로 섬겼던 고대의 영웅급 소환수들이라면 저 갑작스레 솟아난 요새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 게 분명했다.
“발홀은 지저에서도 가장 이름 높은 요새 중의 요새였습니다. 만약 군주께서 발홀에만 머무르셨다면 절대로 찬탈자와 간악한 귀족들에게 능멸을 당하는 일도 없었을 거라 장담합니다.”
“꽤나 대단했던 모양이군.”
“성벽과 첨탑마다 온갖 강력한 무기가 설치되어 있고, 전투라면 이골이 난 전귀(戰貴)가 수도 없이 있었으니 누가 감히 철옹성을 노리겠습니까.”
아득한 과거를 되짚듯 몽롱해진 모리건의 눈빛에서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을 볼 수 있었다.
“만약 왕께서 진정한 군주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반드시 발홀의 가장 높은 곳을 찾으십시오.”
“그곳에 뭐가 있는지 설명하라.”
헤임달의 말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흘리드스ㅤㅋㅑㄹ프(Hliðskjalf)가 그곳에 있습니다.”
“흘리드스ㅤㅋㅑㄹ프?”
“보탄께서 앉아 지저를 굽어보시던 권능의 옥좌입니다. 그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하나뿐인 눈으로 다른 이들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오롯이 이 권능의 옥좌 덕이라 하셨습니다.”
딱 들어서 용도가 짐작이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새벽닭은 외눈박이 군주가 그곳에 앉아 많은 것을 이루었노라며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취해야 할 것이라 말했다. 필시 범상치 않은 능력이 있는 물건임에 분명했다.
“흘리드스ㅤㅋㅑㄹ프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대단한 건 따로 있습니다.”
모리건이 지지 않고 한마디를 보탰다.
“혹시 발홀의 첨탑을 보셨습니까?”
김진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드물게 흥이 난 어조로 떠들어댔다.
“그곳에 묠니르(Mjollnir)가 있습니다. 그것이 한 번 모습을 드러내면 아무리 멀리 있다 한들 적들은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단단했던 강철의 거인족들마저도 이 강력한 수성병기(守城兵器)가 모습을 드러내면 발걸음을 돌려 지름길마저도 멀리 돌아가고는 했습니다.”
역시나 전운을 감시하는 파수병, 새벽닭과는 달리 전투에 미친 까마귀다운 말이었다.
“그 두 가지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군.”
“다른 건 몰라도 흘리드스ㅤㅋㅑㄹ프와 묠니르는 분명 남아 있을 겁니다. 고작 시간 좀 흘렀다고 망가질 정도로 평범한 물건들이 절대 아닙니다.”
“부디 그대의 말대로이길 바라겠다.”
제법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가 원하던 정보는 아직 듣지 못했다. 강력한 유산을 눈앞에 두고도 돌아서야 했던 것은 모리건을 비롯한 고대의 소환수들이라면 발홀이 감추고 있는 발톱의 정체를 알 거라 생각했던 탓이었다.
그의 질문에 모리건과 헤임달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 뒤늦게 무언가를 생각해냈는지 입을 열었다.
호법룡을 비롯한 화기를 다루는 데 능숙한 소환수들이 바빠졌다.
그들이 뿜어댄 화염은 조금이나마 얼어붙은 대미궁의 해동을 앞당겼고, 겨우 입구로 통하는 통로를 뚫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계까지 불길을 토해내야 했던 호법룡과 소환수들이 지쳐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제 스스로 고립되고 말았던 대미궁이 마침내 숨통이 트인 것이다.
“바깥의 상황을 살펴라. 그리고 나에게 보고하라.”
김진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순찰자들을 미궁 밖으로 내몰았다.
주인의 말이라면 지옥 불속이라도 몸을 던질 맹목적인 언더 엘프들은 재앙 직후 미지투성이인 지저로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안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열을 올렸다.
시간이 흐르자 미궁을 나섰던 순찰자들이 차례로 정보를 보내왔다. 그는 그렇게 모인 정보를 통해 2차 복원의 규모가 생각보다 몇 배는 거대함을 알게 되었다.
“근데도 그 어떤 미궁도 발견할 수가 없다고?”
“백방으로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았으나 미궁은커녕 그 어떤 흔적조차 찾지 못했나이다.”
릭샤샤의 보고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로 전부 멸망해 버리기라도 한 걸까.”
하기야 이 정도의 지진이 휩쓸고 갔다면 어지간한 미궁은 버텨내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어딘가에 남아 있는 미궁이 있을 거다, 반드시 찾아내도록.”
“반드시 그리하도록 하겠나이다.”
언더 엘프들이 더욱더 탐색에 열을 올리는 동안, 김진우는 미궁의 경계, 그늘진 구석에 앉아 발홀로 통하는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주인님, 굳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요? 경계라면 나가들이나 순찰자들만으로 충분할 텐데요.”
안젤라의 말에도 그는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누군가가 이곳을 찾아올 거라 굳게 믿는 듯한 눈치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안젤라는 그가 기다리고 있던 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역시 왔구나.”
소리 없이 나타나 슬금슬금 발홀을 향해 다가서던 작은 그림자가 김진우의 음성에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구, 군주님.”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나타날 줄이야.”
그가 발홀을 취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이유 중 하나, 고대의 유산을 미끼 삼아 낚고자 했던 약삭빠른 사냥감이 마침내 걸려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만나고 싶었던 차에 이렇게 직접 찾아와주니 고마울 따름이야.”
덤덤한 음성에 작은 그림자, 미미르가 낭패한 얼굴을 해 보였다.
“말해봐.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아니, 뭘 하려던 거지?”
미미르가 빠르게 눈알을 굴려댔다. 필시 상황을 모면할 궁리를 하는 게 틀림없었다.
“하나 경고하지.”
그런 미미르를 보며 김진우가 나직하게 말했다.
“오늘은 그 작은 머리통을 굴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는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섬뜩하게 번쩍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