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70)
던전 견문록-270화(270/319)
# 270
던전 견문록
제 271 화
표면적으로 보면 언제나 이득을 보아온 것은 김진우였다. 이 교활한 임프는 늘 자신의 손해를 강조하며 죽는 소리를 해댔지만 그는 그 엄살을 믿지 않았다.
그저 눈으로 드러난 이득이 그의 것이었을 뿐, 미미르는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차근차근 자신이 목적한 바에 다가서고 있을 것이다.
“그대가 그동안 알게 모르게 나를 이용해 왔다는 걸 모르고 있진 않아. 단지 이득이 되었기에 모른 척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아야겠다. 그대가 바라는 게 대체 뭔지, 꼭 알아야겠어.”
타협의 여지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 단호한 음성에 미미르가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어라. 내 눈을 보아라. 마지막으로 경고하건대 나에게 숨기려 하지 말아라. 또한 거짓을 말하지 말아라.”
미미르가 그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제게 왜 이러십니까? 제가 얼마나 군주님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직까지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여긴 것인지, 미미르는 도리어 자신의 노고를 몰라준다며 푸념했다.
“제가 아니었다면 군주님께서 어디서 고대의 비사를 듣고, 또 누가 있어 이렇게 물심양면 음지에서 돕겠습니까?”
이제는 푸념을 넘어 원망까지 보이는 미미르의 태도에 김진우가 입술을 달싹였다.
“미미르.”
그가 작은 임프의 이름을 불렀다.
“네? 군주님?”
그 어조에 서린 냉기가 어찌나 서늘한지 주변의 온도가 뚝, 하고 떨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미미르는 시끄럽게 놀려대던 입을 단박에 다물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날 우습게 보는군.”
그렇지 않고서야 몇 차례 경고했는데도 불구하고 저리 의뭉을 떨 리가 없었다.
미미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뒤늦게 변명을 주워섬겼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그는 끝까지 그 간교한 세 치 혀를 놀려대는 꼴을 볼 마음이 없었고, 더 이상 자비를 베풀 생각도 없었다.
“구, 군주님! 켁!”
김진우는 우악스러운 손놀림으로 임프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숨이 턱, 하고 막힌 임프가 하려던 말을 되삼키고 대신 신음을 내뱉었다.
언령과 진실의 눈.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그 두 가지만으로도 얼마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미미르에게는 두 가지 능력이 다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 점이 가장 수상했다. 단지 창고지기에 불과한, 하찮은 임프 따위가 하이로드의 권능에 저항한다는 것 자체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이, 이것부터 놓아주셔야… 커억.”
김진우는 미미르의 고통에 찬 호소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멱살을 쥔 손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끄어어억.”
미미르는 이제 완전히 숨통이 막힌 것인지 혀를 빼물고 침을 질질 흘려댔다. 몸이 비해 비정상적일 정도로 큰 머리통에 울긋불긋 핏대가 서고, 눈알이 벌겋게 변해 버렸다.
미미르의 얼굴에 두려움과 고통이 차올랐다. 임프 특유의 흑백 확실한 눈동자가 죽음에 대한 공포로 탁하게 색이 바랬다.
“구, 군주님…….”
간신히 쥐어짜낸 음성은 숨이 넘어갈 듯했고, 멱살을 움켜쥔 그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버둥거리는 손짓은 애처로움을 넘어 차라리 필사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김진우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작은 임프가 죽어버려도 상관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미미르의 생과 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본능을 넘어 차라리 예지에 가까운 감각이 그에게 경고했다.
독니를 숨기고 자신을 기다리는 발홀의 꺼림칙함이, 조금씩 과거로 회귀해 가는 지저의 태동이 그를 더 이상 망설일 수 없게 만들었다.
광폭한 안광이 번뜩이는 시선이 초점 흐려진 임프의 눈과 마주 닿았다.
[군주의 언령도, 눈 하나를 바쳐 얻은 진실을 꿰뚫어 보는 능력도 통하지 않는 미미르는 평범한 임프가 아닙니다.] [그런 미미르를 상대로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만큼 강력한 위엄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당신에게는 이 영악한 임프를 압박할 만한 위엄이 있습니다.] [존재의 근원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끄으으으.”
억눌린 신음이 이제는 숨넘어가는 거북스러운 소음이 되었다.
[악의로 오염된 악룡, 허기에 시달리는 굶주린 짐승의 탐욕. 혹은 당신이 흡수했던 수많은 하이로드 파편의 그림자. 미미르가 당신의 근원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온화하고 보기 좋은 종류의 것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미미르는 지금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조금만 있으면 이 속 시꺼먼 임프는 그 머리통 속에 무엇을 숨겼든지 꺼낼 기회도 없이, 죽어 널브러져 지저를 이루는 한 줌 흙이 될 것이다.
“마, 말하겠…….”
하지만 명부(冥府)에는 아직 미미르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필사적으로 숨을 모아 뱉어낸 한 마디에 지척까지 다가섰던 저 세상이 멀어져 버렸다.
김진우는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있던 손아귀를 슬쩍 풀어 주었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은 미미르가 마른기침을 토해내며 속을 게워냈다.
“부디 지금의 결심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이 아니었기를 바라마.”
미미르가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목가에 남은 퍼런 멍 자국은 여전했지만, 미미르는 가까스로 평소의 호흡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저,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까지 채 가시지 않은 공포가 어른거리는 얼굴, 미미르의 낯빛은 마치 시체처럼 창백했다. 애처롭게 몸을 떨어대는 임프를 내려다보며 김진우는 몹시도 흡족스러운 기색을 해보였다.
“쯧, 그러게 처음부터 그리 나올 것이지. 괜히 나만 패악스러운 놈이 됐군.”
지독스러울 정도로 뻔뻔한 표정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미미르는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이제껏 대등했던 관계가 무너지고, 협력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던 거래의 틀이 깨어지고 말았다. 이 교활한 임프는 더 이상 그를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진우가 휘두른 것은 그저 단순한 폭력이 아니었다. 영혼에 새겨지는 공포의 화인. 도저히 항거할 수 없든 압도적인 격의 차이에 대한 각인이었다. 그만큼 일순간이나마 드러낸 군주의 근원은 광포하고 사나웠으며, 무자비했다.
덜덜.
채 가라앉지 않은 떨림에 몸을 덜그럭거리면서도 미미르는 떠듬떠듬 말문을 열었다.
“그, 그런데 무엇을 알고 싶으신 건지…….”
처벌이 과했던 것인가. 똑똑하다 못해 교활하기까지 했던 미미르가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몰래 숨어든 이유부터 듣도록 하지.”
“이, 이곳에 온 이유 말입니까?”
아무래도 좋은 이유로 찾아왔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호된 꼴을 당하고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필시 불온한 동기가 있는 게 틀림이 없었다.
“쯧.”
독촉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못마땅한 기색을 내보이는 것만으로도 미미르는 혼비백산하여 입을 나불거려댔다.
“제가 이곳에 온 건,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확인?”
“저는 발홀의 존재감을 느꼈고, 군주님께서 완전히 외눈박이 군주의 유산을 물려받았는지가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게 왜 궁금했지?”
미미르는 이번만큼은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은 길지 않았다. 영혼에 각인된 공포가 미미르의 입을 열고야 말았다.
“군주님께서 실패할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튀어나온 미미르의 속마음은 김진우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불운에 대한 예지. 기분이 좋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의문과 혼란이었다.
지금에 오기까지 물심양면 뒤에서 받쳐주었던 미미르,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필요했기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을 것이다. 그런 미미르가 사실은 자신이 거꾸러지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좀처럼 납득할 수 없었다.
“이유를 들어야겠군.”
김진우는 착, 하고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해 좌절한 전사들의 절망을 쌓아 만든 저 끔찍한 마물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꺾이고 좌절하여 나락에 빠진 군주뿐입니다.”
마치 뜬구름을 잡듯 모호한 설명이었지만, 그는 막연하게나마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미미르가 자신의 죽음을 바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는 군주님께서 나락에 굴러떨어졌을 때, 어떻게 변화할지를 확인하려 했을 뿐입니다.”
발홀에 얽힌 비사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확인해볼 일이었다. 그는 잔뜩 엉클어진 머릿속으로 스쳐가는 의문을 먼저 물었다.
“그걸 확인해서 어쩔 생각이었지?”
“제가 어쩌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알고 싶어 하는 분이 있었을 뿐입니다.”
자꾸만 예상과 어긋나는 흐름에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미미르를 다그쳤다.
“나를 화나게 하려는 게 아니라면, 똑바로 설명하라!”
그의 말에 화들짝 놀란 미미르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서, 설명하겠습니다요! 그러니 부디 기운을 거두어 주십시오!”
한 번 영혼에 새겨진 공포는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작은 임프를 집어삼켰다. 오들오들 몸을 떠는 미미르를 보며 그가 뒤늦게 기세를 거두어들였다.
“후.”
그가 간신히 진정하자 미미르가 황급히 설명했다.
“저는 창고지기이기도 하지만, 블랙 머천트의 상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장사꾼은 절대로 공짜로 남을 돕는 법이 없습니다.”
“너는 영원의 창고지기, 외눈박이 군주의 이름을 계승한 나를 따르던 것이 아니었나.”
“제가 군주님을 지원한 것은 군주님께서 고대의 권능과 연이 닿기 한참 전부터였습죠. 그리고 당시의 군주님은 농담으로라도 투자에 적합한 분은 아니었습니다요.”
미미르의 말마따나 자신이 블랙 머천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것은 외눈박이 군주의 파편과 만나기도 전이었다. 이제껏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블랙 머천트와의 관계가 새삼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럼 블랙 머천트가 날 도운 게…….”
“맞습니다. 제가 군주님을 지원한 것은 누군가에게 의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하지만 속은 여전히 답답하기만 했다. 정작 미미르에게 의뢰한 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었던 탓이다.
“그게 누구지? 설마 내가 하이로드들의 파편과 인연이 닿은 것이 전부 그 누군가가 바라던 것인가?”
그의 무거운 음성에 미미르가 덩달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그분이 누군지는 모릅니다. 다만 의뢰에 대한 대가를 받았고, 저는 따랐을 뿐입니다. 그 뒤, 군주님께서 하이로드의 자리에 오르신 게 그분의 뜻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탁, 하고 맥이 풀렸다. 그리고 꽉 막힌 것처럼 속이 답답해졌다.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할 것이다. 만약 아직도 그대가 숨기는 것이 있다면, 나는 정말 그대를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니까.”
겨우 진정되었던 그의 기세가 다시금 사나워지자 사색이 된 미미르가 황급히 자신이 아는 것을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저, 저는 그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어쩌면 군주님께서는 그분을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