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71)
던전 견문록-271화(271/319)
# 271
던전 견문록
제 272 화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김진우는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엉클어지는 듯한 기분에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무슨 말인가.”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어느 순간 심장을 콱, 하고 조여왔다. 하지만 그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미미르를 추궁했다.
겁에 질려 있던 임프는 순간 그의 눈치를 살폈다. 마치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음에도 시치미를 뗀다고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다시 닦달을 하자 그제서야 무거운 음성이 이어졌다.
“이미 누구인지 짐작하고 계신 것 같은데, 다시 확인이 필요하신 겁니까?”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거기에 더해 미미르는 확인까지 해주었다.
“그분은 군주님을 부를 때, 작은 진우라고 하셨습니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단번에 정리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진우는 조금도 기뻐할 수 없었다.
또 다시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소희가 언급되었다. 희미했던 불길함이 명확한 형체를 갖고 숨통을 조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새파란 광망을 내뿜던 그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아 탁한 빛을 발했다.
“어딜 가실까.”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던 미미르가 품속에 손을 넣는 순간, 어둠이 한데 뭉쳐 여인의 모습이 되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안젤라를 보고 깜짝 놀란 미미르였지만 짐짓 태연한 척 시치미를 뗐다.
“그 손,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 앙증맞은 손이 내 악세사리가 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마치 어린아이라도 다루듯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눈빛만큼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옳지, 착하네. 그렇게 있어. 아무런 소리도 내지 말고, 손끝 하나 움직이지 말고.”
미미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울상이 되었다.
그렇게 안젤라의 협박에 미미르가 겁에 질려 있거나 말거나 김진우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지금부터는 누구도 믿지 마. 나 말고는 믿지 마. 아니, 나조차도 믿지 마. 너는 오직 너만 믿는 거야. 알겠어?”
마치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다부진 음성이 몇 번이고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그 누구보다 믿고 따랐던 소희는 결코 평범한 소녀가 아니었다.
가장 비참했던 시절에도 새하얀 웃음을 보이던 그녀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수상한 점이 많았다.
소녀는 한낱 어린 계집아이라고 하기에는 매사에 너무나도 의연했고, 또 침착했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허투루 호들갑을 떠는 법이 없었으며, 심지어 공작들에 의해 미궁 밖으로 내몰렸을 때조차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랬기에 더 믿을 수 있었다. 그녀를 따라가다 보면 그 미소만큼이나 환한 세상이 자신을 기다려줄 것 같았던 탓이다.
“진우야! 너만은 꼭 살아야 해!”
그녀는 사나운 화식조들 사이에 남겨졌고, 자신은 홀로 살아남았다. 그녀의 당부대로 지저에서 만난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고 살아남는 것만을 목표로 짐승처럼 지저를 헤매고 또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볕 따뜻한 지상에 이를 수 있었다.
“음.”
그렇게 과거를 더듬어 지상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되짚어보던 김진우는 위화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기억의 흐름이 어느 순간부터 부자연스럽게만 느껴졌다.
마치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손에 쥐고 그림을 완성시키는 듯한 생경한 기분, 그 기묘한 위화감에 그는 몇 번이고 과거와 현재의 기억을 오가며 악몽을 되짚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자 그는 그 거북스러운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닭장 같은 곳에서 쪽잠을 잘 때, 어른들에게 지상의 이야기를 들으며 동경을 키울 때, 위험천만했던 전투에 휘말려 그들이 희생되었을 때, 그 기억 어디에도 소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녀와의 인연에 맹목적으로 집착했으니, 늘 함께 해왔노라 생각하고 말았다.
“대체 누나는 언제부터 함께했던 거지?”
뒤늦게 떠오른 의문에 그는 머리라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얼굴을 해보였다.
***
교활한 임프는 감금되었다. 말로는 그저 누군가의 심부름으로 찾아왔을 뿐이라 했지만, 그 시꺼먼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필시 다른 꿍꿍이 역시 숨기고 있을 터였다.
“저한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제가 군주님을 위해 어떻게 일해 왔는데!”
억울함을 호소하는 미미르를 향해 김진우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당장 그대를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필요할 때 그대가 내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곳에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 당분간은 거기서 머리를 식히고 있도록.”
“차라리 지금 물으십시오! 뭐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
엉망진창으로 조각나고 뒤섞인 기억의 파편이 그를 더없이 신중하게 만들었다. 지금 당장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혹시 그 소희라는 분이…….”
“속단하지 마라.”
도미니크의 조심스러운 음성을 잘라낸 김진우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무표정했다.
“아직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 모든 판단은 캐서린, 통곡의 군주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내려도 늦지 않아.”
소희의 흔적을 쫓아 사라진 통곡의 군주라면 이 속 불편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
사고가 연결된 덕에 그의 속내를 고스란히 들여다보았을 도미니크의 시선이 불편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모든 것은 주인님의 뜻대로.”
그녀 역시 굳이 무리해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진실이 코앞까지 다가온 이상, 싫든 좋든 곧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굳이 나서서 주인의 속을 헤집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일단은 외눈박이 군주의 유산이 먼저다.”
미미르의 정보가 너무 큰 충격이었던 탓에 잠시 뒷전으로 밀려 있던 발홀이 다시 화제에 올랐다.
“일단은 발홀을 취하겠다.”
“너무 위험해요!”
미미르는 말했다.
외눈박이 군주의 성은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해 좌절한 군주가 절망을 가슴에 품었을 때만이 주인이 될 수 있노라고.
“주인님이 이루신 그 모든 업적에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전승의 능력이에요. 만약 저 임프의 말이 사실이라면 발홀을 취하려면 주인님은 가장 강력한 힘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도미니크는 전에 없이 강하게 반대를 표했다. 그녀는 전승의 이름을 잃음으로써 생길 힘의 공백을 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진우는 그녀의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승의 이름이 있었기에 내가 이 자리까지 기어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니야.”
과거의 망령과 마주하여 다소 혼탁해졌던 시선에 다시 강렬한 빛이 돌아왔다.
“승리하고 마침내 살아남았기에 전승의 이름이 내게 주어진 것이지.”
***
대지에 못 박은 듯 솟아난 발홀의 성문은 어디 가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언제까지고 자격을 지닌 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것은 고대부터 이어져 온 온전한 권능의 계승이었으며 오직 하이로드를 위한 절대적인 약속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는 길가에 떨어진 보물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하기야 영원의 창고에 틀어박혀 있던 미미르가 2차 복원이라는 강력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그 기운을 느끼고 찾아왔다. 다른 이들이라고 그 기운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뭐? 아나톨리우스가 사라져?”
미궁의 경비를 맡고 있던 나가들의 보고에 김진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잠시 다른 일들을 처리하는 사이에 철혈의 거인이 모습을 감춘 것이다.
대미궁에 온전히 녹아들지 못했던 대부분의 귀족 출신들과 함께였다.
“추적대를 조직했지만, 만만찮은 자들이라 아무래도 다소의 피해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퀀투스가 벌써부터 바짝 굳은 얼굴로 나가들의 피해를 우려했다.
“그대로 두어라.”
하지만 김진우의 반응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추적대를 구성할 필요도 없고, 그들의 흔적을 쫓을 필요도 없다.”
영문을 몰라 재고를 요청하는 퀀투스는 경비의 소홀함에 대한 자책과 전 백작의 만행에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 반에 김진우의 얼굴은 태연하다 못해 느긋하기까지 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대는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통로의 확보에 주력하고 외침을 대비하라.”
“왕의 뜻대로 하겠나이다!”
그다지 납득이 가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우직한 나가 친위대장은 그의 말에 고개를 숙여 보였을 뿐, 달리 토를 달지는 않았다.
“꼭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시는 것 같네요.”
안젤라의 말에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같은 층도 아닌 미미르가 그 기운을 느끼고 찾아올 정도다. 바로 코앞에 있는 보물을 두고 그대로 있을 아나톨리우스가 아니지.”
하물며 옛군주들의 권능이라면 일단 눈부터 까뒤집는 아나톨리우스가 아니던가. 그는 그리 어렵지 않게 철혈의 거인과 다른 귀족들이 어디로 향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가볼까?”
성큼성큼 걸어 안젤라의 손을 붙잡으니,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면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렇게 사라진 김진우와 안젤라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발홀로 통하는 성문 앞이었다.
“주인님의 생각이 맞았네요. 이런 모습은 예상하지 못하셨겠지만.”
거대한 성문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쇳조각은 아나톨리우스가 늘 한시도 떼어놓지 않았던 철가면이었다.
“과한 탐욕이 화를 불렀군.”
굳이 아나톨리우스의 행방을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비록 가면 하나 떨어져 있었을 뿐이지만, 하이로드의 힘에 집착했던 철혈의 거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빤히 알 수 있었다.
“아쉽게 됐어. 인장을 잃었다고 해도 철혈의 아나톨리우스는 꽤나 쓸 만한 말이었는데.”
한때는 심층의 지배권을 두고 야욕을 불태웠던 강대한 귀족의 말로에 대한 감상치고는 지나치게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하이로드의 힘이란 것이 주인 아닌 자에게는 이다지도 냉혹한 것을. 그저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아무리 예전 같지 않다고 해도 아나톨리우스는 지저에 널리고 널린 쭉정이가 아니었어요. 그런 그가 잠깐 사이에 이 꼴이 됐는데.”
경망스럽고 요사스러운 흡혈귀였지만 언제나 주인을 향한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김진우는 드물게 부드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애초에 나에게 주어진 유산이다. 궁니르가 나에게 있고 그의 이름이 나에게 계승되었다. 아무리 까탈스러운 놈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사정을 봐주겠지.”
그답지 않은 너스레에 안젤라가 와락 안겨들었다.
“조심하세요. 저는 반쪽짜리 하이로드라 제대로 된 계승이 얼마나 고된 건지 몰라요. 하지만 그런 저조차도 붉은 성을 물려받을 때 영혼이 찢겨지는 고통을 겪었어요.”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지.”
이미 도미니크와는 이야기가 됐다. 나가 여왕이 된 그녀라면 자신이 없는 동안 대미궁을 잘 이끌어 나갈 것이다.
덕분에 그는 마음 편하게 괴팍한 외눈박이 군주의 시험에 도전할 수 있었다.
“부디…….”
어울리지 않게 기도라도 하듯 양손을 모아 쥔 흡혈귀를 보며 그는 발홀의 성문 앞에 섰다.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한 전장의 망자, 에인헤리(Einheri)들이 거하던 요새, 발홀의 성문을 여시겠습니까?]그는 대답대신 궁니르를 성문의 홈에 꽂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