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72)
던전 견문록-272화(272/319)
# 272
던전 견문록
제 273 화
96. 발홀의 지배자와 주민들
발홀의 성문이 열리고 다시 한 번 황금빛 성벽과 첨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홀의 성문이 완전히 열렸습니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유산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그도 아니면 예상치 못한 위협이 당신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외눈박이 군주가 준비한 시험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발홀에 입성하시겠습니까?] [한 번 발홀에 들어서면, 발홀의 주인이 되지 않는 한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 당신은 텅 빈 성을 홀로 지키는 망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발홀에 입성하시겠습니까?]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바닥을 나뒹구는 아나톨리우스의 철가면을 돌아보았다.
좌절하고 실패한 자만이 가질 수 있다는 이 마물의 주인이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이제껏 쌓아올린 전승의 업적이 무로 돌아가는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싹 메마른 미소나마 입가를 올려보였다.
언제는 위험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전승의 이름조차 자신이 겪어온 수많은 위험에 대한 보상에 불과할 뿐이다.
이제 와서 패배가 두려워 움츠린 채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는 그간 걸어온 길이 마냥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가시에 찔리고 베이고 비참하게 나뒹굴면서도 마침내 하이로드가 된 자신은 태생부터가 들개였다.
“군주님께서 실패할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해 좌절한 전사들의 절망을 쌓아 만든 저 끔찍한 마물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꺾이고 좌절하여 나락에 빠진 군주뿐입니다.”
미미르의 음성이 귓가로 들려오는 듯하다.
“다녀오겠다.”
그는 불안 가득한 한 쌍 눈동자의 배웅을 받으며 발을 내딛었다.
단지 한 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세상이 변했다. 무채색 일색인 지저의 풍광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세월에 빛바랜 금빛이나마 번쩍이는 요새의 풍경이 김진우를 반겨 주었다.
쾅!
둔탁한 굉음과 함께 성문이 닫혔다. 그리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발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문이 닫혔습니다. 이제 발홀과 바깥세상은 완벽하게 격리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열쇠 구멍은 성문의 밖에 존재할 뿐, 안쪽에서 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시 성문이 열리는 건 발홀의 주인이 성문의 개방을 명령했을 때뿐입니다.]어쩐지 음산하게만 보이는 메시지였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이 성격 까탈스러운 마물의 주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 스스로도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었으니까.
저벅. 저벅.
아무도 없는 거대한 성. 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낮은 발소리만이 퍼져 나간다. 그는 번쩍이는 황금빛에 현혹되는 법 없이 곧장 성의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함정도 없었고, 성을 지키는 수호자도 없었다. 덕분에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마침내 도착한 곳에서 황금빛 물푸레나무가 새겨진 왕좌와 은은한 빛을 발하는 원형 물체를 발견하고는 탄성을 내뱉었다.
[과거 하이로드들이 지저를 다스리던 그 시절보다 이전, 홀로 드높게 치솟은 성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강자가 성의 주인이 되기 위해 도전했지만, 성공한 이는 오직 강대한 군주, 보탄뿐이었습니다.] [보탄은 성의 주인이 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고, 무저갱보다 깊은 좌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절망을 딛고 마침내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왕좌에 앉은 그는 비로소 외눈박이들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보탄이 처음부터 외눈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발홀의 주인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 중에 한쪽 눈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대가로 바쳐진 보탄의 한쪽 눈은 거대한 성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심장이 되었습니다.]물푸레나무 새겨진 왕좌 뒤로 보이는 동그란 물체가 눈 가득 들어왔다. 마치 금 간 것처럼 붉은 선이 죽죽 그어진 거대한 수정구가 제자리에서 데구르르 구르더니 검은 얼룩이 곧장 그를 향했다.
[에인헤리들의 요새, 발홀의 핵을 발견했습니다.]그제서야 그는 그것이 외눈박이 거인의 눈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보탄의 눈은 날카로운 시선이 되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발홀을 지배하는 핵, 보탄의 눈이 당신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비록 오래도록 주인 없이 방치되어 있던 성이지만 성의 소유권을 거저 줄 생각은 없는 모양입니다.] [날카로운 시선이 당신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외눈박이 군주의 권능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보탄의 눈은 당신이 온전치는 않지만 보탄의 이름을 계승했음을 알아챘습니다.]벌거벗겨진 듯 께름칙한 시선이 온몸을 훑고 갔다. 그는 그 노골적인 시선에 오히려 어깨를 펴고 마주 시선을 던졌다.
[보탄의 눈은 몹시 혼란스러워 합니다. 아마도 당신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군주의 기운을 느낀 듯합니다.] [하지만 발홀을 계승하는 데 필요한 것은 군주의 이름과 마창 궁니르뿐입니다. 보탄의 눈은 여전히 의문을 풀지 못했지만 당신의 자격을 인정해 주었습니다.]핵의 인정을 받았지만 김진우는 방심하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곧장 공명이 일어나고 각인 작업이 시작되어야 했음에도 아직까지 발홀이 자신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 시험의 주최가 무엇인지 이미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듯 금으로 빚어진 물푸레나무로 둘러싸인 기괴한 왕좌, 홀리드스ㅤㅋㅑㄹ프(Hliðskjalf)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홀리드스ㅤㅋㅑㄹ프를 발견했습니다.] [한쪽 눈을 잃은 외눈박이 군주가 지저를 바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이 물푸레나무 왕좌 덕입니다.] [홀리드스ㅤㅋㅑㄹ프는 앉아서도 지저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막강한 권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장 검고 검은 밤의 장막조차도 이 권능의 왕좌의 눈을 가리지 못했으니, 홀리드스ㅤㅋㅑㄹ프야말로 지저에서 제일가는 보물입니다.] [홀리드스ㅤㅋㅑㄹ프의 주인으로 인정을 받았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발홀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짐작대로였다. 보탄의 눈은 그저 군주의 계승권을 살펴보았을 뿐, 발홀의 주인이 되기 위한 자격을 심사하지는 않았다. 진짜 시험은 홀리드스ㅤㅋㅑㄹ프에 앉았을 때 시작될 것이다.
[홀리드스ㅤㅋㅑㄹ프의 주인이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보탄은 홀리드스ㅤㅋㅑㄹ프의 주인이 되기 위해 자신의 한쪽 눈을 바쳐야 했습니다.] [과연 홀리드스ㅤㅋㅑㄹ프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할지는 직접 시험에 들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대가가 보탄처럼 한쪽 눈이 될지, 다른 무엇이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당신이 이제까지 겪어온 좌절과 절망의 무게가 왕좌의 무게보다 무겁다면 그 대가는 생각보다 가벼운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당신의 절망과 좌절이 발홀의 주인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면, 홀리드스ㅤㅋㅑㄹ프는 저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당신에게 새로운 절망과 좌절을 선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메시지를 확인한 김진우는 웃었다.
부모조차 모른 채 미궁의 어둠 속에서 짐승처럼 자랐고, 그것이 불행인 줄도 모르고 살아왔다.
그야말로 결여와 상실로 점철된 삶. 왕좌의 무게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가 겪은 좌절과 절망이 결코 가볍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제 와서 기껏 시험한다는 게, 누가 더 궁상맞은지 비교하는 거라니. 웃음도 안 나오는군.”
물론 홀리드스ㅤㅋㅑㄹ프가 요구하는 대가가 비단 그것 하나뿐이겠는가. 만약 그랬다면 외눈박이 군주는 자신의 한쪽 눈을 뽑아 바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웃었다. 긴장했던 스스로가 우스워질 정도로 우스꽝스럽고 경망스러운 시험이었다.
[발홀의 저울에 당신의 삶을 달아보시겠습니까?]김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왕좌에 앉았을 뿐이다.
스스슥.
왕좌에 새겨진 물푸레나무가 살아 있는 것처럼 가지를 움직이고 줄기를 틀더니 그의 몸을 칭칭 동여맸다.
그리고 발홀의 진정한 시험이 시작되었다.
***
김진우가 홀리드스ㅤㅋㅑㄹ프에 앉아 시험을 마주한 그 시각, 대미궁은 때아닌 소란을 맞이하고 있었다.
“왜 이제 와서야 알아챈 거지? 근방의 경계라면 철저하게 하라 말하지 않았던가!”
도미니크는 드물게 격앙된 음성으로 순찰자들과 우서를 질책했다.
“미궁이 얼어버린지라 탐식의 덩어리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왕의 권위를 대행하는 여왕을 앞에 둔 우서는 온몸으로 기포를 부글대며 필사적으로 변명해댔다.
“순찰자들의 탐색 범위가 넓어, 그 사이로 흘러들어 온 것 같나이다. 늦었지만 순찰자 중 일부를 돌려 경계에 만반을 대비하라 일렀나이다.”
릭샤샤 역시 여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마치 왕을 대하듯 고개를 숙여보였다. 퀀투스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왕께 직접 질책을 받은 것은 아니나, 제 스스로 아나톨리우스의 이탈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으니만큼 다시 한 번 일이 벌어지자 자책감이 상당한 눈치였다.
“너무 늦었어. 하필이면 주인님께서 안 계신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타이밍이 공교로웠다. 마치 누군가가 곁에서 지켜보다 일을 벌인 듯한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
“지금이라도 나가들을 추려 전투를 준비하겠습니다! 지금의 나가라면 저들을 막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 장담합니다!”
이미 실수가 있었던지라 퀀투스는 의욕에 불타올랐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열의에 찬 나가 친위대장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개중에는 주인님을 따르던 모아이도 섞여 있다고 들었어. 비록 생각했던 것만큼 쓸모가 있진 않았으나 한때 주인님께서 복원하여 중히 쓰려던 자들이다. 주인님이 안 계신 지금 함부로 그들마저 휘말리게 할 수는 없겠지.”
2차 복원의 피해를 막기 위해 대미궁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던 동안, 사라졌던 모아이가 전부 돌아왔다.
전보다 더욱 수가 늘어나 그야말로 온 지저를 채울 것처럼 대미궁을 향해 몰려들었다.
도미니크는 악의에 오염된 그들을 통제할 수단을 발리셔스가 찾아낸 지금에 와서 함부로 그들을 도륙내고 싶지 않았다. 동정심은 아니었다.
그저 그들이 쓸모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탓이었다.
“끄응.”
우서가 앓는 소리를 내뱉고 릭샤샤와 퀀투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결정하려면 서둘러야 하나이다. 이미 그들의 선봉이 바로 지척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들었나이다.”
퀀투스의 말에 도미니크가 고민에 빠져 해결책을 찾고 있을 때, 안젤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상한데.”
가뜩이나 골치 아픈 상황에 안젤라가 나서 뜬금없는 말을 하니, 도미니크가 눈을 찌푸렸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안젤라는 도미니크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릭샤샤에게 물었다.
“어떻게 지금 저들이 향하는 방향이 이곳이라고 확신하지?”
릭샤샤는 생각할 것도 없이 모아이들의 이동 경로에 놓인 미궁은 이곳밖에 없노라 말했다.
장거리 순찰을 나간 순찰자들이 돌아와야 다른 미궁이 생겨난 것인지를 알겠지만, 지금으로선 대미궁이 그들의 목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대답했다.
“아니야, 아니야. 왜 이쪽에 우리 미궁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얼마 전에 새로 생겨난 게 있잖아?”
안젤라의 말에 도미니크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번뜩였다.
“발홀!”
그리고 모아이들의 목표가 대미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도미니크는 발홀의 주민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한 전장의 망자, 에인헤리. 그들이 바로 발홀의 수비병이자 주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기에 좌절하고 절망한 전사라는 말에 그들보다 어울리는 이들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