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73)
던전 견문록-273화(273/319)
# 273
던전 견문록
제 274 화
안젤라의 말이 맞았다. 다시금 지저에 모습을 드러낸 모아이들은 발홀의 성벽을 둘러싼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 많은 모아이들이 어디서 다…….”
2차 복원 이후로 완전히 변해 버린 지저조차도 비좁다 느껴질 만큼 많은 모아이가 몰려들었다. 도미니크는 그 무지막지한 수에 질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다부진 얼굴로 퀀투스에게 지시를 내렸다.
“만약을 대비해 나가들을 준비시키는 게 좋겠어.”
전원이 영웅급 소환수로 진화한 나가들이지만 과연 저 오염된 군대를 어디까지 막아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모아이의 수는 무지막지했다. 마치 온 지저가 그들로 꽉 채워진 듯한 광경이었다.
그녀의 지시에 퀀투스가 친위대를 최전방에 배치시키고, 이제 겨우 피로가 회복된 호법룡들을 한군데 집결시켰다.
“이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릭샤샤가 죄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사실 도미니크의 말은 질책이 아니었다. 그저 이해가 가지 않았을 뿐이었다.
바람처럼 사라졌던 모아이들이 어디서 이렇게 몰려든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2차 복원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미궁에만 틀어박혀 있었다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지 않은가.
“최악의 경우 대미궁의 식탐에 기대보는 수밖에…….”
강화에 강화를 거듭한 대미궁이라면 악의에 오염된 모아이들일지언정 그 게걸스러운 식성이 어디 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위장이 얼마나 큰지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언니.”
고운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에 잠긴 그녀에게 안젤라가 말을 걸어왔다.
“잊었어요? 내가 주인님과 같은 하이로드라는 사실을?”
위기감이라고는 터럭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음성에 도미니크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의 눈에 태연하기만 한 흡혈귀의 얼굴이 보였다.
“아…….”
그제서야 주인은 자리를 비웠지만 또 다른 하이로드가 자신들과 함께 함을 떠올릴 수 있었다.
비록 닥치는 대로 권능을 먹어치워 괴물이 되어버린 주인에 비해 그 힘의 우열이 있다고는 하나, 엄연히 하이로드였다.
“지금 저들을 막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저들이 왜 몰려들었는가가 문제지.”
새삼 꼬박꼬박 자신을 언니라 부르는 안젤라의 존재가 부담스러워진 도미니크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색은 조금도 하지 않은 채, 말을 받았다.
“저들이 몰려든 이유는 짐작이 가. 절망과 좌절로 꿈이 꺾인 전사들의 거처, 본능적으로 발홀의 기운을 느끼고 몰려든 게 분명해.”
근거 빈약한 추측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차피 하이로드에 관계된 모든 일은 군주를 제외한 소환수들에게는 불가해한 영역의 일이었다.
그저 결과만 있을 뿐, 그 과정과 인과를 파악하는 것은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확실히 일리가 있어…….”
그녀의 말을 들은 모리건이 불쑥 끼어들었다.
“군주께서 살아계셨을 당시에도 발홀에는 사실 전사라고 부르기도 뭐한 놈이 태반이었지. 개중에는 진짜배기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임무에 실패해 눈알 썩은 전장의 망자들이었어. 저들 역시 지저를 떠도는 망령이니 망자의 자리를 대신하기에 썩 어울리는 놈들이야.”
모리건뿐이 아니었다. 헤임달을 비롯한 고대의 영웅급 소환수들 역시 꽤나 그럴싸한 추리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젤라는 자신들끼리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한 도미니크와 소환수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미니크는 지혜롭다. 다만 그녀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미궁 밖의 세상에 대한 경험뿐이었다.
그저 시야를 바깥으로 옮겨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생각지 못했던 추론을 해내는 것을 보면, 확실히 왕의 대리자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역량을 지닌 듯 보였다.
주인은 부재중이고, 모습을 드러낸 모아이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안젤라는 걱정하지 않았다. 차라리 기대가 되었다.
근래 들어 지저에 일어난 변화 중 대부분이 주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눈이 콩나물시루처럼 지저를 빼곡히 채운 모아이들을 향했다. 태반이 육체가 무너지고 이지를 상실한 망령에 불과했지만, 저들이 하나의 목적을 갖고 움직인다면 꽤나 큰 힘이 될 터였다.
만약 도미니크의 생각대로 발홀의 주민이 되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면 주인은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아으으으으으.
모아이들이 음울한 귀곡성을 내뱉었다. 가뜩이나 듣기 거북한 소음을 수천수만이 동시에 울부짖으니 혼이 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전투 준비!”
지레 놀란 퀀투스가 외치고, 나가들이 쉬익 하고 바람 소리를 내뱉었다. 일말의 두려움도 없는 그들의 눈동자에는 오직 투쟁심과 반드시 지켜내 보이겠다는 사명감이 보였을 뿐이다.
안젤라는 다시 한 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곤, 스스로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붉은 성의 진짜 힘을 꺼내들 준비를 했다.
아으으으.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온 지저를 내리눌렀다.
하지만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모아이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개중에 제법 멀쩡해 보이는 하나가 앞으로 나섰을 뿐이었다.
기이한 광경, 원래대로였다면 산 자를 발견하기 무섭게 달려들었을 모아이들이 저리 뜸을 들이니 이상하기만 하다.
“아!”
그런데 앞으로 불쑥 튀어나온 모아이의 모습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 엉망진창으로 무너진 육신이야 여느 모아이가 다 그러하니 특이한 점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피부에 들러붙은 몇 안 되는 새하얀 깃털이 눈에 익었다.
“저건 주인님 곁을 맴돌던 모아이 중 가장 가까운 곳에서 헤매던 놈입니다.”
그나마 나가들 중 모아이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연구까지 한 발리셔스가 눈썰미 좋게 정체를 알아보았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앞으로 툭 튀어나와 알 수 없는 흐느낌을 내뱉는 모아이의 행동이 이상해 그렇게 물으니, 릭샤샤가 대신 대답했다.
“망자가 나선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저들이 당장 달려들 생각이 없는 것만큼은 알겠나이다.”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한 언더 엘프들의 수장답게 모아이들의 기이한 행동에 적의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은 릭샤샤였다.
“지저의 악의에 오염된 모아이들이 적의가 없다라…….”
도미니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모아이들을 살펴보았다.
“정말이네. 당장 전투가 벌어지진 않겠어.”
궁리 끝에 내린 결론, 하지만 만약을 대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가들을 여전히 대기시켜 둔 채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원래대로라면 발홀의 성문 앞에 모인 모아이들을 밀어내려 했으나, 그들이 하는 행동이 하도 기이해 잠시 두고 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녀의 지시에 나가들이 교대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고, 괴상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음.”
그런데 전투라면 눈이 돌아가 미쳐 날뛰는 검은 흉조가 웬일로 잠잠했다. 아니, 잠잠하다 못해 무슨 생각에라도 잠긴 것처럼 고민하는 표정을 해보였다.
“뭔가 수상한 점이라도 있나?”
낌새가 보이면 모아이들로 가득한 지저일지언정 거침없이 파고들 용맹한 새벽닭, 헤임달이 모리건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저 모아이 말이야.”
헤임달의 말에 모리건이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왜 낯이 익지?”
주인의 곁을 가장 가까이서 맴돌던 모아이, 새하얀 깃털이 뭉개진 육신에 들러붙은 망령의 모습이 그녀는 왠지 모르게 낯익었다.
“음, 그러고 보니 나도 왠지 그런 기분이군.”
헤임달 역시 뒤늦게 같은 기분인지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했다. 다른 고대의 영웅급 소환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해보아도 모아이의 정체를 파악할 길은 없었다, 온통 무너지고 뭉개진 육신은 모아이가 되기 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그나마 특색이라고 있는 것이 애처롭게 돋아난 몇 장의 깃털뿐이었다.
“아!”
그 순간 대수롭지 않게 보았던 깃털이 모리건의 눈 가득 들어왔다.
“설마…….”
한 배 속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는 전장을 전전하는 흉조가 되었고, 남은 하나는 왕을 보필하는 백오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모리건은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모아이의 모습에 백오를 떠올렸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하얀 까마귀는 황혼을 이겨내지 못했다. 남은 것은 자신뿐이었다. 그녀는 자꾸만 눈에 박혀드는 흉물스러운 육신의 모아이를 애써 외면했다.
***
그렇게 도미니크와 소환수들이 갑작스레 몰려든 모아이들과 대치하고 있을 때, 미미르가 감금된 대미궁의 심처에 소리 없이 방문자가 찾아왔다.
놀랍게도 어둑어둑한 지저에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원피스를 걸친 어린 소녀였다.
소녀는 깡총거리며 스스럼없이 대미궁의 경계에 발을 내디뎠고, 평소였다면 제 배에 기어들어온 침입자를 집어삼켰을 대미궁은 어쩐 일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착하지. 가만히만 있으면 나도 널 해치지 않아.”
맑고 가녀린 침입자의 음성에 대미궁은 그으으, 하고 울었다. 그 소리가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이 겁에 질려 흐느끼듯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자, 착하다. 그렇게 있어. 볼일이 끝나면 이대로 돌아갈 테니, 얌전히 있으렴.”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미궁을 다독였고, 대미궁은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이내 입을 다물고 완전히 침묵했다.
소녀는 지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하얀 미소를 지어 보이곤 다시 깡총거리며 미궁의 안으로 향했다.
넓고 좁은 통로를 걷는 도중 나가들이 그녀와 마주쳤지만 기이하게도 막아서지 않았다. 마치 예전부터 소녀를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인사를 건네는 이조차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그녀는 아무런 방해 없이 미미르가 있는 대미궁의 심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침상조차 없는 텅 빈 공간에 감금된 채 하릴없이 바닥을 뒹굴던 미미르는 소녀를 발견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 여기까지 직접 오신 겁니까.”
놀라 부르짖는 음성에 소녀가 손가락 하나를 세워 입가에 대보였다.
“쉿.”
“죄송합니다.”
뒤늦게 이곳이 대미궁의 한복판임을 다시 한 번 떠올린 미미르가 목소리를 낮춘 채 사과를 했다.
“며, 명하신 대로 전부 전했습니다. 군주님께서는 자신을 배후에서 도우라 전한 것이 누구인지 완전히 눈치챈 듯한 기색이었습니다.”
소녀가 별다른 말이 없자 미미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는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만 기대하셨던 것과는 달리 군주님께서는 그다지 배신감을 느끼고 계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흐음, 벌써 나를 잊은 건가? 서운한걸.”
말뿐이 아니라 소녀는 정말로 서운하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애처롭고 사랑스러운 모습, 하지만 그럴수록 미미르는 몸을 낮추고 더욱 열심히 굽실댔다.
“잊었다기보다는 아직 확신하지 못하신 게 아닐까요?”
“그랬다면 좋겠지만, 속단할 수는 없어. 10년이란 인간에겐 제법 긴 시간이거든.”
종잡을 수 없는 대화, 그들은 마치 김진우가 배후의 존재를 알아채고 배신감을 느끼지 않은 것이 차라리 아쉬운 듯 보였다.
“뭐, 아무래도 좋아. 순서가 달라지겠지만 어차피 결과는 변하지 않으니까.”
소녀는 금세 서운한 표정을 거두고 상기된 얼굴을 해보였다.
“발홀의 왕좌가 볼 수 있는 건 현재와 미래뿐만이 아니지. 그는 흘리드스ㅤㅋㅑㄹ프에 앉아 비로소 진실을 마주하게 될 거야.”
소녀의 말은 예언과도 같은 울림을 지니고 있었고, 기이한 힘이 있었다.
“그리고 진실은 늘 추악하고 날카로운 법이란다.”
그녀는 작게 속삭였고, 끝에 가서는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미약해졌다.
“하지만 힘들어도 부디 견뎌내렴, 약속된 계승자.”
입술 끝에만 간신히 맴도는 속삭임, 소녀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나의 작은 진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