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75)
던전 견문록-275화(275/319)
# 275
던전 견문록
제 276 화
97. 고대의 망령
잊혀졌던 고대의 요새가 되살아났다.
재앙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나운 크리쳐들이 겁에 질려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고, 심층의 미궁들은 문을 걸어 잠근 채,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았다.
미궁 안이나 밖이나 끔찍한 공포에 빠져든 것과 강대한 공작들 역시 겁에 질려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공작들의 입장에서야 갈기갈기 찢어 사방에 흩뿌렸던 적이 망령이 되어 나타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되살아난 고대의 요새는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요새는 끔찍한 소리로 쉴 새 없이 울어댔고, 새롭게 발홀의 주민이 된 에인헤리들 역시 요새와 함께 울부짖었다.
“으음.”
요새의 중심에 모습을 드러낸 안젤라는 영혼이 빨려들 것만 같은 귀곡성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이로드에 올라 더없이 굳건한 정신을 얻은 그녀에게도 이 미치광이 요새의 포효와 주민들의 비명은 듣기 거북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요새가 뿜어대는 증오의 감정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주인님!”
금빛 물푸레나무로 조각된 왕좌에 앉은 주인의 모습을 본 그녀가 황급히 걸음을 옮기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아…….”
분명 보이는 것은 금빛 광채요, 하나하나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뿐이었지만 유달리 주인의 주변만 어둠이 내려앉은 듯했다. 그 짙은 암흑이 섣불리 다가설 수 없도록 만들었다.
“주인님?”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꽉 움켜쥐는 듯한 기분, 그녀는 쥐어짜듯 주인을 불렀다.
“아, 안젤라.”
홀로 다른 세상에 존재하듯 흐릿하게 보이는 주인의 모습에 혹시라도 닿지 않을까 염려했던 그녀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주인은 비록 바싹 메마른 음성일지언정 곧장 대답해 주었다.
겨우 안심한 얼굴로 다시 주인에게 다가가려던 그녀가 뒤늦게 턱을 치켜 올린 주인의 눈을 발견했다.
자조와 증오, 소름끼치는 광채가 주인의 눈가에 어른거렸다.
“아아, 다행스럽게도 발홀을 얻는 데 성공했다.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어, 그저 이곳에 앉아있는 것으로 시험이 끝났으니까.”
건조한 음성과는 다르게 주인의 눈빛은 여전히 광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아아…….”
안젤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이 요새, 정말 터무니없는 물건이더군. 그대의 붉은 성보다 신기한 것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던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인은 미친 사람처럼 혼자 지껄여댔다.
“무르디 무른 금으로 빚은 성벽은 그 무엇으로도 파괴할 수 없고, 첨탑의 묠니르는 백작이라 한들 단번에 찢어죽일 만큼 대단하지. 게다가 이 왕좌 보이나? 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왕좌야말로 황당한 놈이지.”
자랑이라도 하듯 주절대는 주인은 말과는 달리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놈은 말이야. 앉아서도 천리 밖의 지저를 살필 수 있는 보물이다. 그리고 난 이 의자에 앉아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어, 어떤…….”
궁금해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떤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기에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짠 것일 뿐이었다.
“아. 뭘 봤냐고? 내 과거를 봤지.”
하지만 질문이 잘못되었던 모양이다. 광기를 머금은 채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완전히 광기에 잠겨들었다.
“난 말이야. 지저에서 나고 자란 던전 베이비야. 내 아비는 지저의 보물을 훔쳐 달아났다가 사라진 지상인이고. 난 그 대가로 삶의 대부분을 냄새나는 토굴에서 흙을 퍼 나르며 노예처럼 살아왔다. 그래서 난 다른 무엇보다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었지. 강해지고 누군가의 물건을 빼앗는 것은 그저 수단에 불과했을 뿐이다.”
비탄과 슬픔, 상실감 그리고 증오가 휘몰아쳤다.
“그런데 말이야.”
그럴수록 주인의 음성은 더욱 낮게 가라앉았다.
“그게 전부 의미 없는 짓이었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어?”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었기에 안젤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주인 역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 모든 게 정해져 있었던 거지.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또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거다.”
착, 가라앉은 음성이 소름 돋을 정도로 허무했다.
“애초에 난 그저 망령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던 주인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이리 가까이 오라. 내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걱정했지 않은가. 이리 와서 날 살펴보라. 난 멀쩡하다.”
하지만 안젤라는 주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왜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지? 마치 날 두려워하는 것 같군.”
태생적으로 다른 이의 힘과 생명을 갈취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흡혈귀. 그리고 주인은 그런 자신만큼이나 많은 이들의 삶과 힘을 빼앗으며 살아왔다. 그러니만큼 주인의 기운은 웅대하면서도 혼탁했고 탐욕스러웠다.
그런 탐욕이 온전히 자신을 향했을 때, 그녀는 더없는 공포를 느꼈다.
가까이 다가갔다간 휘말려 버린다.
안젤라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대의 주인이다. 그대가 애모하고 그토록 중히 여기던 주인이 바로 나다.”
평정을 가장했던 주인의 얼굴에 금이 갔다. 사나운 증오가 방향을 잃고 온 사방을 내리 눌렀다.
“아악!”
비록 피의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다소간의 손실이 있었으나 자신은 붉은 성의 주인이자 이면 세계의 지배자였다. 그런 자신조차도 주인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대도 내가 그저 껍데기로 보이나?”
주인의 질문에 안젤라는 파랗게 질린 입술을 짓씹었다.
대답해야 했다. 당장에라도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 같은 주인의 기세 뒤로 조바심이 느껴졌다. 저 차가운 가면 뒤에 웅크린 채 안절부절 못하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으으…….”
하지만 목이 턱 막힌 것처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마치 포식자를 앞에 둔 초식동물처럼 그녀는 몸을 떨었다.
주인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천적이다. 생을 빼앗고 힘을 갈취하여 마침내 그 존재조차 우걱대며 씹어 삼켜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괴물이다.
태생적으로 피할 수 없는 천적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의 목을 콱, 하고 움켜쥔 채 놓아주지를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붉은 성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누구도 자신을 해할 수 없는 이면 세계에 숨어 두려움을 떨쳐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칠 수가 없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상 모두가 두려워하고 배척하더라도 자신만큼은 주인의 곁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녀를 붙잡았다.
“주…….”
다시 힘을 내 목에 힘을 주고 주인을 불러보려 했다. 수천 개의 칼날이 목젖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 그녀는 이를 악물고 다시 입을 열었다.
“주…….”
“주인님!”
필사적으로 겨우 첫마디를 꺼냈을 때,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자신이 차마 끝맺지 못한 주인이란 말을 너무나도 쉽게 마무리 지은 그 맑은 음성이 지독스러울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주인님!”
또다시 맑은 음성이 주인을 불렀다. 그제서야 안젤라는 언제 나타난 것인지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의 도미니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발견한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
발홀의 중심부에 도착했을 때, 도미니크는 자신이 예상한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주인의 영혼이 입은 타격이 생각 이상으로 컸다는 것이었다.
지금 주인은 부서지기 직전, 금이 간 유리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마치 적진에 홀로 고립된 것처럼 사방팔방으로 악의를 뿜어대는 주인의 사고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주인은 고대의 군주가 뿌려둔 씨앗이었으며, 실패한 이상주의자의 조각이었다. 고대 군주들의 파편이 그러했듯이 정해진 길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던 꼭두각시였다.
실패한 이상주의자, 지저의 황혼을 일으킨 몽상가, 방랑의 군주가 지저에 남긴 미련의 조각이 바로 주인의 근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도미니크는 왕과 교감을 허락받은 유일한 여인, 용왕의 반려였다. 그녀는 혼탁하게 가라앉은 주인의 내면 속에서 꼭꼭 숨겨진 조각 하나를 찾아냈다.
“도미니크, 그대는 대답할 수 있나? 나는 누구지? 아직 그대의 주인인가?”
간신히 형태나마 유지하고 있던 주인의 영혼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주인은 지독스러운 상실감과 증오로 폭주하여 다시 한 번 악룡의 태를 뒤집어 쓸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전과는 달리 영영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으리라.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주인의 물음에 답했다.
“오직 하나뿐인 나가들의 왕이며, 서리 내린 대미궁의 오롯한 주인이십니다.”
무너져 내리는 주인을 다시 일으키기에는 그녀의 음성은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었다.
“나의 왕이시여!”
하지만 그 작은 울림에 다시 하나의 울림이 더해졌다.
“하나뿐인 용왕이시여!”
그리고 다시 거기에 울림이 더해지고, 수없이 많은 울림이 무너지려는 그의 영혼에 닿았다.
***
[나가 여왕이 고유 능력, ‘왕의 전령’을 사용했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해 이곳에 왕의 충성스러운 군대가 집결했습니다.]사방에서 빛무리가 뭉친다싶더니 이내 나가가 되었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나가들은 하나같이 그 어디에도 흔들림 따위는 보이지 않는 올곧은 눈빛을 보내왔다.
김진우는 그 확신에 찬 시선 속에서 마구잡이로 날뛰어대던 악의와 혼란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내가 이룩한 모든 것이 거짓된 승리요, 업적임에도 그대들은 여전히 나를 왕이라 부르는가.”
“지저에 누가 있어 전승의 이름과 정복의 업적을 부정하겠나이까! 또한 부정한다 한들 왕께서 걸어가실 그 길에 창대한 영광이 있을진저 과거의 영광이 뭐가 그리 중하겠나이까!”
퀀투스의 대답에 그는 다시 물었다.
“나는 영광스럽던 고대의 지저를 시궁창에 처박은 위선자다. 언젠가 과거의 내가 뿌린 씨앗이 지저에 다시 끔찍한 재앙을 몰고 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대들은 나를 따르겠는가.”
이번에는 도미니크가 대답했다.
“주인님께서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면, 저희 일족은 기꺼이 악마가 되겠습니다.”
수백 쌍의 눈이 보내오는 올곧은 시선이 힘주어 움켜쥘 작은 희망이 되었고, 김진우는 그 희망을 놓지 않았다.
“지옥이라…….”
분노와 절망은 여전했지만 그는 조용히 그 모든 감정을 안으로, 안으로 갈무리했다.
지금은 이 증오를 표출할 때가 아니다.
그는 찢어지고 곪아버린 상처를 억지로 봉합했다. 언젠가 채 풀어내지 못한 감정이 영혼을 좀먹고 안에서부터 썩어 들어갈지언정, 때가 올 때까지 이 모든 것을 속에 품고 있을 것이다.
고대의 약속을 위해 배덕의 오명을 쓴 채 홀로 지저에 남은 찬탈자의 숭고한 희생에 기꺼이 침을 뱉고 흙을 뿌리리라.
그렇게 마음속에 칼 한 자루를 세운 순간 홀리드스ㅤㅋㅑㄹ프의 진짜 시험이 끝이 났다.
[가혹하고 냉엄한 진실을 이겨낸 당신에게 홀리드스ㅤㅋㅑㄹ프가 경의를 표합니다.] [홀리드스ㅤㅋㅑㄹ프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금빛 물푸레나무 의자의 진정한 이름은 ‘진리의 왕좌’입니다.] [진리의 왕좌의 진정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메시지가 끝이 나기 무섭게 홀리드스ㅤㅋㅑㄹ프, 진리의 왕좌가 찬란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