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77)
던전 견문록-277화(277/319)
# 277
던전 견문록
제 278 화
98. 찬탈자의 진짜 이름
어떻게든 제 목숨을 건져보겠다고 바삐 입을 놀려대던 미미르가 입을 다물고 김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들은 대로다. 나는 방랑의 군주가 지저에 남긴 파편 중 하나.”
간신히 한 마디를 꺼내놓고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려대던 미미르의 얼굴에 불신과 경악이 뒤늦게 번져가기 시작했다.
“구, 군주님은 분명 외눈박이 군주의 이름을 계승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것 또한 틀리지 않아.”
이제 미미르는 완전히 멍청한 얼굴을 하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있을 수가 없다고요. 방랑 군주의 그릇이 외눈박이의 이름을 품다니요!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가 계승한 이름은 외눈박이 군주의 것 하나가 아니었지만, 굳이 그런 사실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대화를 이어가기에 필요한 것은 방랑의 조각 하나면 충분했으니까.
“그대가 믿든 안 믿든, 그렇게 애써 부정한다 해도 진실이 변하는 건 아니야.”
“그, 그럼 그 가면이 군주님을 찾아간 것도…….”
미미르의 말에 김진우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위선자의 가면을 떠올리고는 반사적으로 품을 뒤적거렸다.
“꺼, 꺼내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는 이내 품을 뒤적이던 손을 멈추어야 했으니, 하얗게 질린 미미르가 비명처럼 그를 만류했던 탓이다.
“마, 만약 군주님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더더욱 그 가면을 써서는 안 됩니다!”
낯빛 창백한 미미르가 겁 없이 다가와 그의 손을 붙들고 매달렸다.
“파편과 파편이 만났을 때, 더 큰 조각이 작은 조각을 먹어치우게 마련입니다. 군주님께서 옛 군주의 파편을 흡수하셨던 것처럼.”
외눈박이 군주의 파편, 우스투스는 지닌 바 힘을 건네주고 소멸했고, 광휘 군주의 파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이로드의 힘을 믿고 시험하실 생각일랑 절대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군주님께서 하이로드의 힘을 지니셨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습니다. 파편이란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미미르는 전에 없이 심각한 어조로 몇 번이나 그에게 경고했다.
“설마 처음부터 그걸 노린 건가.”
유달리 가면을 착용하라 등을 떠밀던 메시지를 떠올린 김진우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때 메시지의 권유를 믿고 가면을 썼다면 아마도 이곳에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닌 방랑의 군주였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겨우 갈무리해 두었던 분노와 증오가 다시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비록 몸뚱아리를 빼앗기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었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자신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을 떠안은 채 평생을 살아가야 했다. 본의 아니게 약점이 생긴 것이다.
그 사실이 그를 더없이 불편하게 만들었고 그는 품 안의 가면을 바술 듯 힘주어 움켜쥐었다.
“기분 더럽군.”
단단한 암석조차 가루로 만들 수 있는 악력에도 끄떡도 없는 가면의 감촉에 그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아무래도 저희가 모르는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께름칙한 얼굴을 한 미미르였지만, 제 상황을 잊지는 않았는지 이내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 말해주었다.
“찬탈자는 심층에서 태어난 지저인들에게 씨앗을 심어두었고, 그 덕분에 원래대로라면 이 가혹한 지저의 환경에서 버텨내지 못했을 지저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죠.”
저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은 심층의 던전 베이비들이 저마다 특별한 이능을 지닌 것 또한 찬탈자가 심어둔 씨앗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찬탈자야말로 고대에 안녕을 고한 당사자 아니겠습니까. 그런 찬탈자가 어째서 적이라 할 수 있는 하이로드들의 씨앗을 사방팔방에 뿌려둔 것인지 당최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애초에 찬탈자와 하이로드들은 적이 아니었으니까.”
“네?”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지 미미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김진우는 미미르가 궁금해 하거나 말거나 혼잣말을 주워섬겼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확신할 수 없군.”
하이로드들이 지저를 떠나야 했던 것은 원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한 약속이었고, 그들은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마침내 그 약속을 이행했다.
하지만 찬탈자는 아니었다. 만약 찬탈자가 정말로 약속을 지켰다면 지저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일 수는 없었다.
“군주의 진명이란 존재의 근원을 아우르는 절대적인 것. 오랜 시간 배덕의 군주라 불려온 탓에 아무래도 찬탈자는 진짜 이름을 잊은 모양이야.”
미미르가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으며 망설이다 물었다.
“대체 그곳에서 무엇을 보신 겁니까.”
김진우는 대답 없이 미미르를 바라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 너머로 증오와 광기가 휘몰아쳤고, 미미르는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는 황급히 말을 얼버무렸다.
“괘, 괜한 것을 물었습니다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
“황혼을 보았다.”
미미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을 들었다는 사실에 놀라 눈을 치켜떴고, 그 내용에 다시 한 번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깨어진 꿈의 편린을 보았지.”
“그게 무슨…….”
“옛 군주들이 원했던 것은 보다 완벽한 세상이야.”
김진우는 이미 미미르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마치 저 너머 어딘가를 향하듯 흐릿하기만 했다.
“갈라지고 쪼개져 불완전한 세상을 하나로 합치기를 바랐고, 기꺼이 힘을 모으기를 주저하지 않았어.”
그는 홀리드스ㅤㅋㅑㄹ프가 보여주었던 과거의 기억을 들추어냈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어. 그 결과 지저에 끔찍한 재앙이 도래했고. 흐릿하나마 지저를 밝혀주던 태양과 달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지저에는 황혼이 찾아왔지.”
미미르 역시 알고 있을지 모를 과거 이야기.
“군주들은 비록 심한 상처를 입었지만 마침내 황혼을 이겨낼 수 있었지.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 기울어 가던 달과 태양이 끝내 추락하고 지저에 ‘밤’이 찾아왔다.”
하지만 미미르는 모르는 고대의 비사이기도 했다.
“힘을 모두 소진한 군주들은 밤을 이겨낼 수 없었고, 그렇게 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어. 살아남은 것은 외눈박이와 방랑, 그리고 자애(慈愛)뿐이었지.”
밤을 몰아낼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외눈박이는 남은 하나의 눈마저 잃었고, 방랑은 두 발을 잘렸다. 오직 자애의 하이로드만이 제 힘을 보전할 수 있었다.
“진짜 비극은 그때부터였다.”
살아남은 이들은 옛 군주들의 거룩한 희생에 감사하기는커녕 그들의 육신에서 흐르는 광혈(光血)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외눈박이와 방랑은 생존자들의 광기로부터 스스로의 힘과 육신을 지켜내기에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자애의 군주 역시 홀로 그 많은 이들을 감당하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자애는 미쳐 버린 자들의 탐욕이 거룩한 군주의 권능으로 배를 채우는 것을 볼 수가 없었어. 그래서 차라리 그들을 하나로 아울러 그 우두머리가 되기를 선택했고, 군주들의 권능을 인장으로 만들어 친히 배덕자들의 손에 끼워주었어. 그렇게 함으로써 군주들의 권능이 완전히 배덕자들에게 녹아드는 것을 막아낸 거지.”
죽음을 맞이한 군주들의 권능은 그렇게 잘게 쪼개져 지저 곳곳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언제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 배덕자들의 손에 끼워진 인장을 빼앗는 것으로 자신의 권능을 되찾을 수 있었으니 완전히 그 이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지저에 귀족이 탄생했다. 자애는 배덕의 군주, 찬탈자가 되었고, 군주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
미미르는 경악과 불신에 찬 얼굴로 입만 어버버거려댔다.
“이 모든 것이 바로, 군주 중 유일하게 다른 세상을 보고 열병을 앓은 방랑의 이상에서 시작된 재앙.”
김진우는 품 속의 가면이 꿈틀대는 듯한 느낌에 가슴께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이 지독스러울 정도로 멍청하고 이기적인 망령은 끔찍하게 육신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마지막까지도 미몽을 버리지 못했다.”
꿈을 헤매는 듯 몽롱했던 그의 눈동자가 불현듯 차갑게 식어버렸다.
“아직 재앙은 끝이 나지 않았다는 말이야.”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미미르가 겨우 입을 떼었다.
“그럼 위시스톤이 지상으로 흘러들어 간 게…….”
“맞아. 처음부터 계획되었던 것이지.”
지저의 신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위시스톤이 지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동떨어진 지상과 지저, 두 세상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또한 위시스톤을 빼앗겼다는 핑계로 전쟁을 일으켜 군주의 그릇으로 쓸 지상인들을 구할 수가 있었으니, 일석이조라면 일석이조였다.
“왜 하필 지상인들을…….”
“강대한 힘은 때로는 스스로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기도 하지. 과거 계획이 실패했던 이유 중 하나는 하이로드들의 존재를 지상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하이로드들이 지상의 존재의 몸을 빌어 태어난다면, 그때는 지상도 더 이상 하이로드들을 부정하고 배척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재앙은 다가오고 있어.”
인정하기는 싫지만 자신 역시 일조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기이한 강박에 의해 지상에 미궁을 옮겨두었고, 그렇게 지상에 진출한 미궁은 위시스톤만큼은 아니어도 지저와 지상의 경계를 허무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다.
꼭 모래알이라도 씹은 것처럼 입안이 써, 그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남은 건 두 번, 3차와 4차 복원이 오고 나면 싫든 좋든 지저와 지상의 경계는 무너지고 세상은 하나가 되리라.”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스스로가 방랑 본인이 아닌지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복원을 막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만이 자신을 꼭두각시 취급한 군주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미미르.”
“네, 군주님.”
너무나도 엄청난 사실을 잇달아 들은 탓인지 미미르는 답지 않게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음성에 담긴 미묘한 기대를 놓치지 않고 금세 표정을 수습했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말씀만 하십시오.”
고개 숙인 미미르를 보며 그가 말했다.
“지상으로 흘러들어간 위시스톤을 찾아라. 위시스톤을 찾아서 지저로 가져와라.”
미미르는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하기야 지저도 아닌 지상으로 흘러들어 간 위시스톤을 찾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이미 그대가 지상과 연이 있음을 알고 있으니, 지닌 바 역량을 총동원해 임무를 완수하라. 그것만이 그대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뜨끔한 얼굴을 한 미미르가 조금은 미덥지 못한 얼굴로 알았노라 대답했다.
“하지만 그전에.”
김진우는 그런 미미르를 바라보며 이곳을 찾은 진짜 용건을 꺼내 들었다.
“그대의 본분을 다하는 게 우선이겠지.”
영문을 몰라 눈만 껌벅이던 미미르가 뒤늦게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영원의 창고를 개방하라!”
미미르는 블랙 머천트의 암상인이자 찬탈자의 전령이기 이전에, 영원의 창고지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