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78)
던전 견문록-278화(278/319)
# 278
던전 견문록
제 279 화
99. 겨우살이 나무의 가지
벌써 세 번째 찾는 영원의 창고였지만, 전에 보았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존재 자체를 빨아들일 듯 위협적으로 혀를 날름거리던 그곳은 더 이상 주인을 적대하지도, 유혹하지도 않았다.
“완전히 창고의 인정을 받으셨군요. 하기야 발홀까지 계승하신 마당에 창고가 그 자격을 부정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요.”
자신 역시 창고의 저런 모습은 실로 오랜만이라며 미미르는 필요 이상으로 감격한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달리 당부할 말이 없는가.”
김진우가 그렇게 물으니, 슬며시 한쪽으로 물러나 길을 터주었던 미미르가 슬쩍 한마디를 했다.
“굳이 주제넘은 말씀을 하나 올리자면 너무 오랜 시간 저 안에서 머무르진 마십시오. 귀물의 영롱함은 분명 눈이 즐거운 것이나, 때로는 그 빛에 홀려 중요한 것을 잊고 마니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한낱 창고지기 주제에 진짜 주인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생각했는지 이내 민망한 얼굴로 재빨리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정당한 주인께서 제 속을 보고 기꺼워하신다면 영원의 창고 역시 기뻐하겠지만 말입니다.”
미미르의 대답에 그는 피식 웃어 보이고는 창고의 입구에 섰다.
“그대의 말대로 정말 창고가 그리 대단하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군. 그대는 굳이 이곳에서 나를 기다릴 필요 없으니, 지상의 일에 신경을 쓰라.”
미미르는 그의 말에 고개를 숙여 보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탐욕스러운 임프는 그가 무슨 보물을 가지고 나오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지.”
짧게 혀를 찬 김진우는 이내 넘실거리는 창고의 표면 너머로 한 발을 내디뎠다. 잔잔하던 입구가 일렁인다 싶더니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발을 빨아들였다.
“음.”
생소한 감각에 그가 신음하는 사이, 몸 전체가 입구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당신은 마침내 고대부터 이어져 온 보고(寶庫)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영원의 창고는 하이로드들의 성만큼이나 신비로운 존재이자, 지저 역사상 다시없을 재화의 보고입니다. 만약 영원의 창고가 없었다면 외눈박이 군주와 발홀의 전쟁광들은 배를 곯았을지도 모릅니다.] [가장 큰 전쟁, 황혼을 앞두고 외눈박이 군주는 딱 한 번, 다른 이들에게 이 창고를 개방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곳에서 흘러나온 무기들은 최후의 전쟁을 위해 출정한 열 군주의 모든 병사가 무장하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쟁은 패배로 돌아갔고, 창고의 주인은 끔찍한 괴수 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 바람에 당시에 유출되었던 대부분의 무기는 회수되지 않았습니다.]창고를 넘기가 무섭게 쉼 없이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라진 무기들 중 일부가 부지런한 창고지기에 의해 다시 원래의 자리를 찾았지만, 아무리 부지런하고 수완이 좋았다 한들, 그렇게 되찾은 무기와 보물들은 가장 풍요로웠던 황혼 이절의 시절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영원의 창고는 새로운 주인이 강탈당한 물건들을 다시 되찾아주기를 바라는 듯합니다.]“아…….”
이곳의 역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김진우는 눈 아프게 떠오르는 메시지 너머로 보이는 창고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바닥과 허공조차 구분할 수 없고 빛과 그림자의 경계조차 모호하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허허로우면서도 동시에 온갖 물건으로 가득 찬 번잡함 그 자체였다.
[거인의 허리띠.] [외눈박이 군주의 가장 강력한 대적자였던 거인족의 왕이 사용했던 허리띠입니다. 거인족의 왕은 이 허리띠에서 흘러나오는 거력으로 수없이 많은 에인헤리들을 찢어발겼고, 외눈박이 군주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거인족의 왕은 흉조와 백오의 유인계에 속아, 발홀의 첨탑 앞까지 내몰렸고 끝내는 묠니르에 맞아죽고 말았습니다.] [살아생전 용맹한 거인의 상징이었던 허리띠만이 한때 외눈박이 군주의 호적수였던 거인족 왕이 지저에 있었음을 알려주었을 뿐입니다.] [착용자에게 거인의 힘과 단단함을 제공하는 이 허리띠는 그 자체로 다시없을 보물이지만 안타깝게도 거인이 아닌 이상 착용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거대합니다.] [외눈박이 군주가 몇 번인가 전투에서 채찍을 대신하여 사용했던 적이 있지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내 이 희대의 보물을 창고에 내던져 둔 채 잊고 말았습니다.]보기만 해도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무지막지한 힘이 느껴지는 허리띠가 눈을 가득 채웠다.
평소라면 언제까지고 시선을 빼앗겼을 법한 물건, 하지만 주변에 가득한 보물 중에 허리띠 못지않은 것이 단 하나도 없었으니 그는 이내 눈을 돌려 또 다른 보물을 쫓았다.
[난쟁이의 쇠사슬.] [조금씩 기울어 가는 지저의 달과 태양을 억지로 고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쇠사슬은 가장 뜨거운 화염에도 녹지 않고, 가장 차가운 냉기에도 얼지 않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쟁이들이 완성하기 전에 달과 태양이 추락했고, 이후로 이것은 가장 흉폭한 괴수와 죄수들을 묶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가장 단단한 이빨과 발톱으로도 끊을 수 없는 이 쇠사슬은 그 자체로 강력한 무기입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쩔그렁거리는 소리가 너무나 커 그 소리만으로도 적들이 당신의 존재를 알아차릴 거라는 것입니다.]칼과 방패, 채찍과 창, 활과 갑옷.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귀물이고 보물이었으며 신병이기(神兵利器)가 아닌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달리 그의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있었다.
이리저리 몸통 굽은 볼품없는 나뭇가지 하나, 번쩍거리는 다른 무구들과는 다르게 광채 하나 보이지 않는 모습이 초라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허리 구부정한 노인이나 쓸 법한 나뭇가지로부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겨우살이 나무의 가지로 만든 창.] [과거 지저에 번성했던 겨우살이 나무들 중에서도 가장 어린 나무의 가지로 만든 창입니다.] [겉보기에는 회초리로도 쓰지 못할 가녀린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 이 볼품없는 창이야말로 가장 강대했던 군주 외눈박이가 두려워하여 창고에 넣어두고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마병입니다.]다른 무기들과는 달리 내력이랄 것도 없는 짤막한 설명, 그렇지만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감아쥐었다.
[겨우살이 나무의 가지로 만든 창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군주님!”
역시나 예상대로 미미르는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예상보다 빨리 나오셨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리저리 눈알을 굴려대는 모습에 탐색의 기색이 역력했다.
“오! 그건 난쟁이들이 만든 쇠사슬이고, 그건 부르짖는 뿔피리가 아닙니까.”
미미르는 그의 손에 들린 쇠사슬과 뿔피리를 금세 알아보고는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소리가 요란스럽기는 하지만 그 쇠사슬이야말로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가장 강력한 놈입니다. 제가 그놈을 다시 되찾기 위해 지불한 대가만 해도 무지막지하답니다.”
물건에 대한 설명인지 공치사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 뿔피리는 사실 임자가 있는 물건인데, 군주님의 휘하에 있는 새벽닭의 것입죠. 난리 통에 잃어버린 것을 제가 다시 찾아놓았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새벽닭에게 주면 퍽이나 좋아할 겝니다요.”
그 뒤로도 한참이나 김진우가 영원의 창고에서 들고 나온 온갖 물건에 대한 설명과 공치사가 이어졌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으셨나 봅니다. 전 군주님께서 이번에 창고에 들어가시면 최소한 나가들 전체를 무장시킬 무기를 가지고 나오실 거라 생각했는데 말입죠.”
그러면서 슬며시 시키지도 않은 변명을 해대는 미미르였다.
“하기야 제가 백방으로 헤매고 다녔다고는 하나 지금의 창고가 과거와 같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군주님의 눈에 드는 물건이 많이 없었을 수도 있겠군요.”
“아니, 그대의 말과는 달리 마음에 드는 물건은 많았다. 그저 내 몸이 하나이니 한 번에 다 들고 나오지 못했을 뿐이다.”
실제로 김진우는 창고를 나서면서도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가지고만 나가면 대번에 제 몫을 할 무기들이 창고에 한가득인데 그리 쉽게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쉬움은 잠깐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생각지도 못한 창고의 능력을 발견했던 것이다.
“창고를 옮기겠다.”
“네?”
그의 말에 미미르가 놀라 눈을 치켜떴다.
“창고를 옮긴다니요?”
“말 그대로다. 이곳은 방어하기에 용이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창고를 발홀로 옮길 참이다.”
“그, 그게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김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 번에 들고 나갈 수 있는 물건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놀랍게도 영원의 창고는 제 스스로의 의지로 이전을 물어왔다.
그리고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영원의 창고를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당장 눈에 띄는 물건들을 챙겨왔을 뿐, 나가들을 무장시킬 무기들은 창고를 이전시킨 뒤에 한 번에 꺼낼 참이다.”
“아…….”
처음에는 생각보다 적은 물건을 꺼내온 그를 보고 내심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던 미미르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하지만 창고의 원주인이 옮기겠다는데 한낱 창고지기가 이를 말릴 구실이 있을 리가 없었다.
“미안하게 됐군.”
“괘, 괜찮습니다. 군주님이야말로 창고의 온당한 소유자십니다. 어떻게 하시든 간에 그건 군주님의 선택입지요.”
“아니,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영문을 모르면서도 자꾸 불안해지는지 죄 없는 입술이나 짓씹어대던 미미르가 이유를 물었다.
“창고를 옮길 경우, 이곳이 사라진다더군. 하기야 사실 여기 자체가 창고의 권능에 기대 만들어진 곳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뭐, 어찌 되었든 간에 그대에게는 미안하게 됐다.”
그제야 사과의 의미를 깨달은 창고지기는 입을 쩍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털썩.
미미르가 뒤늦게 절망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만약 원한다면 발홀에 그대와 블랙 머천트가 움직일 만한 거처를 마련해 주도록 하지.”
그다지 미안한 기색도 없이 뻔뻔하게 지껄여대는 그를 바라보던 미미르가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해주고 싶은데 차마 그러지 못해 울화통이 치미는 눈치였다.
“그럼 그대는 어떻게 할 건지 잘 고민해 보고, 나를 찾도록 해라. 당분간은 발홀에 있을 테니 그쪽으로 오면 되리라.”
창고를 통째로 털린 창고지기가 화병으로 쓰러지거나 말거나, 그는 무심하게 한마디를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영원의 창고를 떠났다.
“피도 눈물도 없는…….”
그가 떠나고 난 자리, 홀로 남은 미미르가 까드득, 이를 갈아댔다.
탐욕스러운 창고의 새 주인은 만족을 몰랐고, 고작 무기 몇 개를 꺼내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아예 통째로 창고를 가져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