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79)
던전 견문록-279화(279/319)
# 279
던전 견문록
제 280 화
김진우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손님이 있었다.
“모든 유산을 온전히 계승한 것을 축하해.”
오랜만에 만난 통곡의 군주, 캐서린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유 따위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억지웃음이나마 매달려 있던 입매가 금세 굳어지고, 그녀가 찾아온 용건을 꺼내 들었다.
“예상이 맞았어. 다른 하이로드들 역시 그녀를 알고 있었어.”
소희야말로 이 모든 일의 배후인 배덕의 군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에게는 새삼 놀라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생각보다 놀라지 않네. 예상하고 있었던 거야?”
통곡의 군주는 고생스럽게 알아온 정보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그를 보며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는 순간적으로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과연 믿어도 될지 확신이 들지 않았던 탓이다.
“고대의 지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아니, 질문을 달리하지. 그대에게 계승된 고대의 기억은 어디까지지?”
하지만 망설임은 짧았다. 만약 캐서린이 이 모든 일과 연관이 있었다면 소희의 정체를 캐내겠다고 그렇게 지저를 바삐 헤매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 역시 연기였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그는 그녀를 의심하는 대신 동료로 만드는 것을 선택했다.
김진우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털어놓았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통곡의 군주가 계승한 하이로드의 기억은 황혼 이전의, 권능과 유산에 관련된 것뿐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옛 군주들의 야망을 듣고는 망연자실한 얼굴을 해보였다.
“우리가 여태 죽을 고생을 하며 아등바등 살아남은 게 전부 망령 놈들의 할로윈 파티를 위한 거였다고?”
그녀는 스스로가 이룩한 모든 것이 그저 누군가의 안배에 의해 주어진 결과일 뿐이라는 사실에 허탈해했고, 자신이 옛 군주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분노했다.
“나 역시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다.”
사실 분노와 증오를 따지자면 그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저 누군가의 농간에 놀아났을 뿐인 그녀와는 다르게 그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분노를 속에 품은 채 바깥으로 꺼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은근한 음성으로 캐서린의 분노를 부추겼을 뿐이었다.
“이제 곧 지저는 과거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우리를 농락한 망령이 무덤에서 일어나 뻔뻔스럽게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을 빼앗아가겠지.”
그는 능청맞게도 비탄과 분노를 적절하게 뒤섞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우리는 그걸 막을 수 없다.”
조각은 보다 더 큰 조각에게 흡수되는 법, 아마도 배덕의 군주는 그러한 사정 역시 계산에 두고 씨앗을 뿌렸을 것이다.
“미치겠군.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얌전히 파편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라는 거잖아.”
캐서린 역시 파편을 흡수한 경험이 있었던지라 금세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는 신음을 내뱉었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뭐? 방법이 있단 말이야?”
완벽한 입장 역전, 직전의 만남까지만 해도 계승된 기억과 기세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던 그가 이제는 완전히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 사실을 느꼈는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지금은 달리 방도가 없는 탓에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먼저 복원을 최대한 늦춰야 한다.”
“복원의 때는 빠르든 늦든 간에 찾아와. 그건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완전히 막을 필요는 없어, 그저 잠깐의 시간이 벌면 그뿐.”
복원의 시기를 늦출 방법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는 둘째 치고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며 캐서린이 물었다.
“그 사이에 존재를 위협할 파편을 찾아 제거할 생각이다.”
쉽게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찾는다 한들 제거하는 것이 쉬울 턱이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오히려 이쪽이 먹혀버릴 가능성조차 존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옛 군주들의 권능이 아무리 대단했다고 한들, 전지전능했던 것은 아니었고, 그들도 모르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옛 군주들이 제 몸을 잘게 쪼개 때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 새로운 이름의 하이로드가 탄생했다. 과거 단 열뿐이었던 이름이 지금은 열하나가 된 것이다.
만족을 모르는 탐욕스러운 포식자, 그게 새롭게 탄생한 하이로드의 이름이었다.
“나에게 파편을 가져오라.”
파편은 또 다른 파편을 끌어들이게 마련이니만큼 하이로드들이 자신과 관계된 파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찾아낸 파편의 유혹을 과연 그들이 이겨낼 수 있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염려를 털어버렸다.
아직은 망령들이 부활할 때가 오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이 방랑의 사념이 담겨 있을지도 모를 가면의 유혹을 그토록이나 쉽게 이겨낼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파편의 유혹을 이겨냈듯이 다른 하이로드들 역시, 지금이라면 이겨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른 하이로드들을 만나보고 싶군. 일이 틀어지면 함께 힘을 모아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 전에 얼굴이라도 한번 봐두는 게 좋을 테지.”
“그들이 과연 내 말을 어디까지 믿을지는 알 수 없지만, 한번 노력은 해보지.”
그렇게 한마디를 남긴 통곡의 군주는 떠나갔다.
“주인님!”
진즉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던 도미니크와 소환수들은 캐서린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그에게 다가왔다.
“먼저 그대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김진우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소환수들에게 그간의 사정을 전부 설명해 주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군요. 지저와 지상을 하나로 합치다니, 그게 가능이나 하답니까?”
“불가능하니까 실패했겠지.”
“한 번 실패했다고 두 번째도 실패하란 법은 없다.”
과묵한 헤임달마저 황당함을 드러냈고, 모리건은 아예 대놓고 군주들의 허황된 야망을 비웃었다.
“그랬군요. 주인님께서도 고대의 지저와 아예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었군요.”
대부분의 소환수는 고대의 비사에 놀라면서도 정작 주인의 정체가 한낱 파편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별로 놀라지 않는군.”
“주인님께서 지상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신경 쓰지 않았던 저희입니다. 이제 와서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지상인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보다는 옛 군주의 후예를 섬기는 게 더 기꺼울 지경입니다.”
태생이 충성스럽고 우직한 나가들은 주인의 출신이 어떻든 간에 신경 쓰지 않았고, 모리건을 비롯한 고대의 소환수들은 애초에 새 주인의 카리스마와 만족을 모르는 정복욕에 승복한 것이라 그런 것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는 눈치였다.
“주인님이시라면 그 증오와 절망조차 훗날 요긴하게 쓰실 거라 생각하지만, 너무 깊은 어둠을 품어 스스로 화를 자초하지는 마소서.”
오로지 도미니크만이 그가 깊게 갈무리한 분노를 교감하고 우려를 표했을 뿐이었다.
“명심하도록 하지.”
그렇게 그의 과거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안젤라.”
그의 말에 여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안젤라가 침울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대에게 괜한 짐을 지게 한 것 같구나.”
한사코 피의 근원을 취하기를 거부하던 안젤라를 강제로 등 떠밀다시피 하여 하이로드로 각성시킨 것이 바로 그 자신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붉은 성을 포기하더라도 직접 진혈의 권능을 흡수하는 게 나았으리라.
“그런 말씀 마세요. 비록 제가 주인님을 실망시켜 드리긴 했지만, 두 번은 그러지 않아요.”
그녀는 겁에 질려 주인을 제 때 구원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을 여전히 떨쳐 내지 못한 듯했다.
“과거의 망령 따위에게 먹혀 제가 주인님을 잊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김진우는 조금은 안심한 얼굴을 해보였다. 흡혈귀에게는 더없이 큰 유혹이었을 피의 근원조차 주인에게 양보했던 그녀라면 쉽사리 과거의 파편에게 집어삼켜지는 일은 없으리라.
“만약 기회가 된다면, 저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인님을 위한 제 마음을 증명해 보이겠어요.”
그는 필요 이상으로 의욕을 불태우는 안젤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살아남아라. 살아남아서 내 곁을 지키는 것이 그대의 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니 그 목숨은 아껴두도록 하라.”
사랑스러운 흡혈귀의 모습에 그는 결국 상황도 잊고 피식 웃고 말았다.
***
소환수들과 머리를 맞대고 궁리한 끝에 몇 가지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정해졌다.
지상과 지저의 경계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지상에 심어두었던 미궁을 다시 회수하기로 하였고, 영원의 창고를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대미궁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일단은 지상의 미궁을 회수하도록 하지. 마침 겨우살이 나무들에게도 물어볼 것이 있으니, 당장 다녀오도록 하겠다.”
영원의 창고에서 얻은, 수많은 보물 사이에서도 유독 자신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던 볼품없는 창이 바로 겨우살이 나무의 가지로 만든 것이었다.
어쩌면 겨우살이나무들이라면 이 창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르리라.
“그럼 다녀오지.”
다이달로스에게 영원의 창고를 이전할 장소를 마련하라 명한 그는 곧장 포탈을 열고 지상으로 향했다.
“주인님!”
다시 만난 이준영은 혼자 연습이라도 했는지 주인님이란 말을 잘도 지껄여댔다.
전이라면 그녀의 호칭에 어색해 했을 김진우였지만, 이제는 완연히 군주의 모습을 갖춘지라 뻔뻔하게 그 낯간지러운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랜만이군.”
그 스스로도 지상에 나온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지상에 올라오고 나서야 겨우 시간이 꽤나 흘렀음을 체감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왜 이제야 왔어요.”
“내가 너무 무심했군.”
다소 원망 섞인 칭얼거림에 너무나도 여상스럽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을 본 이준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끌어안을 것 같이 친근했던 태도가 금세 어색해지고 만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만난 그의 기세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격이 높아진 탓에 완전히 압도당한 모양이었다.
“음, 주인님. 분위기가…….”
한층 더 공손해지는 태도, 그녀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간 일이 좀 많았다.”
변명 같은 말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본신의 힘이 강대해질수록 지저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지상보다 지저가 편하게 느껴지는 그였다.
당연하게도 그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뭔가 기분이 묘하군.”
오랜만에 지상을 찾은 탓이라 치부하기에는 기묘하게 달라진 지상의 공기, 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한참 전부터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위축되었던 태도도 잠시, 그녀가 드물게 호들갑을 떨었다.
“지금 다시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고요!”
“뭐?”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대답에 그는 뒤통수라도 한 대 맞은 듯한 얼굴로 되물었다.
“지상이 지금 다시 지저를 상대로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