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80)
던전 견문록-280화(280/319)
# 280
던전 견문록
제 281 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한 번 전쟁을 일으킨다고 해서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상과 지저 양측 다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과거에 있었던 대전쟁만으로도 교훈은 차고도 넘쳤으니까.
지상은 그 전쟁을 통해 무수히 많은 생목숨을 바치고 나서야 겨우 지저가 인간이 점령할 수 없는 영역임을 깨달았고, 지저 역시 상층 전체와 저층 일부가 초토화되는 지상의 총공세 속에서 오직 심층의 귀족들만이 제 힘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런 상처뿐인 전쟁을 겪고도 다시 무리한 전쟁을 감행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이제 와서 뭘 더 얻겠다고.”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었지만, 억지로 승패를 구분 짓자면 지저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위시 스톤을 탈취한 지상 쪽이 득을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알량한 승리조차도 정신 나간 옛 군주들이 꾸민 음모에 불과했으니, 새삼 승자 연연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뭘 얻으려고 일으키는 전쟁이 아니에요. 지저가 지상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어요. 그것 때문에 지상은 전과 같은 참사를 겪지 않기 위해 전쟁을 결정했다고 들었어요.”
이준영은 오히려 그에게 묻고 있었다. 지저가 지상과의 전쟁을 획책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지, 그녀는 눈에 띄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지금 지저는 제 스스로 돌보기에도 벅찬 상황인데.”
두 번에 걸친 복원으로 인해 완전히 변해버린 지저는 지상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이로드들은 이제 막 옛 군주들의 음모를 눈치채고 날을 세우고 있었고, 귀족들은 변해버린 지저의 상황과 하이로드들의 발호를 두려워해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지상을 도모하기에는 그들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도 복잡했다.
“그나마 안심이 되네요.”
이준영은 사람들을 향해 칼을 들이대지 않게 되었다고 차라리 안도한 얼굴이었다.
“대체 그 정보가 누구한테 나온 거지?”
그런 그녀에게 그가 물었다.
***
“지저에서 망명해온 이가 있는 모양이야. 그치를 통해서 지저가 지상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고, 그때가 임박했음을 알게 된 거지.”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백 선생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이야기는 얼토당토않은 허황된 이야기였다.
“말이 안 되지는 않지.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최근에 몇 번이나 난리가 나지 않았었나. 생전 모습을 보이지 않던 지저의 크리쳐들이 지상으로 기어 나온 게 몇 번이고, 또 얼마 전에는 심상치 않은 진동까지 있었잖은가. 그게 다 지저가 지상과의 전쟁을 준비하느라 일어난 일이라니 제법 신빙성이 있지.”
“아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크리쳐들이 지상으로 흘러나온 것은 지저의 악의에 오염된 모아이들이 길을 잘못 잡은 것일 뿐이고, 심상치 않은 진동이라는 지저가 과거로 회귀하는 복원 과정에서 일어난 사소한 변화일 뿐이었다.
“그걸 자네가 어찌 아나.”
하지만 그 일련의 사건들을 백 선생에게 설명해 주기에는 김진우의 입장이 미묘했다. 그는 지상인이었지만 동시에 지저의 당당한 지배자였고 하이로드였다.
그런 그의 입장은 절대로 사람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흐음.”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백 선생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정부에서는 탐색자와 던전 베이비들을 전면에 내세울 생각이야. 과연 그들이 정부의 생각대로 움직일지는 미지수지만, 만약 성사만 되면 전처럼 지저에서 맥없이 쫓겨나오는 일은 없겠지. 탐색자는 몰라도 던전 베이비들이라면 지저에서 이골이 날 대로 나지 않았나.”
가급적이면 지상에 적을 지상으로 끌어내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하는 게 유리하겠지만 사람들의 눈이 있으니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백 선생의 말이었다.
“대체 그 망명했다는 작자가 누구랍니까.”
이야기를 듣던 김진우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한둘이 아니라더군. 그중에서도 우리 정부 쪽에 접촉해온 건, 이곳 지저 심층의 귀족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네.”
백 선생은 꽤나 대단한 이야기라도 되는 양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놀라지 말게, 지저의 음모를 알려온 것은 무려 11층의 백작일세.”
11층의 백작이라면 모조 대미궁을 정리하며 한 번에 정리한 바가 있었다. 다만 그중에서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이가 있었으니, 타락의 여왕이라 불리는 브륜테스 백작이었다.
그는 그 간교한 여인을 떠올리고는 이를 갈았다.
“악몽의 디나리온이라고, 심층에서는 꽤나 위명이 자자했던 자인 모양이네.”
하지만 백 선생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온 이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던 악몽의 이름이었다.
“자네도 꽤나 놀랐구먼. 나도 처음 들었을 때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지. 심층의 백작씩이나 되는 자가 뭐가 아쉬워서 지상에 붙었을까. 하지만 이유가 있었네.”
백 선생은 그의 놀란 얼굴을 보며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한 가지 이야기를 더해주었다.
“놀랍게도 그 백작의 딸이란 자가 함께 망명했는데, 그 딸이란 게 인간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반인반마(半人半魔)라더군.”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진우는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제 딸의 몸에 흐르는 피의 반절이 인간이요, 자신이 사랑한 여인은 지상인이니 지상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던 게지. 지저의 괴물에게도 부성애는 있었던 모양일세. 하기야 말 못하는 금수도 제 새끼는 끔찍하게 생각하… 아니, 자네, 이야기 듣다가 어딜 가나!”
“나머지 이야기는 다시 찾아와서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한마디를 남긴 그는 곧장 감정소를 떠나 안가를 찾았다.
“윤희! 윤희는 어디에 있지?”
이제나저제나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이준영은 심상치 않은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 아마 파티 홀에 있을 거예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곧장 파티 홀을 찾았다.
“이런 빌어먹을…….”
오랜만에 찾은 파티 홀은 그저 껍데기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림자 마법사들이 펼친 환상만이 남아 있었을 뿐, 그 핵과 미궁은 온데간데없었다.
김진우는 알맹이 없는 허상만이 남은 파티 홀을 바라보며 허탈한 얼굴을 해보였다. 이쯤 되니 차라리 화조차 나지 않았다.
“당했군.”
악몽의 디나리온을 말살하고 그 권능을 앗아간 것은 미몽의 아리아네였다. 그리고 그녀는 몽마들의 여왕이기 이전에 지저의 파수꾼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증언만이 유일한 악몽의 종말을 증명했다.
지금에 와서는 온통 진실보다 거짓이 많았던 그녀의 말을 믿었던 스스로가 바보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윤희는 왜…….”
제 아비로부터 벗어나고자 그토록이나 원했던 윤희의 모습마저도 거짓이었던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온통 모호한 것들 투성이었다.
다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면, 이번 지상의 움직임 역시 과거 하이로드들이 채 이루지 못했던 망상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이 타이밍에 귀족들이 앞다투어 지상으로 망명하여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을 이유가 없었다.
“주인님…….”
영문은 모르지만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사실만큼은 눈치챌 수 있었는지, 이준영이 쭈뼛대며 다가왔다.
“골치 아프게 됐다. 아무래도 전쟁을 피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지난 전쟁의 상처가 채 다 아물기도 전의 지상이니만큼 다가오는 전쟁의 공포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를 기다리는 것은 무리였다. 아니, 그 이전에 저들 스스로가 전쟁을 원하고 있을 가능성마저 있었다.
다운 잼이야말로 지상이 생각하는 지저의 유일한 존재 가치였고, 근래 들어 그 다운 잼마저 구하기가 힘들어졌으니 이제 슬슬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볼 마음이 들 만도 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
이준영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기야 그의 대답 여하에 따라 제 손에 동족의 피를 묻히게 될 수도 있었으니 그녀의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일단 지상의 미궁을 폐쇄하고 핵을 지저로 옮길 생각이다.”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은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미궁의 안위를 챙기는 그의 흔들림 없는 결정이 이준영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를 보며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았지만 차마 그 의미를 물을 용기가 없었는지, 이내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
“오오, 그것은!”
이제는 겨우살이 나무라는 본모습을 찾은 지저목들은 김진우가 내민 작은 나뭇가지를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우연히 얻게 된 물건인데, 도무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더군. 창이라고는 하지만 이걸로 과연 무엇을 꿰뚫을 수 있겠어.”
처음 보는 순간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잡고 말았던 볼품없는 창. 그는 겨우살이 나무들이 그 정체를 아는 것 같자 반색을 해보였다.
“세상 보물 중 우연히 제 주인을 선택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물며 그것이 가장 어린 겨우살이 나무의 가지로 만든 창이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어째서 그렇지?”
“그 어린 가지야말로 지저의 신비가 제 품에 안지 못한 유일한 물건이니까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봐.”
겨우살이 나무들은 현명하지만 명확하게 답을 내놓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현명한 만큼 지독스러울 정도로 선문답(禪問答)을 즐겼고, 상대가 대화를 통해 답을 찾아가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그들의 장단에 맞춰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으음.”
이제 막 신나게 그 바싹 메마른 입을 나불거리려던 겨우살이 나무가 그 추상같은 명에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 창만이 유일하게 지저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운 무기. 그렇기에 신비를 품은 자들이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오직 하나뿐인 무기입니다.”
“그대의 대답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지상에서 만들어진 무기들 역시 두려워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다릅니다. 지상에는 지상만의 법칙이 존재하는 법이지요. 날카로운 날붙이가 생살을 쪼개고, 단단한 쇠뭉치가 뼈를 바수는 것은 지저에서도 통용되는 법칙, 그 예기와 강함을 이겨낼 육신만 있다면 그다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더 강한 힘이 더 약한 힘을 짓누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겨우살이 나무는 느릿느릿하지만 성실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 창은 다릅니다. 지저에서 태어났으나 지저의 신비조차 품지 못한, 볕 따스한 지상은 애초에 그 존재를 모르는, 그야말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물건입니다.”
여전히 알쏭달쏭하기만 한 겨우살이 나무의 말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 말이 어려웠나? 나는 이 창을 어디에 쓰는 것인지를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라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연이은 사건으로 영 심기가 좋지 않았던 김진우가 사납게 목을 울려대니, 스멀스멀 난폭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 서슬에 놀라 점잔을 떨던 겨우살이 나무가 황급히 대답했다.
“필멸(必滅)의 권능, 그 여린 가지가 지닌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