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81)
던전 견문록-281화(281/319)
# 281
던전 견문록
제 282 화
100. 옛 군주들이 남긴 것
진리의 왕좌에 앉은 김진우는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필멸의 창이라…….”
작고 볼품없는, 차마 창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나뭇가지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이름이었다.
“지저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기에 자라지 못해 채 잎조차 피울 수 없었던 일족의 가지지만, 그렇기에 그 어떤 권능과 법칙으로도 막을 수 없는 물건입니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그 정도의 무기가 아니고서야 하이로드씩이나 되는 외눈박이 군주가 두려워하여 영원의 창고에 처박아 두지는 않았으리라.
“으음.”
우연히 얻은 무기가 생각보다 대단한 권능을 지녔다는 것은 이로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창을 만들어낸 자가 그가 그토록이나 피하려 했던 고대의 망령이었던 탓이다.
“정처 없이 지저를 떠돌던 군주께서 친히 일족을 방문하여 가장 어린 일족의 가지를 잘라내셨습니다.”
“설마…….”
“방랑의 군주께서 그 기묘한 창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십니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어린 겨우살이 나무의 가지로 만든 창은 방랑의 군주가 남긴 유산이었다.
“대체 이걸로 뭘 할 작정이었지?”
게다가 더욱 그를 고민스럽게 만든 것은 이 필멸의 무구가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방랑의 군주께서는 지저가 외면한 아이를 데리고 떠나셨지요. 지저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끔찍한 저주지만, 그분과 함께라면 그 아이는 살아남아 지금쯤 어디에서 근사하게 자라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겨우살이 나무는 잃어버린 일족의 아이를 찾아 달라 부탁했지만 그는 차마 그 부탁을 들어주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 작은 창마저 우연히 영원의 창고에서 얻은 자신이 대관절 어디에서 사라진 겨우살이 나무를 찾는다는 말인가.
게다가 설령 찾을 수 있다고 한들, 최대한 마주치지 말아야 할 방랑 군주의 흔적을 제 발로 찾아가는 건 바보짓이었다.
“끄응.”
당장에라도 진리의 왕좌에 신체 일부를 바치고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을 되찾고 싶었지만, 그는 가까스로 충동을 참아냈다.
어차피 때가 되면 굳이 찾지 않아도 진실은 모습을 드러내리라. 다만 스스로가 그 진실에 먹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탐욕의 군주, ‘잡아먹는’ 쪽이지, ‘잡아먹히는’ 쪽이 아니었으니까.
***
지상에 심어두었던 미궁은 다시 옮겨졌고, 겨우살이 나무들과 이준영 역시 지저로 돌아왔다.
낯익은 얼굴들을 보고 잠시 반가운 기색을 보이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지상을 향해 칼을 들이대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부담인 눈치였다.
“최악의 경우, 원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전력에서 제외하도록 하지.”
배려는 아니었다.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군세를 얻은 그는 고작 던전 베이비 하나의 힘에 연연할 위치가 아니었다.
그녀 역시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는지 더욱 참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단지 조금 혼란스러웠을 뿐이에요.”
이준영은 인간과 적대하게 될 경우보다 그에게 자신이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것이 더욱 신경 쓰이는 듯했다. 뒤늦게 각오를 다졌고, 그는 사양치 않고 그녀의 결심을 받아주었다.
“부디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자신이 내뱉고도 우습기만 한 말이었다. 이미 스스로 지저에 더욱 가치를 둔 자신마저도 이리 껄끄러운 마음인데 그녀야 오죽할까.
하지만 그는 굳이 그런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계획을 변경해야겠어. 주변 정리는 당분간 미루겠다.”
수뇌부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는 선언했다. 그 말 한마디에 당장에라도 시작할 것 같았던 정복 전쟁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저들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제 목숨 바쳐 나를 위해 싸우게 되리라.”
그는 공작급 이상의 미궁마다 전령을 보내 지상의 상황을 알려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꾸준히 순찰자들을 보내 각 층의 상황을 점검했다.
“진짜 전쟁이 날까요?”
“지금으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 저 위의 인간들은 탐욕스럽기가 미궁의 주인들 이상이니까. 제 터전을 지키겠다는 알량한 명분 뒤에서 어떻게든 지저의 골수까지 빨아먹을까 궁리 중일 테지.”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러했듯이 지저는 지상인들이 싸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그것은 전과는 달리 광활하게 변해 버렸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이곳을 벗어나지 않는 한, 지상은 그 잘난 화기들의 반의반도 채 쓰지 못한 채 패퇴당하고 말 테니까.
다만 그가 걱정하는 것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닌 이후의 일이었다. 이번 일을 부추긴 자가 있다면 과연 무엇을 노리는 것인지 그것이 문제였다.
“어쩌면 이것 또한 지상과 지저의 경계를 허무는 과정 중 하나일지도 몰라요.”
도미니크의 의견은 제법 그럴싸했다. 지저와 지상의 존재가 뒤섞일수록 그 경계는 희미해질 테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미 무수히 이곳을 훑고 지나간 수많은 탐색자의 행보 역시 누군가가 의도한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 누군가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면, 그건 전쟁 자체를 억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딱히 방법이 없었던지라 그는 그저 최대한의 전력을 보전하여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였다.
지상의 소식을 들고 떠났던 전령들이 속속 돌아왔다.
그들은 공작들 중 어느 누구도 침공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상층과 저층만을 들쑤시다가 패퇴당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만약을 대비해 긴밀한 협조 관계를 이룰 필요만큼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과연 지상인들보다는 흉포할지언정 지저의 이웃이 더 믿을 만하다는 건가.”
아무래도 뿌리가 같으니 이런 경우에는 단합의 의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완전히 저들을 믿을 수는 없어요. 전쟁 통에 제 잇속을 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저들 중 누가 찬탈자의 하수인인지 지금으로선 알 방법이 없으니까요.”
아리아네로부터 몇 번이나 뒤통수를 맞았고, 제법 공을 들였던 윤희마저도 돌아선 지금, 김진우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아니, 지금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건 잘난 공작 나리들이 아니야. 진짜 적은 찬탈자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하이로드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다른 하이로드들과의 만남이 시급했다.
다만 어디 있는지도 모를 그들을 찾을 길이 없으니, 지금은 그저 부디 통곡의 군주가 제대로 전령 노릇을 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가 전쟁에 대비하여 바쁜 일정을 보내는 와중에 모리건이 찾아왔다.
“아직도 백오를 만나지 않으신 겁니까?”
그녀는 에인헤리들 중에 백오가 끼어 있었노라며, 만남을 주선했다. 그 역시 찾고 있던 존재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음을 깨닫고는 기꺼운 표정으로 찾았다.
“그대가 백오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군.”
“흉물스러운 외양에 왕의 눈이 청정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감히 왕 앞에 떳떳이 나서지 못했나이다. 원하신다면 이제라도 흉한 몸이나마 내보이겠나이다.”
에인헤리가 되며 대부분의 힘을 복구했지만, 발홀의 권능조차도 망가진 육신을 완벽하게 되돌려 놓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백오는 온몸을 새하얀 붕대로 감싼 채 푸르고 붉은 한 쌍의 눈만을 내놓고 있었다.
“스스로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그럴 필요 없다, 내가 그대를 찾은 것은 외양을 보고자 함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김진우는 곧장 용건을 꺼냈다.
“모리건은 생각보다 아는 것이 많지 않더군. 그녀는 자신과 달리 지척에서 옛 주인을 섬기던 그대라면 내 의문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거라 말했지.”
“송구하옵게도 저 역시 한때 스스로를 잃고 방황하는 바람에 많은 기억이 소실되었나이다.”
실로 안타까운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런가. 아깝게 됐군.”
노골적으로 실망한 얼굴을 해보인 김진우에게 백오가 고개를 숙이며 거듭 사죄를 했다.
“됐다. 사실 이제 와서 그리 중요할 것도 없다.”
발홀을 얻기 전이라면 모를까, 백오와의 만남은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가장 궁금했던 고대의 기억은 이미 진리의 왕좌가 보여주었고, 그토록이나 찾아 헤맸던 외눈박이 군주의 유산 역시 이미 그의 소유하에 있었다.
“많은 기억을 잃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왕께 전할 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옵나이다.”
백오의 말에도 그는 그다지 기대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턱을 치켜들며 다음 말을 기다렸을 뿐이었다.
“옛 주인께서는 가장 깊고 깊은 지저에 왕께 필요한 것이 있을 거라 말했나이다.”
“자세히 이야기하라.”
깊게 왕좌에 묻었던 몸을 반쯤 일으킨 김진우의 표정이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옛 주인께서는 지저의 미래를 걱정하신 바, 귀한 제물을 바치셨으니 그때 이미 왕의 존재를 알고 계셨나이다.”
“진리의 왕좌에 제 눈을 바친 거군!”
이제까지 내내 외눈박이 군주가 눈을 바치고 엿본 진리가 무엇인지가 궁금했던 그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에 대한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그래서 지저 가장 깊은 곳에 무엇이 있다는 건가. 아니. 그가 본 진리라는 게 대체 뭐지?”
그는 드물게 조바심이 느껴지는 얼굴로 백오를 보챘다.
“그분께서 대체 무엇을 보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단지 미천한 종이 가장 필요한 때 왕 앞에 스스로 나서게 될 것이며, 그때 그 한마디면 종의 역할로 족하다 하셨나이다.”
결국은 자신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빌어먹을 옛 군주 놈들, 도대체가 한 번에 제대로 말해주는 법이 없군.”
김진우는 이제는 사라져 버린 외눈박이 군주에게 욕을 퍼부었다.
“결국은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다는 건가.”
하지만 지금같이 모든 것이 안갯속에 둘러싸인 듯 희미하기만 한 상황에서 단서를 찾았다는 건 대단한 소득이었다.
“가장 깊고 깊은 지저라면…….”
배덕의 군주, 한때는 자애의 이름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찬탈자라 불리는 그녀, 소희가 있는 곳이었다.
어지럽게 돌아가는 지저의 상황을 설명해 줄 실마리를 찾았지만 김진우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워낙에 속고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한 지저다 보니 백오의 말조차 백 퍼센트 신뢰할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너무 위험해요. 찬탈자의 함정일지도 몰라요.”
도미니크 역시 강한 우려를 표했고, 그녀는 어쩌면 백오의 존재마저도 거짓일지 모른다며 그를 만류했다.
“그녀가 진짜라는 건 내가 보증합니다.”
모리건이 제 스스로의 명예를 걸고 가짜가 아니라며 나섰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녀의 말에 큰 무게를 둘 수는 없었다.
“설령 백오가 진짜라고 해도, 그녀가 전한 외눈박이 군주의 말이 진실이라고 해도, 위험한 것은 변하지 않는답니다.”
도미니크의 말에 모리건이 분한 듯한 얼굴을 해보였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반박할 수는 없었는지 달리 토를 달지는 않았다.
“외눈박이 군주는 지저와 지상을 하나로 합친다는 망상에 동조했던 자, 그가 바라던 건 주인님이 바라는 것과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요.”
도미니크는 원망의 눈초리로 모리건을 노려보고는 다시금 그를 만류했다. 그녀는 혹시라도 그가 찬탈자가 꾸민 함정에 제 몸을 던질까 봐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왕이시여!”
그의 행보를 두고 소환수들이 갑론을박하고 있던 그때, 인근의 경계를 책임지고 있던 퀀투스가 달려왔다.
“통곡의 군주가 찾아왔습니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군.”
김진우는 한참이나 이어진 토론에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만나겠다. 안내해라.”
“그런데, 그것이.”
퀀투스가 그런 그를 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통곡의 군주와 함께 온 자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