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82)
던전 견문록-282화(282/319)
# 282
던전 견문록
제 283 화
김진우는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주저앉혔다.
“다른 자들이라…….”
굳이 듣지 않아도 그 정체를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필시 먼저 각성한 첫 번째와 두 번째 하이로드이리라.
“어떤 자들이지?”
그는 황급히 손님을 맞는 대신 퀀투스를 통해 약간이나마 정보를 얻는 쪽을 택했다.
“함께 온 자는 모두 해서 사내 둘인데, 그중 하나는 기골이 장대하고 기세가 무거운 것이 천생 전사로 보였고, 다른 하나는 건장하다기보다는 날렵한 느낌의 사내로 기세가 날짐승 같은 것이 범상치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소환수에 불과한 퀀투스의 정보는 한정적이었고, 설명이라고 해봐야 손님들의 외양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그들이 무엇을 계승했는지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덩치가 좋은 자는 거인 군주의 이름을 계승했을 테고, 다른 자는 수인 아니면 지룡이군.”
아직까지 그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옛 군주의 계승자는 거인과 수인, 그리고 지룡의 이름을 이은 자들뿐이었다.
“그들의 기색은 어떠하던가. 이쪽을 적대할 기미가 보이던가.”
“불온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기골이 장대한 사내 쪽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시종일관 불편한 표정이었습니다.”
퀀투스의 대답에 김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자가 거인 군주의 이름을 계승한 자겠군.”
발홀의 첨탑에 설치된 묠니르의 별명은 거인 살해자다. 만약 사내가 거인 군주의 힘을 계승했다면 지척에서 느껴지는 철퇴의 기운에 심기가 좋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남은 자가 문제군. 그 사내가 수인 군주의 이름을 계승했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지룡의 힘을 계승했다면 조금은 성가셔질지도 모르겠어.”
과거의 언더 엘프들과 마찬가지로 노예로 전락한 수인들의 왕이라면 기반이라고 해봐야 보잘것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룡의 이름을 계승했다면 최악의 경우 용제와 그를 따르는 용기병들이 그 휘하로 편입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로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으니 김진우는 사내가 수인 군주의 힘을 계승했기를 바랐다.
“결국은 만나봐야 답이 나오겠군.”
그는 소환수들을 해산시키고는 곧장 퀀투스에게 지시했다.
“손님들의 자리를 옮겨주어라. 나도 곧 가도록 하겠다.”
***
사내는 높이 솟아오른 첨탑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예의가 없는 자로군. 기껏 안내자가 나왔다 싶더니, 고작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인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갈색 머리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체구, 만약 위험스럽게 번뜩이는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한 번 보고 잊을 법한 평범한 인상의 사내였다. 하지만 그 눈에 아른거리는 광기와 폭급함이 그를 더없이 사납게 보이게 만들었다.
“갑자기 기별도 없이 찾아온 자들을 제 집에 들이는 것은 예의 이전에 멍청한 게 아닐까.”
캐서린은 타이르는 것인지 도리어 화를 돋우는 것인지 애매한 태도로 사내에게 면박을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닌가.”
그녀의 말을 받은 것은 날렵한 체구의 사내가 아닌 기골이 장대한 남자였다.
“이건 대놓고 우리를 찍어 누르겠다는 걸로 보이는군.”
남자는 첨탑을 죽일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상성 한번 최악이네.”
캐서린은 벌써부터 피로가 가득해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의 남자와 저 높이 솟아오른 첨탑의 관계를 모르는 것도 아니라 일방적으로 까탈스러움을 비난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어쨌건 그가 우리 중에 가장 늦게 각성한 것도 있으니, 이 정도의 경계심 정도는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자고.”
나름대로 험악한 분위기를 무마시킨다고 한 말이었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김진우가 나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왔군.”
그런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은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애매한 시간이 흐르고 난 뒤였다.
“흐음.”
김진우는 느긋한 표정으로 이쪽의 면면을 살펴보며 다가왔다.
저벅, 저벅.
오직 발소리만이 유일하게 세상에 존재하는 듯한 광경, 소리 없이 도발이 오고 가고, 다시 냉담한 침묵이 그 자리를 채워 넣었다.
김진우와 사내들은 서로가 지척에 이르기까지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은 채, 탐색의 시선을 주고받았다.
“왔어?”
그 팽팽한 긴장감을 먼저 깨고 나선 것은 캐서린이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그 여상스러운 인사에 김진우가 피식 웃었다. 여전히 시선은 자신을 도발적으로 바라보는 두 사내에게서 떼지 않은 채였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니까.”
은근히 친분을 과시하는 듯한 두 하이로드의 대화에 사내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무래도 왕래가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격이 없어 보이자 조금은 놀란 듯했다.
“소개 정도는 자기들 입으로 하지? 내가 전령 노릇을 했다고 해서 니들 아래로 숙이고 들어간 건 아니잖아?”
그런 사내들에게 캐서린이 퉁명스레 한마디를 쏘았다.
“일단은 반갑다고 해두지. 가장 사나운 맹수들의 지배자, 야수왕(野獸王)의 이름을 계승했다.”
날렵한 사내, 야수왕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수인 쪽이었군. 반갑다. 난 외눈박이 군주의 힘을 이어받았다. 어차피 서로 진짜 이름을 주고받을 필요는 없을 테니, 편할 대로 부르도록.”
김진우는 상대가 물려받은 힘이 지룡이 아닌 수인 군주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한결 더 여유로워진 듯한 얼굴이었다.
“뭔지 모르지만 기분 나쁜데, 그 얼굴? 뭔가 꿍꿍이가 있는 표정이야.”
“그럴 리가. 수인이라면 몇 알고 있는지라 반가울 뿐이다.”
괜스레 기분이 상한 표정을 지어 보인 야수왕의 말을 여상스럽게 받아넘긴 그가 이번에는 덩치 큰 사내에게 시선을 옮겼다.
“흥, 나는 천장거인(天障巨人)들의 군주다.”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자신을 소개한 천장거인 군주를 보며 피식 웃은 그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전부 우리말을 하는군. 통역이 필요할 줄 알았는데.”
그 말에 미묘했던 분위기가 일제히 가라앉았다.
“말이라면 그녀에게 배웠으니까…….”
“나 역시.”
복잡한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꾸에 김진우도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과연 너희들 역시 누… 그녀와 함께 했던 것인가.”
이미 캐서린에게 확인을 받은 바가 있지만 이렇게 직접 확인하니 한층 더 기분이 복잡해졌다.
“그게 왜 나쁘다는 거지?”
“나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다. 어차피 우리를 짐승 새끼 보듯 하는 지상 따위 차라리 이쪽에 편입되는 게 나아. 지 놈들도 한번 겪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테니까.”
배덕의 군주에게 놀아났다는 동질감도 잠시였을 뿐, 지저와 지상의 통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야수왕과 천장거인 군주는 돌변했다.
“어차피 지상인의 사정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다. 애초에 그놈들도 우리를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내 동료들은 허울 좋은 헌터라는 이름에 속아서 겨우 찾은 자유의 대부분을 어두운 땅굴에서 보내왔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들을 보호하에 두고 우리를 소모품 취급했던 지상인들을 아래 두는 게 나아.”
과격하기까지 한 천장거인 군주의 말에 김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다. 당연히 그들의 분노가 자신을 장기말 취급한 옛 군주들에게 향해 있을 거라 여겼는데, 예상 밖에도 그들의 증오는 오직 지상을 향해 있었다.
“나는 토굴 속에서 짐승처럼 자랐어.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사람 새끼 흉내도 내지 못했을 테지.”
야수왕의 말에 천장거인 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내는 자신들을 괴롭혔던 공작들에게 복수도 한 마당에 더 이상 지저를 적대할 이유가 없노라 말했다.
“끄응.”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김진우는 그들과 자신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어두운 토굴 속에서 처음으로 인간을 알았다. 어른들은 사나운 감독관의 눈으로부터 어린 자신을 숨기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최후에는 제 목숨까지 내놓았다.
이제 와서 새삼 연도 없는 지상인들에게 연민을 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가 인간을 마냥 추악하다고 생각하지 않기에는 충분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들은 달랐다. 그들이 기억하는 인간은 잠이 들면 생살을 파먹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드는 끔찍한 아귀였으며, 자신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기를 주저치 않는 짐승이었다.
그리고 지상에 올라갔을 때는 어떠했는가. 사람들은 연민의 가면을 쓰고 어떻게든 다운 잼을 착취하기 위해 침을 흘려댔다.
간혹 따뜻한 말로 접근하는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조차도 심층의 던전 베이비가 지닌 능력과 재력에 혹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차이였고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었다.
저들은 자신을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 하이로드, 지저의 강대한 지배자이기를 바랐다.
결여인지 상실인지 모를 그들의 울분에 김진우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같잖은 동정과 연민은 아니었다. 인간의 온기를 기억한다고 해서 그 자체가 따뜻한 인간인 것은 아니었으니까. 자신 역시 그들만큼이나 냉철하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었다.
다만 계획에 차질이 생겼기에 마음이 무거워졌을 뿐이었다.
“물론 내 몸을 귀신도 못 되는 옛 군주의 파편에게 빼앗기는 것은 사양이야. 그게 바로 내가 너를 찾아온 이유니까.”
그들은 옛 군주들의 얼토당토않은 야망에는 불만이 없었고, 오직 제 몸을 빼앗아 갈 파편을 제거하는 것만이 유일한 관심사처럼 보였다.
“너도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제 몸 건사할 생각이나 하지. 사실 너나 우리나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좀 힘들었던 게 아니잖아?”
야수왕의 말은 권유라기보다는 유혹이었고,
“파편을 제거하면 더 이상 우릴 위협할 존재들도 없어, 공작들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너도 우리와 함께해 줬으면 하는데. 하이로드 넷이라면 지저를 지배하는 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야.”
천장거인 군주의 말은 회유가 아닌 강요였다. 만약 거절한다면 전쟁이라도 불사할 듯한 말투였다.
“그대 역시 같은 생각인가.”
김진우는 캐서린을 보며 물었다.
“파편을 제거해야 한다는 건 동감하지만, 다른 건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어.”
그나마 중립을 표방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지금 상황에서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쨌건 간에 파편을 전부 없애야 한다는 건 동감하는 모양이군.”
천장거인 군주가 히죽 웃었다.
“방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이로드씩이나 된 놈이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겠지.”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에 자기들 멋대로 결정을 내린 천장거인 군주와 야수왕이 파편을 찾을 궁리를 했다.
“착각한 것 같군.”
그런 그들에게 김진우가 말했다.
“나는 무임 봉사를 할 생각은 없어. 파편을 제거해 주는 대신 대가를 받을 생각이다.”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잖아? 지저라면 더더욱 그런 법이지.”
그런 것 따위야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며 두 군주가 그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김진우는 그들의 질문에 곧장 대답했다.
“지상과 지저의 통합을 막는 것, 너희들이 나를 돕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