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83)
던전 견문록-283화(283/319)
# 283
던전 견문록
제 284 화
벌써부터 지저가 제 손에 떨어진 양 떠들어 대느라 후끈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분명 그 건에 대해서는 반대한다고 말했을 텐데.”
“말이 통하지 않네. 이러면 조금 피차 곤란하지 않겠어? 그리고 내가 보기엔 그쪽이 아주아주 더 곤란해질 거 같은데 말이지.”
명백한 협박이었고, 위협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진우에게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고오오오오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고요하던 발홀의 첨탑에 빛무리가 모여들었다. 뇌전의 기운을 담은 그 섬광을 본 천장거인 군주가 대번에 험악한 얼굴을 해보였다.
“묠니르가 꽤나 쓸 만한 무기인 건 맞지만, 우리라고 물려받은 게 없는 건 아니야. 생각 잘 해보라고.”
껄끄러운 것은 인정하나 나름대로 묠니르를 막을 방도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 자신감 가득한 태도에도 김진우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
그는 천장거인 군주의 말을 무시하고는 캐서린을 쳐다보았다.
“그대에게 도움받은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대가 없이 파편을 제거해 줄 생각은 없어. 원래대로라면 조금은 시간을 두고 기다려 주려 했지만, 저 친구들 때문에 힘들겠다.”
그 말에 캐서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두 명의 하이로드, 그것도 자신보다 먼저 각성하여 많은 것을 이루었을 군주들의 위협을 앞에 두고도 태연한 그가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선택할 때 참고할 만한 건?”
그녀는 영악하게도 자신이 그의 편이 되어야 할 이유를 물었다.
“안타깝게도 설득할 생각까지는 없어. 다만 그간의 의리를 생각해 말해준다면, 만약 이 자리에서 선택하지 않을 경우.”
서서히 고조되어 가는 김진우의 기세, 처음에는 코웃음을 치던 두 군주도, 일전의 갓 각성한 어리숙한 군주로만 그를 기억하던 캐서린도 이내 돌처럼 딱딱하게 얼굴이 굳어버렸다.
다들 가장 늦게 각성한 그가 보이는 상상 이상의 힘에 경악한 듯했다.
“넌 죽는다.”
그저 위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살의, 탐욕의 권능이 이제껏 수도 없이 집어삼키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혼돈의 기운이 온 세상을 찍어 눌렀다.
아마 그들은 모를 것이다, 자신들이 외눈박이 군주의 계승자라 생각했던 김진우는 사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광휘와 요정의 권능을 흡수한 돌연변이이며, 방랑의 파편이자 탐욕의 군주라는 사실을.
무려 다섯 군주의 힘을 흡수한 그는 그들의 생각보다 강하고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의 차이가 수적 열세를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뒤늦게 자신들의 추태를 깨달은 야수왕과 천장거인 군주가 이를 갈았다.
“멍청하군, 같은 편으로 만들어야 할 통곡에게마저도 위협을 가하다니. 그녀는 생각보다 자존심이 강하다고.”
세상을 찢어발길 듯 난폭한 기운이 야수왕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태산처럼 세상을 짓뭉갤 듯 무거운 기운이 천장거인 군주의 몸에서 흘렀다.
역시나 만만찮은 힘. 혼돈을 담은 탁한 기운이 두 군주의 기운에 서서히 밀려나는 가운데, 김진우가 말했다.
“분명 그녀는 자존심이 강해. 하지만 그 이상으로 상황 판단이 빠르기도 하지.”
그 말 한마디에 캐서린이 결정을 내린 듯,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끄응, 그렇게까지 말하면 내가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잖아.”
통곡의 말에 두 군주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을 해보였다.
“네가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온다는 건 뭔가 생각이 있을 거라 믿을게.”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녀가 선 것은 김진우의 곁이었다.
“설마 저 성을 믿고 개싸움을 벌일 생각은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나도 다시 결정을 바꿀 수밖에 없어.”
말은 그러했지만 이미 그녀는 확고하게 정했는지 망설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왜 쉬운 길을 내버려 두고, 어려운 길을 가려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그저 가볍게 생각했던 모임에서 이렇듯 편을 갈라 으르렁대게 될 줄은 몰랐다며 야수왕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기야 무리도 아니리라. 지저야말로 힘이 전부인 약육강식의 세계, 먼저 각성한 자로서 가장 늦게 각성한 하이로드에게 우열을 각인시켜 주겠다는 발상을 한 게 그다지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봐. 굳이 우리끼리 이렇게 싸울 필요는 없잖아. 만약 이대로 우리가 전투를 벌인다면 결과는 끔찍할 거야.”
기호지세, 이제는 정말로 피를 봐야 마무리가 될 것 같은 상황이었다.
“2대 2다. 지는 쪽은 말할 것도 없고, 이기는 쪽도 무사할 수는 없을 거야.”
지금이라도 상황을 호전시키려 하는 것인지 천장거인 군주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주춤거렸다. 그런 그의 설득에 대한 대답이 들려온 것은 전혀 엉뚱한 곳이었다.
“2대 2 아니고, 2대 3인데?”
갑작스레 들려온 속삭임에 야수왕이 고개를 돌리려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목을 쥐어뜯을 듯 날카롭고 검은 손톱이 목젖에 닿아 있었던 탓이다.
“누구냐!”
상황 파악이 미처 되지 않은 야수왕을 대신해 천장거인 군주가 나서서 갑작스레 난입한 괴한의 정체를 물었다.
“나?”
어둠을 몸에 감은 듯 희끗거리는 그림자가 서서히 뭉치더니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너희들이 모르는 다섯 번째 하이로드이자 진혈의 군주.”
드디어 제 모습을 드러낸 여인, 안젤라가 눈가를 휘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저기 계시는 분에게 몸도 마음도 다 바친 충실한 노예이기도 하지.”
이제껏 존재를 몰랐던 다섯 번째 하이로드의 난입에 군주들은 전부 당황한 듯했다.
“어, 어떻게? 분명 네 번째가 마지막 각성이었는데!”
제 상황도 잊고 버럭 소리를 지른 야수왕이 어둠을 뽑아 만든 손톱에 길게 목이 베였다.
“그럴 수밖에, 난 조금 특별한 곳에서 각성을 했거든.”
안젤라가 하이로드의 힘을 계승한 것은 지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지저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면의 세계였다. 주인과 운명을 함께하는 소환수마저 그 교감이 끊길 정도로 멀고도 먼 곳이었으니 다른 하이로드들이 그녀의 존재를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설마 이런 수를 숨기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가장 먼저 놀란 감정을 추스른 것은 캐서린이었다.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원군의 등장에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하지만 너무 무모하지 않아? 만약 내가 저들 편에 섰다면 진혈의 군주가 끼어든다 해도 2대 3이었을 텐데.”
“그 정도면 해볼 만하지.”
거인 살해자라 불리는 묠니르가 있고, 단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 위력만 치면 그 이상 가는 궁니르가 장전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최악의 경우, 만약 일이 틀어진다 하더라도 속절없이 패배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난 그대가 이쪽을 선택할 거라 믿었다.”
“어째서?”
김진우의 말에 캐서린이 흥미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대라면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 말에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보기 좋게 휘어 있던 눈가에 음울한 빛이 일렁거렸다.
“그대가 물려받은 이름은 통곡, 그대의 노래는 비탄과 증오를 섬기는 꺼림칙한 것이겠지.”
홀리드스ㅤㅋㅑㄹ프를 통해 본 고대의 군주들 중에 진명을 잃은 이들이 있었다. 자애의 군주였던 찬탈자가 그러했고, 통곡의 군주가 그러했다.
그가 지닌 진짜 이름은 사자(死者)들에게 안식을 주는 ‘저승(使者)의 인도자’였다.
하지만 스스로의 죽음 앞에서 인도자를 찾지 못한 그는 끝내 증오와 비탄으로 죽음을 노래하는 통곡의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이제 캐서린에게 전해졌으니, 밝고 쾌활한 듯 보이는 그녀의 속에 얼마나 깊고 깊은 증오가 도사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후우.”
긴 한숨과 함께 캐서린의 표정이 다시 평소대로 돌아왔다.
“근거가 빈약하지만, 부정은 하지 않겠어.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니까.”
빈약한 근거의 절반은 미미르가 불러준 옛 군주들의 전승이요, 홀리드스ㅤㅋㅑㄹ프가 보여준 과거의 참사였다.
하지만 구태여 그런 말을 해줄 생각은 없었던지라 김진우는 그저 말없이 웃어 보였을 뿐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저들을 어쩔 셈이지?”
금세 평소의 쾌활한 얼굴을 해보인 캐서린이 못 박은 듯 움직이지 못하는 두 군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시선에 위험스러운 빛이 일렁이자, 그녀가 깜짝 놀라 말했다.
“가급적이면 살려두는 게 좋을 거야. 만약 저들마저 사라지면 우리끼리 밤을 맞아 싸워야 할지도 몰라.”
캐서린은 도대체 다른 하이로드들이 언제 각성할지 모르겠다며 밤과의 일전을 우려했다.
하지만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녀가 기다리는 다른 하이로드들의 권능은 지룡의 힘을 제외하고는 이미 전부 김진우가 흡수하였고, 그들은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 길이 없었으니 그녀는 지금 모인 이들만이라도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미 없어. 이미 이를 드러낸 상대를 그대로 두는 건, 멍청한 짓이야. 하물며 우리가 있는 이곳은 값싼 동정 넘쳐나는 지상이 아니라 지저다.”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듯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끄응.”
그녀 역시 지저의 율법이라면 질리도록 겪고 실천해 왔던지라 더는 그를 말리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그대의 말에 협조하여 지상과 지저의 통합을 막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한다면 믿을 텐가.”
어둠의 손톱에 수도 없이 생채기가 난 야수왕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전향의 의사를 밝혔다.
“지금 이 자리만 벗어난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 빤히 보이는군.”
상대를 가벼이 보고 경솔히 행동한 것은 있었지만 야수왕 역시 하이로드에 오르기까지 산전수전 겪어온 백전의 전사였다.
“아니, 이미 힘의 우위가 드러났는데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는 않아.”
그는 같지도 않은 변명을 주워섬기는 대신 솔직하게 힘의 열세를 인정하고 자신을 수하로 받아줄 것을 제안했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지?”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천장거인 군주가 기겁해서 소리쳤다.
“어차피 이미 진혈이 그의 노예를 자처하고 있는 마당에, 야수 하나가 숟가락을 얻는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잖아.”
“네놈은 자존심도 없…….”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언제부터 자존심 챙겼다고. 지금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노예로라도 살아남는 게 이득이라는 건 네놈도 알고 나도 알지. 그리고 어차피 우린 토굴꾼, 노예로 살아왔었잖아? 새삼 자존심 운운하는 것도 웃기군.”
야수왕은 아예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안젤라의 손톱에 베인 상처가 아파죽겠다며 너스레를 떨기까지 했다.
“그래도 기왕이면 노예보다는 부하가 좋겠다. 그쪽도 시커먼 남자 노예를 부리는 건, 원하지 않을 테니까.”
이미 상대가 자신을 받아줄 거라 생각하는지 뻔뻔하게 지껄여대는 태도가 어이없어 김진우가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놈이군.”
그의 얼굴에서 자신을 받아줄 여지가 보이자 야수왕은 아예 무릎을 꿇어 보였다.
“주인님, 어떻게 할까요?”
어지간한 안젤라조차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며 곤란한 얼굴을 해보였다.
“일단 그자의 처우는 보류하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김진우가 고개를 돌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천장거인 군주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하이로드가 되기 전에는 노예처럼 살았던 이들이다. 천장거인 군주 역시 뒤늦게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는 무릎을 꿇을 듯 몸을 굽혔다. 하지만 그보다 그가 더 빨랐다.
“넌 야수왕과는 다르게 심지가 아주 곧군.”
그 말에 막 무릎 꿇으려던 채로 굳어버린 천장거인 군주가 황당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러니 나도 그 기개를 높이 사도록 하지.”
“자,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