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84)
던전 견문록-284화(284/319)
# 284
던전 견문록
제 285 화
후회는 아무리 빨라봐야 늦는 법이다. 천장거인 군주는 투항의 의사를 채 꺼내기도 전에 뱀의 그것처럼 번들거리는 눈빛을 마주해야 했다.
“네놈!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좋게 대화로 풀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반발 따위는 애초부터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호락호락 당하고 있지는 않겠다!”
사나운 포효와 동시에 근육질 육신이 불끈거리며 팽창했다.
투둑.
가뜩이나 팽팽하게 달라붙어 있던 의복이 갈기갈기 찢겨지고 거한의 몸이 순식간에 자라났다.
그 심상치 않은 변화를 지켜보는 김진우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공격.”
그는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높게 치솟은 발홀의 첨탑을 바라보았다.
[과거 외눈박이 군주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대한 힘으로 지저를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외눈박이 군주에게 아무런 위협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천장거인 군주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위협이자 적수였습니다. 그가 이끄는 거인족의 전사들 역시 타고난 거력과 용맹으로 오랜 시간 동안 에인헤리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황혼이 찾아오기 전까지 외눈박이 군주와 천장거인 군주의 전투는 멈추지 않았고, 방랑의 군주가 중재를 하고 나서야 겨우 그 끝도 없는 상잔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가장 많은 거인을 학살해온 것은 용맹무비한 외눈의 군주도, 죽음조차 초월한 에인헤리들도 아니었습니다.] [‘거인 살해자’. 묠니르야말로 두려움을 모르는 거인들의 천적이었습니다.] [그런 묠니르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지저에서 다시금 그 위용을 드러냈습니다.]메시지를 미처 확인할 틈도 없이 첨탑에서 섬광이 솟구쳤다. 그리고 벼락이 쏟아져 내렸다.
쾅! 쾅!
단단하던 대지가 날카롭게 끝을 세운 벼락에 휩쓸려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고 온 세상이 번쩍거렸다.
[과연 묠니르는 거인 살해자라는 위명에 걸맞은 강력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작 그 묠니르를 운용해야 할 에인헤리들의 경험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에인헤리들은 묠니르의 제 위력을 끌어낼 수 없었습니다.] [에인헤리들의 미숙함 탓에 묠니르의 명중률이 형편없습니다.] [절반 이상의 공격이 빗나가고 말았습니다.]원래대로라면 천장거인 군주를 향해서만 떨어져 내렸어야 할 벼락이 사방으로 내리꽂혔다.
“물러서! 휘말려 든다!”
캐서린의 경고에 야수왕이 황급히 몸을 날렸고, 안젤라가 어둠 속으로 제 몸을 숨겼다.
“쓸데없이 요란해.”
강렬한 뇌전이 휩쓸고 간 자리, 오연히 선 김진우가 담담히 묠니르에 대한 감상을 내뱉었다.
“크아아악!”
그런 그 앞에 수차례 뇌전에 직격당해 처참한 몰골이 되어버린 천장거인 군주가 있었다.
강렬한 충격에 권능을 전부 끌어내지 못한 거인은 과거의 악명에 한참 못 미쳐 보이는 엉망진창의 모습이었다.
“너, 이 새끼!”
하지만 그 흉성만큼은 그대로인지라 아직까지 채 사그라들지 않은 불꽃을 몸에 매달고도 사납게 소리쳤다.
“맷집이 좋군.”
노골적인 조롱, 다시 한 번 천장거인 군주가 온몸의 근육을 터질 듯 팽창시켰다.
“흐음.”
김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살펴보았다.
당장 달려드는 대신 제 덩치를 키울 생각만 하는 것을 보면, 거인의 권능이라는 게 인간의 육신으로 발휘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화를 내면서도 바로 달려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비겁하게 묠니르 뒤에 숨지 말고 정정당당히 나와 붙자!”
깊은 동굴 속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웅웅 울어대는 음성이 결투라도 신청하듯 비장했다.
“네놈이 외눈박이의 이름을 제대로 이은 것이라면, 나와의 승부를 피하지는 않을 터!”
몸이 자란 만큼 자신감도 커지는 것일까. 천장거인 군주의 기세가 한층 더 광폭해졌다.
“내가 진다면 기꺼이 네놈의 노예가 되어주마!”
그래도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닌지, 안젤라와 다른 군주들을 경계하여 은근히 그를 도발하는 모습이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교활하기만 했다.
“나도 가급적이면 네 말대로 해주고 싶지만…….”
어떻게든 자신을 꺾어 상황의 반전을 꾀하려는 상대의 속셈이 빤히 보여 김진우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거인 살해자’의 명성을 확인할 기회가 쉽게 오는 건 아니라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몇 차례 포격으로 기력이 방전된 묠니르의 재충전이 끝났다는 메시지가 떠올랐고, 그는 지체 없이 공격을 명했다.
“이, 이! 비겁…….”
천장거인 군주의 마지막 말은 이내 다시 한 번 터져 나온 뇌성에 그대로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최악이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상성이 좋지 않아.”
“거인 살해자의 존재는 알았지만, 위력이 저 정도일 줄은 몰랐어.”
야수왕의 말에 캐서린 역시 질린 얼굴로 대꾸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쏟아지는 벼락에 천장거인 군주는 미처 제 본신의 힘을 끌어내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묠니르에게 희롱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무기력하지 않은가.”
야수왕은 본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대신 차라리 한탄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자신이 투항했다고는 하나, 같은 하이로드 간에도 이 정도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었던 탓이다.
“제일 먼저 각성했다고 한껏 위세를 부리더니, 한심할 지경이야.”
캐서린 역시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천장거인 군주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천장거인 군주는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상황이었다. 비록 피부는 연이은 벼락 세례에 빨갛게 달아오르고 또 검게 타버렸지만, 뇌전의 기운은 거죽을 뚫지 못했다.
또한 그렇게 열기에 타버린 피부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인한 거인의 생명력에 완전히 회복되었다.
“크아아아악!”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벼락이 떨어질 때면 비명을 질러댔다.
제길, 무슨 놈의 눈빛이.
언젠부터였는지 그는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통곡의 군주에 이어 야수왕이 저쪽에 붙고, 존재조차 몰랐던 진혈의 군주가 상대의 노예를 자처하니, 도무지 싸울 맛이 나지 않았던 탓이다.
아니, 핑계다.
솔직하게 그는 외눈박이 군주의 힘을 이었다는 사내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지만, 상대는 자신들과 완전히 격이 다른 존재였다.
자신 역시 그 사실을 이렇게 마주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번들거리는 시선은 마치 먹이를 바라보는 포식자의 눈빛과 같고, 넘실거리며 일어난 탁기(濁氣)는 불길하기 그지없다.
하이로드 특유의 격 높은 존재감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자신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똑같이 옛 군주의 권능을 계승했다고 해서 다 같은 하이로드는 아니었던 것일까. 그 압도적인 격차에 천장거인 군주는 이를 갈아댔다.
괴물 새끼.
왜 그런 격차가 생긴 것인지, 그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냐였다.
그래서 그는 두려운 상대와 맞싸우는 대신, 거인의 천적에 두들겨 맞는 것을 선택했다, 최소한 묠니르에 시달리는 동안은 저 끔찍한 괴물과 맞서지 않아도 됐으니까.
다른 군주들이 보는 그의 비참한 모습은 스스로가 자초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벼락 속에서 상황을 모면할 궁리를 했다. 머리를 울려대는 충격에 생각을 이어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일이 잘 안 풀리려는지, 상대는 그 시간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뻔뻔스럽게도 자신에게 묠니르의 위력 테스트를 하는 것도 모자라 에인헤리들의 훈련마저 겸했던 상대가 포격을 중지한 것이다.
시끄럽게 울어대던 첨탑들이 침묵하고, 벼락 세례가 끝이 났다.
“으으.”
온 주변이 뇌기의 여운으로 뜨겁게 달궈져 있건만, 그는 차라리 한기를 느끼고 말았다. 이제껏 방향 없이 사방으로 뻗쳐 나가던 끈적한 기운이 곧장 자신을 향해 달려들어 온몸을 찍어 눌렀던 탓이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의문과 두려움을 꾹 억누른 채, 미루어 두었던 거인화를 마친 그는 꼿꼿하게 고개를 세운 채 자신을 노려보는 흑룡을 보았다.
저건 용도 아니야.
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끔찍하고 추악한 모습에 그는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꼈고, 다 꺼져 가던 투쟁심에 억지로 불을 붙였다.
“재수 한번 더럽게 없군.”
이러나저러나 살아날 방법은 결국 제 힘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것뿐이라, 천장거인의 군주가 뒤늦게 본신의 힘을 끌어올렸다.
흑룡이 아가리를 쭉 찢어 보이며, 히죽 웃었다.
“크아아아아!”
천장거인 군주는 악룡의 끔찍한 미소를 마주한 순간 사납게 포효했다.
교활하게 눈을 굴려대며 상황을 모면할 궁리를 하던 겁쟁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가장 먼저 각성하여 꾸준히 힘을 키워온 용맹무비한 거인족의 왕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 괴물 새끼!”
수도 없이 많은 귀족을 단번에 뭉개버린 거대한 두 주먹이 다시 한 번 불끈 쥐어지고 각기 불꽃과 얼음이 맺혔다. 그리고 이내 거대한 철퇴가 되어 용을 향해 내리쳐졌다.
악룡은 그런 그의 공격을 주먹째로 집어삼킬 듯 쭉 찢은 아가리를 마주 내밀어 불꽃을 향해 달려들었고, 검은 날개를 펼쳐 냉기 서린 손목을 밀쳐 냈다.
크아아악!
악룡의 검은 피가 흩뿌려지고 날개가 잘게 얼어 잘려 나가고 거인의 손목은 통째로 용의 주둥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잠깐의 충돌만으로 날개가 찢기고 손목 하나가 날아가는 끔찍한 혈투, 하지만 전투는 이제 시작이었을 뿐이다.
검은 연기가 뭉쳐 다시 두 쌍의 날개가 되었고, 잘려 나간 거인의 손목은 이내 다시 돋아나 전보다 더한 불꽃을 거머쥐었다. 그렇게 두 괴물은 서로의 몸을 잘라내고 짓뭉개고 집어삼키며 몇 번이나 부딪쳤다 떨어져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캐서린과 야수왕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부를 찌릿찌릿 찔러오는 악룡의 혼탁한 기운과 거인의 광포한 기운에 질려 버린 것이다.
그중에서도 그들을 더욱 아찔하게 만든 것은 악룡이 흘려대는 탁하고 불길한 기운.
“저건 본래 나가의 왕이 지닌 힘인가.”
간신히 한마디를 쥐어짜듯 내뱉은 야수왕의 음성은 착, 하고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야, 달라. 저건 나가 따위가 아니야.”
캐서린은 반쯤 넋을 잃은 채 고개를 저었다. 지저에서 온갖 추악한 것을 제 눈으로 보았다 자부하던 그녀에게도 악룡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마치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무언가가 용이라는 껍데기를 빌려 이 자리에 현신한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어둠을 발라 만든 검은 몸뚱아리는 온갖 부정한 것의 온상(溫床)이요, 그 무엇으로도 비출 수 없는 완벽한 어둠이다.
허기진 듯 덜그럭거리는 아가리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아귀의 울부짖음이니,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밀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저 괴물의 모습과 꼭 닮은 존재를 알고 있었다.
“저건 마치…….”
밤 같잖아.
차마 내뱉지 못한 끔찍한 괴수의 이름을 떠올린 그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