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85)
던전 견문록-285화(285/319)
# 285
던전 견문록
제 286 화
전투는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기 위한 살벌한 박투 끝에 거인이 악룡의 목을 붙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으드득.
거인의 거력에 악룡의 비늘이 깨어지고 쪼개져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꺄아아아아아!
악룡이 비명을 질렀다.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은 목을 필사적으로 흔들어대며 악룡은 거인을 떨쳐내기 위해 사방으로 날뛰어댔다. 그 무지막지한 저항에 휘말린 지저의 암석이 박살이 나고, 발홀의 성벽이 무너질 것처럼 몸을 떨었다.
하지만 간신히 잡은 승기를 놓칠 생각은 없는지, 거인은 악룡의 난동에 제 등뼈가 조각나는 고통 속에서도 버텨냈다.
“으아아아아!”
악에 받친 고함 소리. 거인은 엉망진창의 꼴을 하고서도 악룡의 목을 휘감은 팔뚝을 풀지 않았다.
크르르르르륵.
악룡의 고갯짓이 힘을 잃어갔다. 사방으로 날뛰어대던 발이 어느 순간 힘없이 버르적거렸다.
“내가 바로 가장 위대한 거인! 가장 먼저 깨어난 첫 번째 하이로드다!”
승리의 포효, 거인은 사납게 울부짖으며 다른 군주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들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통곡의 군주는 하얗게 질린 채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해대고 있었고, 야수왕은 떨떠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위대한 군주의 자존심조차 내버린 채,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던 진혈의 군주였다.
제 주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건만, 노예는 움직일 생각조차 없어 보였고 묘하게 웃음기마저 보일 지경이었다.
무언가 약점이라도 잡혀 있었던 것일까.
거인은 혼자 납득해 버렸다. 마침내 자신 덕에 굴욕적인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어 기쁜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이로드씩이나 되어서 노예를 자처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흥! 나에게 빚을 졌군.”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거인이 입을 놀려대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혈의 군주가 작게 웃으며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보았던 탓이다.
‘멍청하긴…….’
진혈의 군주는 보란 듯이 입술을 비틀어 몇 번이고 소리 없이 속삭였다. 그녀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음을 깨달은 순간, 그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소스라쳤다.
거인은 뒤늦게 제 팔뚝에 휘감긴 채 축, 늘어져 있던 악룡의 목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에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대며 발버둥을 치던 악룡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놈! 숨통도 질기구나!”
다시 한 번 목을 휘감은 팔뚝에 힘을 주고 용을 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악룡은 꼿꼿하게 고개를 세웠을 뿐이다.
거인은 그제야 악룡이 자신의 속박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너 설마, 날 가지고 놀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악룡의 아가리가 쩍 하고 벌어졌다. 그리고 거인은 그대로 악룡에게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군주들은 입을 쩍 벌렸다. 제 머리통보다 몇 배는 커다란 거인을 통째로 집어삼킨 흔적이라고 해봐야 볼록 튀어나온 배밖에 없는 악룡의 모습이 괴기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놀라거나 말거나 악룡은 방금 전의 사투가 무색하게 마치 한 끼 식사라도 즐긴 듯 느긋하기만 한 모습이었다.
꺼억.
악룡이 트림을 한다 싶더니, 기분 나쁜 빛깔의 액체로 범벅이 된 무언가를 뱉어냈다.
“주인님께서 드물게 인정을 베푸셨네. 평소였다면 꿀꺽하셨을 텐데.”
뒤늦게 정신을 차린 군주들이 악룡의 토사물을 살펴보니, 엉망진창의 몰골이 된 거한이 토사물 사이에 끼어 있었다.
안젤라의 말과는 달리 김진우는 인정을 베푼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강대한 하이로드의 힘을 흡수할 기회를 동정 따위로 져버리기에는 너무나 탐욕스러운 존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천장거인 군주를 도로 내뱉은 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걸 삼키면 무언가 변해 버린다.
천장거인 군주를 집어삼키는 순간, 저절로 알게 되었다. 이제껏 수많은 강자들의 힘을 흡수하고 존재마저 먹어치웠지만, 하이로드의 힘은 다르다.
본능적인 위기감에 그는 거의 소화할 뻔했던 천장거인 군주를 도로 내뱉어야 했다.
이건 스위치다. 그것도 절대 눌러서는 안 되는 스위치.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오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악룡의 악의에 파묻혔던 이성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후우.”
김진우는 넘실거리며 뻗쳐 나가는 검은 기운을 다시 안으로 갈무리했다. 한껏 부풀어 올랐던 악룡의 본체가 쪼그라들고, 악의로 점철되었던 검은 빛깔 용린이 부스러져 내렸다.
그리고 악의와 증오가 마침내 원래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 그의 내부로 모조리 빨려 들어갔을 때, 그는 다시 인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이곳저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나가들이 무릎을 꿇으며 하이로드를 상대로 거둔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주인님, 무사하시니 다행이에요.”
여차하면 끼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던 도미니크만이 오직 축하의 말 대신 무사함을 기뻐했을 뿐이다.
“저자는 묠니르가 보이는 곳에 묶어두고 잘 감시하라.”
김진우는 천장거인 군주의 처우를 그렇게 결정 내리고는 곧장 다른 군주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의 협력이 거짓이 아니기를 바라겠다.”
악룡의 용태는 이미 온데간데없지만 눈가에 남은 광기와 악의는 그대로였던지라 고개를 끄덕이는 야수왕과 캐서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의식을 찾지 못한 천장거인 군주를 내버려둔 채, 캐서린과 야수왕은 자신의 미궁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궁지를 벗어난 군주들이 마음을 달리 먹을 수도 있었지만 계속해서 붙잡아 둘 수도 없었으니, 지금은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괜찮은 걸까요?”
도미니크가 우려를 표했지만, 김진우는 그다지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힘의 격차가 명확하다. 게다가 이쪽에는 진혈의 군주마저 있으니 섣불리 다른 생각을 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게다가 저들의 힘은 내 예상과 다르게 제대로 된 하이로드라고 보기에 힘들 정도였어. 만약 배신한다면 그때 가서 처리하면 그만이야.”
분명 천장거인 군주의 힘은 강대했다. 공작들마저 압살시켰던 악룡의 태가 잠깐이지만 찢어발겨질 뻔할 정도였으니 과연 하이로드의 힘은 대단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분명 강대한 힘을 갖고 있지만 천장거인 군주에게는 자신이 가진 탐욕의 권능과 같은 막강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미처 본신의 힘을 전부 끌어내기도 전에 압도당했던 탓인지, 그도 아니면 상성이 좋지 않았던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기대했던 하이로드의 진짜 힘에 미치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은 저들을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김진우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날카로운 질문 하나가 그의 가슴을 후비고 들어왔다.
***
“할 말이 있다고?”
떠나기 전, 따로 자리를 요청한 캐서린은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기껏 불러놓고 말을 않는군.”
전투 직후, 그것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던 일전 이후이니만큼 김진우의 목소리에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그 서슬퍼런 기색에 번쩍 고개를 든 캐서린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너, 그 힘 다시 쓰지 않는 게 좋아.”
“그게 무슨 말이지?”
그녀의 말은 마침 그의 고민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표정을 풀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캐서린은 단 한 번도 그에게 보이지 않았던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지닌 힘, 그건 절대로 하이로드의 힘이 아니야.”
“그럴 수밖에. 이건 하이로드가 지닌 권능이 아닌 나가의 왕이 지닌 힘이다.”
“아니, 달라. 나가들은 비록 강력하긴 하지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9층에 존재하는 수많은 소환수 중 하나에 불과해. 나가들이 9층을 평정할 수 있었던 것은 네가 왕이었기 때문이지, 절대로 그들의 힘 때문이 아니야. 그런 나가의 왕에게 하이로드조차 찍어 누를 어마어마한 힘이 주어졌을 리가 없어.”
그 스스로도 느껴야만 했던 이질감을 그녀는 콕 짚어 말했다.
“어쩌면 저들이 지금의 강력한 소환수가 된 것도 네가 주인이기 때문일 수도 있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그는 제 속에 숨겨 두었던 의문을 끝내 풀어내지 않은 채, 캐서린에게 물었다.
“네가 방랑 군주의 파편, 그 자체라 말했지?”
“아픈 속을 잘도 후벼 파는군.”
캐서린은 그의 퉁명스러운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넌 지금 스스로에게 주어진 힘이 무엇인지 먼저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어.”
그녀는 대답조차 기다리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어쩌면 옛 군주들이 남긴 것은 그 강대했던 권능과 유산뿐이 아닐지도 몰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너에게 이어졌을지도 모르지.”
***
통곡의 군주가 남긴 한마디는 그녀의 권능만큼이나 불길했고, 갑갑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김진우는 그녀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스스로도 짚이는 바가 있었던 탓이다.
“심층, 가장 깊은 심층으로 가봐야겠다.”
외눈박이 군주가 백오에게 전하기를 가장 깊은 지저에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 말했다.
그것이 지금의 상황을 예견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외눈박이 군주가 진리의 왕좌를 통해 중요한 무언가를 본 것만큼은 확실했다.
“함정일지도 몰라요. 아직 주인님은 배덕의 군주가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해요.”
그사이 그의 사고를 엿본 도미니크가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배덕의 군주 역시 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할 테지.”
만약 배덕의 군주가 원했던 것이 옛 군주들의 재림이요, 지저와 지상의 하나됨이었다면 그 계획 안에는 수많은 옛 군주들의 권능을 집어삼킨 탐욕스러운 괴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이야말로 그가 지저라는 판 위에서 오래도록 창대한 계획을 준비해 왔던 배덕의 군주를 거꾸러트릴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만약 그마저도 배덕의 군주가 예상했던 것이라면요?”
도미니크는 그것마저도 옛 군주들이 계획한 것일지도 모른다며 한사코 그를 만류했지만, 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나는 그깟 계획에 놀아나지 않는다.”
그는 볼품없는 나무 창, 겨우살이 나무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미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갑작스레 미미르가 방문한 것이다.
“위시 스톤의 소재를 파악했습니다.”
헤어진 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이 작은 임프는 생각지도 못한 소식을 들고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