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87)
던전 견문록-287화(287/319)
# 287
던전 견문록
제 288 화
기다렸던 언더 엘프 순찰자들은 감감무소식이고, 엉뚱한 이가 먼저 대미궁을 찾았다.
“군주님.”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찾아온 미미르는 전에 없이 궁색한 모습이었다.
“두고 간 것이라도 있나.”
김진우는 빤히 짐작 가는 것이 있음에도 사정을 모르는 척 능청을 떨었다. 그런 그를 보며 미미르는 복잡한 얼굴을 해 보였다.
황혼 이후로 텅 비어버린 창고를 겨우 채워놓고, 존재도 몰랐던 보고를 보여주었더니 주인이랍시고 알맹이만 쏙 빼갔으니 그간의 공은 무색하다.
게다가 그 대가로 자신은 안락한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위험천만한 지저로 내몰리게 되었다. 속이 쓰리지 않으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속으로 오만 욕을 다 하고 있으리라.
“끄응. 사정이 복잡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군주님께 몸을 의탁하려 합니다.”
사정이 어지간히 급하긴 한 모양이다. 이리저리 말을 꼬고 돌리는 것을 좋아하는 미미르가 이 정도로 단도직입적으로 나오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사정? 무슨 사정?”
김진우는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상단의 본거지가 다른 이들에게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그간 맺어온 은원 관계가 적지 않으니, 우선은 군주님의 그늘에 몸을 피하려 합니다.”
목마른 이가 우물을 파는 법이다. 결국 미미르에게 남은 선택은 비굴하게 허리를 굽히고 그의 아량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야말로 블랙 머천트를 노출시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었지만, 대놓고 따지기에는 스스로도 찔리는 것이 많았으리라.
설령 제 과실이 없다 한들 창고의 원주인에게 무슨 권리로 이전을 따진다는 말인가. 하물며 힘이 전부인 지저에서 그는 강자였고 자신은 약자였으니 새삼 따질 배짱도 없었다.
“흐음.”
그는 미미르의 말을 듣고도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대신해서 나선 것은 안젤라였다.
“속에 시꺼먼 것을 품고 무슨 낯짝으로 여길 찾아왔나 몰라.”
안젤라는 그간 자신의 주인 모르게 많은 수작을 부려온 미미르의 과거를 콕 짚어 비난했다.
“여러 번 실수를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공이 더 컸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니었다면 군주님께서 이리 빠르게 성장하실 수…….”
“닥쳐.”
나긋나긋하던 음성이 순식간에 표독스럽게 날뛰었다.
“주인님이 이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면, 당장 그 비루한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 지저에 흩뿌렸을 것이다.”
난데없는 악담에 미미르가 어리둥절한 모습을 해 보였다. 그래도 딴에는 철혈의 아나톨리우스에게 그녀의 신변을 넘겨받은 이후, 나름대로 신경을 써왔다 자부했던 모양이다.
“다시는 주인님을 군주님이라 부르지 말라. 제 주인을 군주라 부르는 종도 있던가. 네놈은 스스로 종을 자처하면서 뻔뻔하기도 하구나.”
검은 손톱을 길게 뽑아 쏘아붙이는 그녀의 기세가 하도 사나워 미미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가증스러운 주둥이로 다른 하이로드들에게도 군주님이라 불렀을 테지. 네놈이 정말 주인께 몸을 의탁하려 한다면, 호칭부터 먼저 바꿔야 할 거야.”
안젤라는 살기등등한 얼굴로 그런 임프의 얼굴을 노려보다 주인의 얼굴을 보고는 뒤로 물러섰다.
“앞으로 한 식구가 될지도 모르는데, 너무 그리 가열차게 몰아붙일 건 없다.”
“군… 주인님!”
미미르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색을 띠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이어진 김진우의 말에 도로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전부 틀린 건 아니야. 공이 있다면 과도 있다. 지금의 그대는 내 아량에 기대 살 길을 찾아야 할 터, 그런 입장도 잊고 그간의 공을 들먹이고 있는 게 우습구나.”
그의 음성은 뒤로 갈수록 차가워지다 끝에 가서는 얼음물이 뚝뚝 떨어질 듯 냉혹해졌다.
“상황이 급하니 머리가 굴러가지 않는 건가? 내 말을 못 알아들은 모양이군.”
“네? 그게 무슨…….”
미미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으니 그가 차갑게 대꾸했다.
“네놈이 지금 해야 할 건 그 잘난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게 아니라, 바짝 엎드려 선처를 바라는 것이다.”
내버려 두면 어디까지 기어오르려 할지 모르는 미미르다. 게다가 그간 뒤에서 꾸며온 수작질에 놀아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지금 이 자리에서 버릇을 고쳐 놓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것이 나았다.
“꿇어라. 그리고 빌어라.”
김진우는 작정한 듯 그에게 굴종을 강요했다.
“그리하면 내가 네놈과 블랙 머천트의 비루한 명을 조금 더 연장시켜 줄지도 모르는 일이니.”
미미르는 그의 오만한 말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하기야 이곳까지 찾아왔을 때 이런 상황을 예상했을 테니, 새삼 망설일 이유도 없으리라.
“주인이시여.”
털썩, 무릎을 꿇고 이내 동그란 머리통을 바닥에 찍듯이 숙여 보인 미미르가 처음으로 그를 주인이라 불렀다.
“부디 이 못난 종을 거두어주소서. 이 미천한 인생이 주인의 보고를 다시 한 번 지킬 수 있도록 해주시옵고, 종의 일족이 거들 수 있도록 해주옵소서.”
쾅쾅.
제 스스로의 행실이 그다지 좋지 않았음을 잘 아는 것인지 미미르는 이마에 빨갛게 피가 오르도록 머리를 찧어댔다.
김진우가 요청을 받아주자, 미미르는 자신의 수하들과 재산을 이주해 오기 위해 황급히 자리를 떴다.
“과연 그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요.”
모리건을 비롯한 소환수들은 하나같이 미미르를 믿을 수 없다며 다시 생각할 것을 간청했다.
“나 역시 미미르를 믿지 않는다. 저 교활한 임프를 믿느니, 차라리 심층의 귀족들과 손을 잡고 말지.”
“그렇다면 왜, 그를 받아들이신 겁니까? 저런 자를 지척에 둬서야, 될 일도 안 되고 말 겁니다.”
모리건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고, 안젤라가 조심스럽게 주인의 의중을 떠보았다.
“주인님은 미미르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근처에 두려는 것이 아닌지요?”
김진우는 웃었다.
“그런 것도 있지만, 갈 곳이 없어진 미미르가 배덕의 군주를 선택하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그런 생각이셨다면 차라리 아까 그 자리에서 죽였다면 깔끔하지 않았겠습니까.”
얼마나 미운털이 박힌 것인지, 소환수들 중에 미미르를 두둔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걱정하지 마라. 미미르의 처벌은 이미 정해진 사실, 단지 그 이용 가치가 남아 일정을 미루는 것뿐이다.”
솥에 찬 물이 뜨겁지 않다 하여, 솥이 뜨겁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엾은 미미르는 제 몸이 익어가는지도 모르고 냉정을 가장한 불붙은 분노에 제 몸을 맡긴 것이었다.
“그날이 멀지 않았다.”
자꾸만 가속화되어 가는 지저의 변화가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막아도 찾아올 복원의 그날, 그는 이제껏 자신을 기만했던 모든 이의 계획을 뒤집고, 그들을 벌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껏 몇 번이고 뒤통수를 쳐 온 교활한 임프 역시 그들과 운명을 함께 하리라.
“끄응.”
스산한 웃음을 짓는 주인의 얼굴을 보며 소환수들은 새삼 그가 얼마나 집요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고,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미미르가 떠나간 사이 언더 엘프 순찰자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지저가 전에 비해 더할 수 없이 확장되었노라며 보고했다.
“그 광활함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음이니, 단기적으로 모든 영역을 둘러보는 것은 불가능할 듯하나이다. 하나 시간을 주신다면 반드시 끝을 보겠나이다.”
릭샤샤의 보고에 김진우는 생각했다. 어쩌면 층의 구분 없이, 오직 하나의 세상이었던 지저가 완전히 과거로 회귀한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썬 그의 말마따나 당장에 얼마나 지저가 확장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또한 릭샤샤는 일찍이 본 적 없었던 괴이한 크리쳐들이 지저의 곳곳에서 목격되었다며, 우려를 표했다.
“머리 일곱 달린 아룡(亞龍), 금빛 번쩍이는 피부를 두른 거인, 각기 염소와 사자, 노인의 얼굴을 한 크리쳐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흉흉하기 그지없는 괴물들로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었나이다.”
그녀는 몇 개인가의 미궁이 괴수에게 공격당해 불과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멸망하는 것을 보았노라 말했다.
“그들은 끔찍하게도 미궁 자체를 먹어치웠나이다. 마치 그릇 안의 쌀알처럼 병정들을 씹었고, 끝내는 미궁을 통째로 집어삼켰나이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그들은 전보다 더 거대하고 흉포해졌으니, 그대로 두면 그 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나이다.”
개중에는 공작급 미궁마저 있었던 모양인지, 괴물들의 만행을 보고하는 릭샤샤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공작급 미궁이 하루를 채 버티지 못했다니, 끔찍하군.”
악룡의 힘을 빌어 우르수스들과 타루스들의 왕을 일망타진했던 바가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손쉽게 처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심층의 지배자다운 위용이 있었고, 또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다. 단지 상대가 좋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옛 군주들이 내내 싸워왔던 고대의 크리쳐들이 깨어난 것 같아요.”
도미니크의 표정은 심각했지만 그다지 걱정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괴물들이 아무리 사납다 해도 이곳을 넘보지는 못할 거예요. 발홀과 이곳 대미궁은 그저 그런 미궁과는 격이 다르니까요.”
발홀의 첨탑에 웅크리고 있는 묠니르의 위력은 주변의 지형을 통째로 바꿀 정도로 강력했고, 대미궁의 식탐 역시 수많은 적들을 집어삼킨 바가 있었다. 그들이 정말로 막 깨어난 고대의 괴수라 한들 쉽사리 이곳의 방어가 뚫릴 일은 없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도 이곳을 제외한 다른 미궁들의 사정은 다르겠지.”
다만 문제라면 그들이 정말 릭샤샤의 보고대로 미궁 자체를 먹어치우는 괴물들이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흡수해야 할 옛 권능의 파편들이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쉽게 풀리는 법이 없군.”
김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밥상 하나를 두고 근본도 모르는 괴물들과 실랑이를 하게 생겼으니 영 마음이 편치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지저가 이 지경이 됐다면 디나리온이 브륜테스를 통하더라도 위시 스톤을 반입해 오는 것이 쉽지는 않겠어.”
위시 스톤을 가져다 바칠 것이라 약속했던 타락의 여왕은 일개 백작에 불과했고, 공작 급 미궁마저 하루 만에 멸망시키는 괴수들에게서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미미르를 다그쳐 브륜테스의 행방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밉상 맞은 놈이지만 살려두길 잘했군. 미미르가 돌아오는 대로 타락의 여왕을 찾아오라.”
“네, 주인님.”
지시를 내리는 그는 안젤라나 브륜테스의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이들이야말로 지저의 정점에 있는 하이로드들이었으니, 새삼 백작 따위를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 왔듯이 오라는 손님은 오지 않고, 불청객이 먼저 찾아왔다.
쾅!
천장거인 군주와의 일전에서 한 번 들어보았던 굉음, 묠니르가 울부짖는 소리에 김진우는 미궁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놈이로군.”
그런 그의 눈에 발홀의 높다란 성벽만큼이나 거대한 괴수가 난동을 피워대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