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Odyssey RAW novel - Chapter (288)
던전 견문록-288화(288/319)
# 288
던전 견문록
제 289 화
102. 흉신재래
공작급 미궁을 하루 만에 멸망시킨 괴물이니 보통 끔찍한 존재가 아닐 거란 사실은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 괴수는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는 흉악한 모습이었다.
머리는 여덟이요, 몸통은 오물을 뒤집어쓴 듯 불길한 검은빛이다.
거꾸로 돋아난 비늘은 하나하나가 나가의 방패만큼이나 크고 단단해 보였으며, 살이 뒤룩뒤룩 찐 몸통은 발홀의 성벽만큼이나 거대했다.
용과 비슷한 모습이지만 흉물스러운 외양 그 어디에도 용의 고고함이나 품격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괴물의 뒤로 수없이 많은 작고 큰 크리쳐들이 발홀의 성벽에 달라붙어 턱을 아그작거리고 있었다.
“아룡…….”
아무래도 언더 엘프 순찰자가 보았다던 머리 일곱 달린 아룡이 바로 눈앞의 괴물인 듯했다. 다만 일곱이라던 머리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게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머릿수가 다른데? 게다가 수하들이 있다고는 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하지만 의아함도 잠시였을 뿐이다.
“아.”
다시 한 번 불꽃을 토해낸 묠니르에 직격당해 뭉개진 머리가 뭉텅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 두 개의 머리가 자라났다.
그새 여덟이었던 것이 아홉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져 내린 머리통이 잘게 부서지더니 그 조각조각이 각기 크고 작은 크리쳐가 되었다.
“말도 안 되는 놈이군.”
그 모습을 본 김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쾅!
묠니르는 그런 크리쳐들을 내버려 두고 오직 괴물을 두들겨 댔다. 그 덕분에 성벽의 바로 아래까지 다가선 크리쳐들과는 달리 아룡은 쉽사리 성벽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모든 화력을 뿜어낸 묠니르는 곧 충전에 들어갈 테고, 그렇게 거인 살해자가 침묵한 사이 괴물이 달려들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적의 침입에 맞서 주인의 허락 없이 스스로 가동된 묠니르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위력과 사용 시간이 형편없을 정도로 줄었습니다.] [묠니르가 재충전에 들어갑니다.]아니나 다를까. 벼락을 토해내던 묠니르가 우려대로 침묵해 버렸다. 에인헤리들이 성벽 위에서 전투를 준비하는 것이 보였지만, 과연 저 거대한 괴물을 상대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지 알 수 없었다.
“나가들을 물려라.”
잠깐 사이에 전투 준비를 마치고 도열한 나가들을 뒤로 물린 김진우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번 전투는 에인헤리들과 발홀만으로 할 것이다.”
천장거인 군주를 상대로 시험 운용을 해보기는 했지만, 아직 제대로 된 힘을 견식하지 못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공작급 미궁마저 하루 만에 멸망시킨 괴물을 상대로 발홀이 얼마만큼의 힘을 발휘할 것인지를 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세상만사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많은 법이다. 당장에라도 발홀의 성벽을 들이받을 것 같았던 괴물이 목을 곧추세우더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드디어 찾았구나!]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탁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던가!]흉물스럽고 우악스러운 외모와는 달리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음성에는 고차원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생긴 것과 달리 좀스러운 재주를 부리는구나.”
김진우는 직접 머리를 관통하는 괴물의 악의에 인상을 찌푸렸다.
[네놈을 찾기 위해 억겁의 어둠을 견디고 비좁은 토굴에 웅크린 채 비참한 생을 이어왔노라!]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원한, 괴물이 증오로 가득한 아홉 쌍의 눈동자를 번뜩이며 으르렁거렸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런 비루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냐! 발홀의 주인이여!]“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괴물 놈아.”
괴물은 한참이나 제멋대로 지껄여댔다.
[그사이, 날 잊었단 말이냐!]“도무지 사람 말을 듣지를 않는군.”
아무래도 이제 막 깨어나서 제정신이 아닌지 자기 할 말만 해대는 아룡과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보탄! 이 저주받을 파수꾼들의 왕이여!]그런데 유달리 그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단어가 있었다.
“뭐? 파수꾼의 왕?”
[흐르는 시간 앞에서 네 스스로조차 잊은 모양이군. 꼴좋구나.]“알아듣게 얘기 좀 해보지?”
하지만 아룡은 전혀 그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꼴같잖은 의무를 내세워 수만 아룡을 탄압했던 오만한 군주여! 내 유일한 머리를 잘라낸 원수여!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그대와의 원을 정리하겠노라!]아룡은 그렇게 대화를 단절한 채,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일단은 대화할 분위기를 만들어야겠군.”
김진우는 사나운 기세를 바라보며 서서히 몸 깊숙이 잠들어 있던 악룡의 기운을 끌어냈다.
순식간에 검은 기운이 그를 감싸며 거대한 악룡의 형태가 되었고, 지저에 다시없을 탐욕스러운 괴수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
악룡과 아룡, 둘다 끔찍한 괴물들이었지만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었다.
악룡은 실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악령과도 같은 존재였으며, 아룡의 독니는 그 실체를 제대로 상대할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전투는 살벌했던 모습과는 달리 순식간에 끝이 나려 했다. 아홉이었던 용의 머리는 수도 없이 머리가 잘려 나가고 다시 자라기를 반복해 이제는 마흔여섯 개가 되었다.
“처음 등장했던 임팩트에 비하면 영 부실한 놈이군.”
머리가 분열될수록 도리어 힘이 약해지는 아룡을 보며 김진우는 다시 악룡의 태를 벗어냈다.
[네놈이 어째서!] [우리와 같은 모습을!] [가증스러운 파수꾼 주제에!] [어둠을 품었느냐!]마흔여섯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떠들어대니 머리가 터질 듯 울려댔다.
“시끄럽군. 난 대체 네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양손으로 막아도 여지없이 흘러드는 아룡의 의념에 그는 한껏 인상을 쓴 채 말했다.
“어째서 날 보고 파수꾼의 왕이라고 하는 거지?”
그가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악룡의 태를 벗은 것은 아룡이 한 말 중에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탓이다.
그의 질문에 아룡이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다 불현듯 웃기 시작했다.
[그런가. 그런 것인가. 오랜 세월에 소실된 것은 그저 우리 일족의 힘뿐만이 아니었구나.]“끝까지 제 할 말만 하는군. 성질 긁는 기술만큼은 탁월한 놈일세.”
이제껏 보아왔던 어느 누구보다 제 할 말만 해대는 태도가 고까워 그가 다시 한 번 살기를 내비쳤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룡은 여전히 제멋대로 지껄여 댈 뿐이었다.
[지저가 존재하는 한 끊어질 일 없다던 네놈들의 숙명 역시 지금에 이르러서는 무실해지고 말았으니, 박해받은 일족의 한이 더 이상 덧없지 않도다.]“네놈을 살려둔 이유는 그 멋대로 지껄여 대는 주둥이에서 들을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힘의 격차가 명백한 상황인지라 그의 말은 더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룡은 낄낄거리며 그를 조롱했다.
[아! 가엾도다! 우둔한 이여! 지저가 존재하는 한 그대는 나의 생을 끝낼 수 없노라. 고작해야 이 녹슬어 버린 육체에 종말을 고하는 것만이 그대가 거둘 수 있는 유일한 승리일지니, 보탄이 그러했고 그대 역시 그러하리라.]아무래도 강대했던 옛군주들이 고대의 괴수들을 박멸하는 데 실패한 것에는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네 겁 없음의 이유인가.”
김진우는 차라리 웃었다. 만약 그들에게 특별한 숙명이 있어 죽어도 다시 태어나는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에게는 그들을 끝장낼 힘이 있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저 거꾸로 돋아난 아룡의 비늘에 손을 대는 것으로 끝이었다.
[폭식의 권능이 발동되었습니다.] [존재마저 집어삼키는 유일무이한 권능이 고대 아룡의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습니다.]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마흔여섯 쌍의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려대던 아룡이 이윽고 상황을 깨닫고 비명을 질러댔다.
[네노오오옴!] [뭐하는 짓이냐아아아!] [끄아아아!] [안 돼에에에!]마흔여섯 개의 머리가 일제히 버둥거리며 난리를 쳐 댔지만, 이미 폭식의 권능이 발휘된 이상 그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
결국 소멸의 공포를 이겨내지 못한 아룡은 모든 것을 실토했다.
[모든 것을 말했으니.] [나를 살려다오.] [아니, 깨끗이 죽여다오.] [부디 비루한 육신을.] [끝내는 아량을 베풀어다오.]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 아룡은 깨끗한 죽음을 원했고 그는 피식 웃으며 다시 한 번 폭식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끄아아아!] [약속하지 않았던가!] [네놈에게는 지켜야 할 언령도 없는 것인가!]다급히 항의하는 아룡에게 김진우가 말했다.
“약속? 내가 언제 네놈을 살려주겠다고 말 했던 적이 있었나?”
그제서야 자신이 소멸의 공포에 눈이 돌아가 제대로 상황을 헤아리지 못했음을 깨닫고 아룡이 통탄했다.
[비록 그 전승은 이어지지 않았으나.] [그 사악할 정도의 꾀와.] [뻔뻔함은 이어졌으니.] [지저의 앞날도 밝지는 않구나!] [네놈의 앞날에 저주가 있으라!]의미 없는 저주를 끝으로 아룡은 끝내 사라지고 말았다. 그토록이나 자신하던 부활의 권능 따위는 발휘할 틈도 없는 완전한 소멸이었다.
그렇게 아룡을 처리한 김진우는 승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외눈박이 군주가 파수꾼들의 왕이었다니…….”
변변치 않은 아룡이었지만, 그에 반해 그 입을 통해 흘러나온 진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제껏 그저 강대했던 열 군주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외눈박이 군주는 사실 지저의 수호를 맡은 파수꾼들을 왕이었으며 주인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이어졌다.
“파수꾼을 지배하는 게 꼭 배덕일 거라고 단정 짓지는 마.”
언젠가 통곡의 군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생긴 순간 그는 곧장 안젤라를 대동하고 캐서린을 찾았다.
그렇게 찾은 그녀의 미궁은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게 지금 무슨 난리지?”
캐서린의 미궁은 거인과 아룡, 사자(死者)들에게 맹렬하게 공격받고 있었다. 묠니르와 발홀 덕에 큰 어려움 없이 거대 아룡을 퇴치했던 김진우와는 달리 그녀의 미궁은 꽤나 고전을 하고 있는 듯했다.
“좋지 않을 때 찾아왔네.”
하지만 막상 만난 캐서린은 난장판이 되어버린 미궁 밖의 상황과는 다르게 비교적 여유가 있어 보였다.
“가세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그렇지 않아도 슬슬 나서볼까 하던 참이었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던 그녀의 기세가 돌변하여 어느덧 강력한 군주의 그것이 되었다.
“거들어 줄 거야?”
음울한 기세와는 어울리지 않는 쾌활한 음성에 그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